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양심과 계명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 2:14~15)

 

우리는 ‘양심’이라는 말로 남을 호되게 몰아세우거나 또는 자신을 옹호하며 적절히 보호하기도 한다. 그래서 윤리적으로 어려울 때 마다 모든 것을 적당히 모호하게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 있는 매우 편리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 자칭 선한 삶을 산다는 도덕군자들은 자신 속에 있는 양심을 따라 사는 것으로 족하며, 그것으로 스스로 자신의 삶의 구원과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로마 카톨릭은 양심을 선악을 판단하는 어떤 객관적 지식으로써 본래부터 인간 속에 있는 상당히 믿을 만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주장이 성경적으로 정당한가? 도대체 양심은 무엇이며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양심’을 하나님의 율법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이방인들의 마음에 ‘율법의 일’과 ‘율법의 행위’를 새겨 두셨다. 하나님의 율법에 규정되어 있어 우리가 행해야 할 일과 행위들을 우리 마음속에 새겨 두셨다고 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비록 유대인들처럼 특별계시의 형태로 주어진 율법(십계명)은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이미 새겨두신 그 율법의 일들을 본성적으로 행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출산하고, 그 자녀를 사랑으로 양육하고 보호하며,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그러한 자연적인 인간 본성을 따라 모든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일들을 행한다는 것이다(롬 2:14).

물론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믿지도 않지만 그러나 자연적인 충동을 따라 율법의 요구대로 그 일을 행하거나 거부할 때 그 마음속에 소위 양심적인 작용이 나타난다. 그 양심의 작용은 ‘송사’ 또는 ‘변명’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하였다(롬 2:15). ‘변명’은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일을 그대로 행하지 못한고로 소위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때문에 하는 것이요, ‘송사’는 그 율법의 일을 그대로 다 행한고로 자기 속에 소위 ‘양심의 떳떳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양심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떤 고유한 기관과 객관적인 법칙 또는 지식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이 심어주신 그 율법의 행위를 따라 그대로 행했느냐 않았느냐에 따라서 ‘가책’과 ‘떳떳함’을 느끼게 되는 인간 마음의 작용을 의미한다. 이러한 양심의 작용이 생기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마음에 율법의 일과 행위를 새겨두셨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된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그 양심적 작용(변명과 송사)을 느낄 때 그 작용의 궁극적 원인자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올바로 행할 수도 응답할 수도 없다. 특히 그들은 양심적 작용이 생길 때 자기 속에 본래 있는 어떤 믿을만한 독립적인 기관이 작용하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자기 속에 있는 어떤 믿을만한 객관적인 지식과 진리의 표준이 있는 것으로 오해한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양심은 점차 그 교만으로 ‘가책’은 무디어지고 ‘떳떳함’만 더욱 돈독해져서 마침내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딤전 4:2)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실상 그 양심의 가책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에서 오는 것이요, 그 양심의 떳떳함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산 것에 대한 하나님의 위로에서 오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는 양심에 대해 말할 때 언제나 이 하나님의 계명적 책망과 위로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에 직면할 때마다 ‘떳떳함’이라는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감사와 황공함을 느끼게 만들고, ‘가책’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책망에 대해서는 더욱 예민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양심’을 내세우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계명이 요구하는 나의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를 겸허하게 살펴야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선한 양심”(벧전 3:21)을 가지고 언제나 하나님의 계명적 위로가 넘치는 선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