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단일성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3:2)

  하나님의 본체(being)는 하나님을 하나님이 되시도록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내적 구조와 본질을 말한다. 우리 인간은 그 하나님의 본체에 대해서 직접적이고 완해한 지식은 가질 수 없다(욥11:7).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의 신적 속성에서 계시하실 때, 그 속성들은 하나님의 본체를 반영하는 것이기에 계시하신 만큼 귀납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신적 본체에 대한 부분적인 지식은 가질 수 있다. 비록 부분적이고 제한적일지라도 그 지식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실제적이고 참된 지식이다. 특히 우리와의 관계 속에 계시는 구원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온전한 지식을 전달해 준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부분적이지만 참으로 온전히 알 수 있는 구원의 하나님의 본체와 그 하나님의 속성들과의 관계를 하나님의 단일성(unity)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 단일성은 단수성(singularity)과 단순성(simplicity)으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은 숫자적으로 유일한 한 분이시라는 하나님의 단수성에 대한 이해는 크게 어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단순성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본체와 속성의 관계를 잘 설명해 줄 뿐 아니라 나아가 삼위일체 교리를 적절하게 이해함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주로 그 단순성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단순성을 정의하자면 하나님의 본체와 속성들이 분리할 수 없는 하나를 이루고 있으나, 각 속성들 사이에 구별이 안 되도록 혼합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본체와 속성들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를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한 본체에 각 속성들이 절대 완전한 것으로서 ‘조화적인 전체’(a harmonious whole)를 형성하여 분리할 수 없는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 어느 구절에도 하나님의 속성을 떠나서 하나님의 본체 혹은 본질을 언급한 곳이 없다. 피조물 세계에서는 서로 본체와 속성이 서로 다를 수가 있다. 가령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은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로서 영과 육을 가졌다고 할 수 있으나, 백인과 흑인 혹은 유능한 자와 무능한 자는 그 속성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이것이 적용되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있어 본체와 속성은 하나이다. 속성들은 하나님의 본체에 첨가된 어떤 것들이거나, 하나님의 본체를 구성하는 여러 부분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들을 하나님의 본체와 분리하여 독립적으로 언급할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할 때 ‘사랑’이라는 속성밖에 본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고 할 때도 공의 외에 어떤 남은 부분의 본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본체와 각 속성은 완전히 하나이다. 각 속성이 하나님의 전 본체에 각기 충만히 거하고, 동시에 한 분 하나님의 전 본체가 각 속성 안에 거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에 있어서 완전하여 하나님 되시고, 동시에 공의에 있어서도 완전하여 하나님 되신다. 하나님의 한 부분은 사랑이시고 다른 한 부분은 공의이시거나, 아니면 하나님은 부분적으로 사랑이시고 또한 공의로우시다고 해서도 안 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이 공의보다는 사랑 쪽에 더 가깝다든지 사랑보다는 공의에 더 가깝다고 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 전부가 항상 사랑이고 동시에 공의이시라고 보아야 한다(출34:6-7).
  우리가 하나님의 단순성을 생각할 때, 본체와 각 속성은 “하나이다”는 개념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 본체에 각 속성들이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하나님과 공의의 하나님이 분리할 수 있는 별개의 하나님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속성의 종류만큼 여러 본체를 가지고 있는 여러 신들을 말하는 다신론(多神論)에 기운다. 따라서 (1) 각 속성들은 상호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공의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하여 잘 나타났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준다(요일4:10). 그러나 십자가의 사랑이 하나님의 공의를 배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심은 그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기 때문이다(롬3:25-26). 그리고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고전2:2-8)와도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전능성은 배제하는가? 그러나 누가는 예수님을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인”(행2:23-24) 유대인들의 악행을 통해서도 결국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뜻과 계획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십자가 그 자체는 인간의 죄의 도발에 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흉악한 십자가를 통해서도 원래 계획하신바 인간 구원의 계획을 그대로 성취하셨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전능성이 증명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하나님의 전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공의로우시며 동시에 사랑이시고, 신약과 구약에서 행하신 그 모든 일들에서 하나님의 그 어떤 속성도 결코 무시되지 않았다.
  (2) 속성들 중에 어느 하나를 본질화하여 본체로 삼아서는 안 된다. 어떤 한 속성을 하나님의 본체를 가장 잘 나타내는 대표적 속성으로 높이고 다른 속성을 그것에 예속시키거나 격하시켜서는 안 된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하는 말씀에 근거하여 사랑이외의 속성들을 무시한다든지 그것들을 사랑에 예속시켜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속성 속에는 개별적으로나 전체적으로나 다같이 거기에 하나님의 본질적인 충만이 거하기 때문이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절대화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성경적인 신관을 수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원리를 무색하게 하였고, 결국은 상황윤리에 기울 수밖에 없었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의 단순성을 말한다고 해서 각 속성들 사이에 구별이 안 되도록 혼합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각 속성들은 하나님의 본체와 일치하면서도 속성들 사이에 아무런 구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각 속성들은 제각기 그 특수한 내용과 성격을 띄고 있어 상호 구별이 가능하다. 하박국 선지자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3:2)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 곧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서로 구별이 될 경우에만 성립될 수 있는 말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이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증거해 주고 있다(롬5:8-9). 즉 하나님은 사랑을 시행하시면서도 죄에 대한 진노를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가 서로 구별이 될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동시에 나타났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곧 하나님의 공의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본체에 각 속성들은 서로 혼합되어 있지 아니하며, 항상 서로 명백하게 구별이 가능하다. 이처럼 하나님의 본체와 각 속성들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를 이루고 있으나, 서로 구별할 수 없도록 혼합되어 있지도 않다. 이러한 하나님의 단순성은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