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 구호 이해와 오해
이성호 박사
개혁주의 구호 가운데 "오직"이라는 말이 많이 들어간다. 대표적인 것으로 "오직 믿음," "오직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하나님께 영광." 이러한 "오직"은 개혁주의가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지만 그것이 잘못 이해될 때는 전혀 비개혁주의적인 신앙 양태를 가져오게 된다. 특히 "오직"은 듣는 사람에 따라서 매우 편협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분명한 뜻을 알고 사용하여야 한다. 특히 우리는 이 "오직"이 어떠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 무엇을 반대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1. 오직믿음.
오직 믿음이라는 말이 잘못 이해되면 믿음만 있으면 되고 다른 것은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결코 이런 식으로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 오직 믿음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Justification by faith alone)"의 준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오직 믿음"은 칭의와 관계된 말이다. 칭의에 관한한 우리의 선행이나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선한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종교개혁자들은 우리의 선행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선행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께 감사를 나타내는 중요한 방편이고, 이웃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게 된다. 종교개혁자들은 선행을 결코 부차적인 것으로 다루지 않았다. 다만 선행을 칭의와 연결시키지 않았을 뿐이다.
많은 개신교인들이 믿음을 전부로 선행을 부차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구원 받는 것을 가장 최고의 선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첫째, 구원 받는 것이 최고선인가? 둘째, 칭의와 구원을 동일하게 볼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적어도 개혁자들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하였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오직 믿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다른 신앙 덕목들 사랑과 소망과 같은 신학적 덕목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 뿐 아니라 지혜와 같은 덕목들은 아예 교회에서 들어설 자리가 없게 만들었다. 성경을 보라. 우리의 믿음을 다룬 책도 많지만 잠언, 전도서, 아가서와 같은 책은 지혜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많은 목사들이 목회에 실패하는 것이 믿음이 적어서 실패하는가? 내가 보기에는 아니다. 많은 목사들이 지혜와 사랑이 없어서 목회에서 실패하고 있다. 오직 믿음은 단지 제한적인 의미에서 "오직 믿음"이다.
2. 오직 성경
오직 성경 역시 잘못 이해되면, 성경책만 있으면 되고 다른 책은 필요 없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오직 성경이란 우리의 믿음과 생활에 있어서 성경이 최종적인 기준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다른 책은 필요 없다는 말을 결코 함의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개혁자들이 킹제임스 성경을 내 놓았을 때, 그들은 소위 외경[위경과 구분할 것]도 항상 같이 붙여서 출판하였다. 우리들은 외경에 대해서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개혁가들은 그것들이 우리 신앙생활에 상당히 도움을 준다고 보았다. 그들이 거부한 것은 그것들을 정경(최고의 권위)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종교개혁가들이 카톨릭 신학자보다 초대 교부들과 공의회 전통에 대해서 훨씬 해박하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은 단지 성경만 읽은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전통, 특히 교부들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과 카톨릭이 차이가 있었던 것은 성경과 그것들을 동일한 권위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안타깝게도, 종교개혁 시대와는 정 반대로, 개신교는 우리의 전통(진정으로 카톨릭적인 전통)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다. 이것은 아마도 오직 성경을 잘못 이해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오직 성경은 "성경만 있으면 된다"라는 말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이 오직 성경과 전통에 관한 것이라면 두 번째는 이성과 관계된 것이다. 오직 성경은 " 이성은 필요없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가들이 반대한 것은 이성의 사용자체가 아니라 잘못된 이성의 사용을 반대한 것이다. 개혁가들은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사용하여 신학을 변증하였다. 개혁가들이 반대한 것은 성경이 이성에 의해서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었지 이성의사용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특히 합리주의자였던 소시니언주의자들과 논쟁하면서 더욱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다. "오직 성경"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무조건 믿으라"는 말이 아니다. 삼위일체론이나 기독론에 사용된 용어들은 세상의 철학과 문화를 잘 받아들여서 교회에 정착시킨 개념들이다.
3. 오직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라는 말 역시 잘못 이해될 때 지나치게 기독론 중심적인 신학과 신앙 양태가 교회 안에 두드러지게 된다. "예수만 잘 믿으면 된다"라는 사고방식은 신자로 하여금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하는데 방해를 준다. 또한 신학을 함에 있어서도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현저한 무시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오직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라는 말이다. 따라서 신부나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될 수 없고, 마리아가 중보녀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오직 그리스도를 "예수만 잘 믿으면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개혁주의를 현저하게 오해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예수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도 필요하고 교회의 보살핌도 필요하고 피조물도 우리에게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중보자이기 때문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만인 제사장설"을 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내용을 오해하여 모든 성도가 다 평등하고 목사나 장로와 같은 직분자가 궁극적으로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만인 제사장설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개혁자 어느 누구도 직분의 필요성을 평가절하 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직분을 더욱 고귀하게 만든 장본인들이다. 그들이 반대한 것은 성직자와 평신도를 나누는 성직주의였다. 그들은 성직자들이 그리스도와 평신도사이의 중보자가 된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모두가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으로 직접 기도할 수 있고 성경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직분자나 평신도의 구분 자체를 폐지한 것은 아니었다. 개혁가들은 만인 제사장설에 충실하면서도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를 제일 중요한 직분으로 생각하였다. 이것을 두고 개혁가들이 만인 제사장 설에 충실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엉뚱한 개념을 가지고 개혁가들을 비판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오직"이라는 단어를 너무 개혁주의자들이 의도한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사용하는 모습을 많이 본다. 이제는 그 원래의 의미를 살려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