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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칼빈의 신학과 경건          

 

 

 

                                                                                                                                                                                       이신열( 고신대학교 교수)

                    

서평에 앞서

우리 개혁신학의 칼빈과 그의 신학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의 수준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우리가 선호하는 종교개혁자 칼빈에 대한 연구가 적어도 외형적인 잣대로 평가할 때 많이 진전된 것은 분명할 사실인 것 같다. 이 땅에 개신교가 뿌리 내린지 벌써 100년이 지났으며 이런 세월이 흘러가는 가운데 한국 기독교, 적어도 보수적 기독교를 신봉하는 신학자들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랑스럽게 자신들이 개혁 신학자임을 내세우게 되었다. 우리가 지닌 칼빈의 삶과 신학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열망은 서양에 못지않게 드높지만 그 열망은 실제적 지식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안타까움이라고 할 수 있다. 매년 칼빈 관련 서적들이 계속해서 상당수 출판되고 있지만 이들을 살펴보면 번역서가 대부분인 것이 이 안타까움을 잘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칼빈 연구에 대한 부재 또는 빈약함이 우리 신학계에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이지만 이런 메마른 현실에 단비와도 같은 저작물 하나를 소개하고 이를 잠깐 살펴보고자 한다.

 

칼빈과 청교도, 그리고 중세의 버나드 (Bernard)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역사신학 교수로 재직 중인 원종천 교수는 이미 <칼빈과 청교도 영성. (1994), <청교도 언약사상: 개혁운동의 힘> (1998), <중세 영성의 진수: 성 버나드> (2004)를 저술한 바 있다. 이는 원교수의 저작 활동은 우선 그 방법에 있어서 여타의 신학자들이 선택하였던 동시대적 (contemporary)이며 평행적인 (synchronic) 접근과는 달리 칼빈 전후 시대의 특정한 인물을 골라 그들과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 분석하는 방식을 택하였다는 점에 있어서 독특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이러한 그의 저술 활동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 칼빈이 사실상 중심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즉 칼빈을 중심으로 청교도를 이해하고 또한 그의 시각으로 중세의 신학자 버나드를 연구하는 것이다. 14년 전에 작성된 그의 첫 단행본은 칼빈을 다루고 있지만 청교도들과 비교하는 관점에서 다루어졌다면 올 4월에 선보인 <존 칼빈의 신학과 경건>은 칼빈을 더욱 심도있게 다루기 위해서 경건이라는 보편적 주제와 더불어 교리적이며 총체적인 차원에 초점을 맞추는 칼빈의 ‘신학’을 신선하고 흥미롭게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 신간에 드러난 특징 중의 하나는 칼빈의 신학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경건’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여전히 원교수의 청교도 이해와 버나드에 대한 관심어린 애정이 탁월한 방법으로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본 서평을 청교도 그리고 버나드라는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인물과 신앙적 운동과 관련된 칼빈의 신학적 입장을 원교수가 어떻게 추적하고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는가를 중심으로 전개하고자 한다.

 

언약 및 안식신학자로서의 칼빈: 청교도 신학의 원조

먼저 이 책은 구원, 성찬, 언약, 인간, 교회, 안식, 그리고 신비의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2장은 구원과 성찬의 교리를 다루면서 (비록 분명하게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원교수는 사실상 두 교리의 공통점이 기독론적 기초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는 듯하다. 먼저 1장의 핵심적 강조점은 구원이 지닌 신비를 보여주는데 있지만 칼빈이 주장하는 신비의 근원에 그리스도의 인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특히 내세운다. 그리고 2장에서도 성찬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놓여 있음을 특히 강조한다. 3장은 칼빈을 언약신학의 원조로 이해하는 웨스트민스터의 피터 릴백 (Peter Lillback)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칼빈의 언약 개념이 중세의 유명론자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관대함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를 칼빈이 ‘부성애’와 ‘수용적 은혜“로 이해하였다고 밝힌다(117). 그러나 칼빈이 이들의 공로사상을 철저히 배격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서 그의 언약 이해가 중세의 그것과는 차별화될 뿐 아니라 더욱 성경적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리고 4-5장에서 인간과 교회를 다룬 후에 6장에서 칼빈의 안식 신학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6장은 다른 장들과는 달리 칼빈의 입장을 설명하는 방식을 탈피하여 안식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소개한다는 점에 있어서 독특하다고 불 수 있다. 즉 루터와 쯔빙글리의 견해를 소개할 뿐 아니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20세기 인물인 헤르만 훅스마 (Herman Hoeksema)의 견해까지도 다루고 있다. 물론 이 장이 칼빈이 안식 신학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러 다양한 학자들의 견해를 들어서 설명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칼빈 자신의 견해를 소개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분석하였던 앞 장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장을 전개하였음에 대한 정당화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원교수는 유독 6장 안식이라는 주제에서만 엄밀하게 표현하자면 ’교리사적‘ 시도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의 안식에 대한 이해의 핵심은 중세의 엄격한 성일 준수명령에 대한 반발의 차원에서 안식일에 대한 고정된 날자 개념에 집착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이를 구속적 관심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여 성화의 관점에서 이해하였던 것에 놓여 있기에 노동에서의 ’안식‘일이라는 본래적 의미가 축소되었다고 원교수는 비판한다. 오히려 안식을 창조질서에 입각한 계명의 관점에서 보는 창조 안식의 견해가 더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214이하). 원교수는 언약신학에 있어서 칼빈을 그 원조로 간주하는 것이 분명해보이지만 안식신학, 적어도 창조 안식과 안식일의 준수에 있어서 칼빈이 지녔던 유연함에 대해서는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버나드와 칼빈의 신비주의

7장에는 버나드와 칼빈의 유사성을 다룬 후에 칼빈의 신비주의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236-251). 여기에서 먼저 ‘신비주의’라는 용어를 원교수가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아쉬운 것은 신비주의에 대한 정의없이 칼빈의 신비주의를 논하는 것은 칼빈에 대한 원교수의 호의적인 태도를 증대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칼빈에게 있어서 신비적 요소란 버나드와 유사하게 구원의 신비성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찾았다는 점이 정확하게 지적된 것이 사실이다. 구원을 이성적으로 논하는 것이 지닌 한계를 극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구원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 것인가를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칼빈의 의도였음을 원교수는 수차례 올바르게 강조한다 (240-245). 그러나 “칼빈의 신비주의는 구원론에서 나타나는 신학적 접근만으로 대표되지 않는다. 그의 신비주의는 신학적 해설을 통한 신비신학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성만찬 개념을 통한 체험적 신비주의로 나타나기도 한다.” (245) 라는 표현은 사실상 칼빈을 중세의 다양한 신비주의자들로부터 적극적으로 차별화시키려는 의도를 지닌 표현임이 분명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오히려 칼빈을 여러 신비주의자들 가운데 (동일한 이성적 가르침을 공유하는 자로서) 특별한 종류의 체험을 지닌 자로 오해할 소지를 담고 있는 표현으로 인식될 수 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원교수가 주장하는 ‘칼빈의 신비주의’보다는 ‘칼빈의 경건에 드러난 신비성’이라는 표현이 더욱 원교수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반영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면서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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