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중생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선언한 분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선언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 속에 “거듭나지 아니하면”이라고 하신 것은 거듭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보편적 필수조건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부분이요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중생’(重生, regeneration)은 거듭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신학적인 용어다. 중생은 새로운 출생, 새로운 창조, 새로운 시작을 말한다. 그것은 단순한 마음의 변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말로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인격 안에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중생에 대하여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고 하였다. 동시에 중생은 영적으로 죽은 자에 대한 성령의 사역이다(엡 2:1~10). 성령 하나님은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으로 소생시킴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 하신다.

 

 이와 같이 말씀과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믿는 자는 중생을 통해 새로운 영적 성품을 받게 되며 새로운 관심과 취미를 통해 변화된 모습을 나타낸다. 중생한 자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께 대한 봉사,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진다. 또한 중생한 자는 죄에 대항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섬기는 새로운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중생을 회심의 경험과 혼돈해서는 안된다. 출생이 육적 삶의 시작인 것처럼 중생은 영적 삶의 출발점이다. 중생은 전적으로 성령 하나님이 기뻐 원하시는 바에 의하여 일어나는 주권적이며 순간적인 신적 행위다. 우리의 회심에 대한 자각은 점진적이지만 중생 자체는 즉각적이며 단회적이다. 물론 양자가 밀접하게 연관되기는 하나 중생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한다. 반면에 회심은 죄를 버리고 의로 돌아서는 인간의 행위를 강조한다.

 

 중생은 신앙의 열매나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신앙의 필수조건으로서 신앙보다 앞선다. 우리는 또한 중생하는 것을 우리 스스로 결정하거나 우리 속에 중생이 일어나도록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협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영접할 것을 선택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중생시키실 것을 결정하셨다.

 

 분명한 것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무능한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 의하여 중생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선택하고 행동하고 협력하며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영적 죽음과 죄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심으로써 영적 생명을 소생시키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신앙을 일깨워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실제로 믿을 수 있게 하신다.

 

 중생이 반드시 어떤 의식적인 감정적 요소를 동반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이다. 보는 눈과 바라는 것과 태도에 있어서 우리의 변화의식은 매우 점진적이고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수도 있다. 기독교 가정에서 양육 받고 유년기부터 복음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스스로 중생의 순간이라고 지적할 만한 특별한 사건 없이도 그리스도에 대한 명백한 신앙으로 성숙한 영적 생활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중생의 순간이라 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과 장소를 반드시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출생한 시간을 정확히 모른다고 해서 그것이 결코 그가 살아있지 않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성령을 통한 중생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그리스도인의 내적 확신과, 성령이 그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