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죽음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1)

 

모든 인간은 누구나 한번 태어나서 한번 죽는다. 사실상 죽음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매일의 삶 속에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막상 아름답고 충성스러운 삶을 살았던 사랑하는 분의 주검 앞에서는 왜 그가 꼭 죽어야만 하는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있다.

 

(1) 죽음은 정말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성경은 죽음의 불가피성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 9:27)라는 말로 확인하고 있다. 사람들은 죽음의 확실한 실재를 적어도 지적으로는 인정하지만, 정작 자신의 죽음의 불가피성만은 기꺼이 인정하지 않으려한다. 그래서 루이 15세는 자기 앞에서 “죽음”이라는 말을 입 밖에도 내지 못하도록 신하들에게 엄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죽음의 실재성을 부인한다고 해서 그 누구도 죽음을 없애거나 피할 수는 없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늙고 병들어 결국 죽어 땅에 묻히게 된다.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죽음은 결국 나 혼자서 걸어가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최후의 길목이다. 이 죽음은 우리에게 어느 날 갑자기 덮쳐오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죽음이라는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달리는 열차의 승객이 된 것이다.

따라서 살고 있는 것은 죽고 있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안에 있는 삶의 의미는 죽음의 의미와 공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생을 의미있게 바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이 죽음의 사실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그에 적합한 삶을 살아야만 한다. 이 죽음의 실재를 받아들이는 지혜를 가졌던 필립 알렉산더 대왕은 그의 노예를 시켜 아침마다 냉수 한잔과 더불어 “필립왕이여, 왕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라는 말을 외치게 하였다고 한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사도 바울도 이 죽음이 이 세상에 현존하고 있음을 인정하였고(고후 4:11~12), 자신의 죽음을 분명히 예상하고 있었다.(고후 5:1~10, 빌 1:19~26).

 

(2) 죽음이란 무엇인가? 성경 중에서 죽음에 대한 최초의 언급인 창세기 2장 17절의 죽음은 단순한 육체적 죽음 그 이상을 의미하고 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분리를 의미하는 영혼의 죽음도 포함하고 있다. 인간은 단순한 육체뿐만 아니라 영을 가지고 있는 전인(全人)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을 대비하여 말씀하신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시하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눅 12:4~5).

먼저 육체의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말한다(전 2:7, 창 3:19, 약 2:26). 육체적 죽음은 죄의 결과로서(롬 5:12) 우리 육체의 생명이 끊어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적 죽음으로 그 존재의 끝 또는 소멸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다만 또 다른 존재 양태에로의 전환일 뿐이지 존재의 중단(비존재)을 의미하지 않는다. 둘째로 영혼의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의 분리를 말한다(엡 2:1~2, 겔 18:4,20, 롬 6:23). 성경에서 인간 삶의 가장 깊은 의미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다.

따라서 죽음의 가장 깊은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제의 분열을 영혼의 죽음(영적 죽음)이라 한다. 아담의 죄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지금 본질적으로 영적 죽음의 상태 즉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임재로부터 분리된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러한 분리상태의 최종결과로서 모든 영원성을 완전히 상실하여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 아래 거하게 되는 것을 “둘째 사망”(계 21:8) 또는 “영원한 죽음” 이라고 한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육체적 죽음과 더불어 영적으로 죽은 자의 상실된 상태의 최종적 결말로서 마침내 이 영원한 죽음 아래 거하게 될 것이다.

 

(3)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불신자들에게 있어 이 죽음은 일종의 저주와 형벌 그리고 무서운 적과 원수(고전 15:26)라고 할 수 있다. 그들에게 죽음은 그 어떤 긍정적인 의미도 없으며, 오직 두려움과 저주스러운 공포의 사실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 죽음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정복하고 파괴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고(히 2:14~15), 부활하심으로 죽음에 대한 승리를 확증하셨다고 한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써 그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속량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죄의 결과들로부터도 구해 내셨다. 그런데 죽음은 바로 그 죄로 인한 결과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딤후 1:10).

물론 우리 신자들도 여전히 육체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지만, 이제 우리는 죽음의 가공할 세력과 저주에서 해방되었다(고전 15:54~57). 죽음은 이미 정복된 원수로서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고 파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로 인해 야기된 그 무서운 상태로부터 자유케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였고(빌 1:20~23), 칼빈의 죽음에 대한 명상은 지상의 순례자가 외국으로부터 아버지 집으로 귀가하는 즐거운 열망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기독교강요 3권 25장 6절).

 

(4) 죽음은 그리스도인도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다시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죽음이 죄에 대한 형벌이라면, 왜 그 죄의 모든 결과에서 완전히 구속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 정죄의 상징이요 고통의 과정이라 할 수 있는 이 육체의 죽음을 여전히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왜 우리는 에녹과 엘리야처럼 죽음을 보지 않고 직접적으로 에 갈 수 없는가?

물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죽음은 더 이상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과 보상에 의한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심판과 우리의 모든 죄책은 완전히 제거되었으며, 영적 죽음과 영원한 죽음도 이제는 모두 취소되었다. 우리는 결코 “둘째 사망”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육체의 죽음을 통과해야만 한다. 성경은 결코 육체적 죽음의 보편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범죄한 모든 인생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죄의 일시적 결과이며, 우리 인간 존재를 제한하는 타락한 인성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육체적 죽음의 보편성을 우리는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제 그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의 죽음은 죄에 대한 저주와 형벌이었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오히려 축복의 원천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죽음은 죄악된 세상에서 영과 육 사이의 싸움의 종식이며 죄짓는 날을 완전히 청산하고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몸의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의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의 완벽한 풍요 속에 들어가는 은혜의 관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새 날의 시작이다.

 

(5) 죽음은 참 사랑으로 이길 수 있다.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와 함께할 영광 때문에 사도 바울은 사는 것과 죽는 것 중에 어느 것을 택하는 것이 더 좋을지 분별할 수 없다고까지 말한 바 있다(빌 1:20~26).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이 남을 위한 전도자의 삶이기 때문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육신에 거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하였다. 바울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 남을 위한 사랑의 봉사에서 찾았다. 그것이 바로 바울의 삶의 기쁨과 자랑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 안에 삶의 터전을 잡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겼던 바울의 생에는 실로 아름답고 위대하였다. 죽음을 정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희생하며 섬기는 삶은 결코 죽음에 삼켜지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이기는 부활을 통하여 영원한 삶으로 나아간다. 이토록 참된 사랑은 우리의 참된 삶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죽음을 이기는 영원한 삶을 약속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다. 오직 그 사랑만이 우리의 삶을 참되고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