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2)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사40:18)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궁극적으로 신비에 속하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명백하게 다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 자연과 경험의 세계로부터 삼위일체와 유사한 것(vestigium Trinitatis)을 끌어내려고 했다. 예를 들면 어떤 이들은 물(H2O)의 세 형태(물, 얼음, 수증기)를 가지고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물이 한 순간에 모두 고체화되거나 기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양(量)이 세 형태의 각 경우에 동일할 수 없다. 그리고 한 사람의 세 역할(아들, 남편, 아버지)을 통한 유비도 적합치 못하다. 왜냐하면, 각 역할이 한 장소에서 동시적으로 서로 이야기하거나 함께 수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추적 설명들은 사실상 앞서 말한 “양태론”(樣態論, modalism)이라는 이단의 가르침과 동일하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유비들에 의한 설명들이 시도되었지만, 그러한 현상학적인 유비들은 한결같이 성경에 계시된 대로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중요한 결함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설명이 곤란하다하여 그 교리가 불합리하다거나, 신앙할 가치를 상실하거나, 진리가 진리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빛은 파장이고 동시에 입자(에너지의 작은 결정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과학적 사실의 경우이다. 논리적으로는 동시에 두 가지 사실이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부인할 수 없는 실재의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윈리’가 매우 난해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을 불합리하다거나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원자 속에서 그토록 막대한 힘이 발생될 수 있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발명된 그 원자탄의 실험과 전쟁에서의 실재적인 사용을 통해서 그러한 힘의 발생은 사실로서 입증되어 졌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관계도 우리 인간의 완전한 이해를 초월하지만, 이 교리는 믿는 신자들의 구원을 위한 모든 실제적인 영적 요구를 온전히 충족시켜줌으로써 그 존재하심의 진리성을 믿음 안에서 확실히 알 수 있게 해준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는 이러한 신앙의 체험과 합리로 깨달아 확신에 이르는 진리의 사실이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 학생들은 참으로 불쌍한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학교에서는 1+1+1=3이고, 교회에서는 1+1+1=1로 배우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그의 무지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삼위일체 교리는 “삼위(三位)가 일위(一位)이다”고 말하거나, “세 개체(個體)가 한 개체이다‘라고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비난은 삼위일체 교리가 서로 분리된 존재인 삼위(三位) 또는 세 개체가 하나의 존재가 된다고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분리된 세 개체라는 것을 믿지 않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존재가 세 존재들로써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도 주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비판처럼 우리는 결코 비합리적이 아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과 유사한 것이 이 세상에 없고 인간 지식의 한계로 완전한 이해가 어려울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떻게 삼위일체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논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다만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하여 오직 믿음으로 그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연합과 교제를 통하여 분명히 깨닫고 확신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 교리를 완전히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친히 증거하시고 믿게 하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토록 어려운 삼위일체 교리에 왜 그처럼 큰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성부와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주장하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 것인가? 그렇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어떤 사상 체계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과 신앙생활 속에 살아 움직이는 분명한 실재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사실 신앙은 삶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추론하고 논증하기 이전에 이미 믿음 안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생명적인 교제를 통하여 그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기도하며, 또한 축도를 받음으로 이 교리는 처음부터 그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살아가는 모든 신자들의 신앙생활의 근거와 실제적인 내용이 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삼위일체 교리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자.



   첫째로, 삼위일체 교리는 구원론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만일 이 교리를 오해하거나 부정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내용과 의미를 바꾸거나 부정해야만 한다. 예수님이 단순히 한 피조물일 뿐 완전하신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한 피조물인 그가 십자가에서 어떻게 모든 인류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영원한 형벌을 일시에 대신하여 담당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양태론적인 입장에서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고, 사실상 성부 하나님 자신이 친히 예수님의 모습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한다면,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아닌 신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실제적인 죽음을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그 성격상 철저히 삼위일체적이다. 즉 그것은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하심으로 요약될 수 있다. 따라서 전 구속계시의 핵심이 되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떠나서는 우리의 구원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둘째로, 삼위일체 교리는 기도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대화를 나누는 놀라운 특권을 누리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 안에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기도할 때 우리는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생명과 사랑을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가 그에게 기도하고 예배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완전하신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가 아무리 위대한 분이라 할지라도 그를 향하여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은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 주님을 예배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빌2:9-11, 계5:12-14). 그리고 만일 아리우스주의자들처럼 ‘일체’이심을 부인하고 ‘삼위’이심 만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세 분의 하나님께 각각 따로 세 번 기도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기에 성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동시에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도 기도한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 기도의 오직 한 대상이시며(살전3:11, 5:23, 살후2:16-17, 3:16), 우리 축복의 오직 한 원천이 되신다(롬1:7, 고후13:13).



   셋째로,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능동적이고 생산적이며 자충족적이시기 때문에, 그 본질에 있어 세상의 창조와 인간의 구속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의 대상으로 피조물들을 필요로 하시는 외로우신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서로 합동하여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시며 불러주셔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순전히 영원하고 자유로운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온전한 사랑과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에서 기독교의 심장이 뛰고 있으며, 삼위일체 교리는 실로 기독교 신앙의 생명적 원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