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 기고글-
한국초대교회 역사에 일어난 두 종류의 부흥운동
황 대 우(창원은관교회 부목사)
세계에 산재해 있는 각국의 교회들 가운데 한국교회만큼 교파를 가릴 것 없이 마치 유니폼을 입은 듯 단일한 모습으로 부흥에 집착하는 교회가 있을까?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하기를 열망하는 것은 교회의 본능이므로 당연지사이다. 그러나 그 부흥이 과연 우리 모두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동의하는 양적 성장을 의미하는가? 부흥을 양적 성장과 동일시하지 않는 사람들은 흔히 부흥을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으로 구분하고 균형적인 성장이 부흥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혹자는 만일 둘 중 더 시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양적 성장인데, 이유는 양적 성장이 선행되어야 질적 성장도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회 성장에 과연 이러한 구분이 정당한가? 몸이 비대해진 것을 과연 성장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몸은 컸으나 정신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비정상인으로 분류하지만,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으나 체구가 남보다 작다고 비정상으로 분류하지는 않지 않는가?
교회 부흥의 진정성은 양적이냐 질적이냐, 혹은 양적인 동시에 질적이냐에 달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에 베푸시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선물을 언제 어떻게 베푸실지 모른다. 다만 기대하고 기다릴 뿐이다. 따라서 부흥의 진정성은 부흥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이러한 논리는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단순화하는 이원론적 결론을 정당화하거나 주지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한국교회가 쉽게 잊어버리고 간과하는 교회부흥의 주체와 우선순위 문제를 되짚어보자는 것이다. “부흥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정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너무나도 평범한 성경 진리이다. 하지만 이 부흥의 원리가 실제로는 거의 적용되지 않는 대의명분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언제부터 한국교회가 부흥을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수고와 노력의 산물로 여기고, 질적 성장과 양적 성장으로 구분하여 마치 양적 성장만이 부흥인 것처럼 여기는 불행한 길을 걷게 되었는가?
한국교회 역사에도 사도행전의 오순절로 평가되는 대부흥 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1907년에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의 이 대부흥 사건 중심에는 길선주 목사(당시 장로)가 있었다. 사경회를 위한 기도모임과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사경회에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모두 선포되는 말씀 앞에 거꾸러졌다. 이것에 대해 마포삼열(Samuel A. Moffett)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해마다 우리는 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만을 높이 들었고, 그 나머지는 성령께서 하셨다.” 1907년의 대부흥은 말씀이 살아 역사한 성령의 사건이었다. 사경회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던 묵은 신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민비가 시해되고 조선의 마지막 황제가 일본의 강요로 하야하는 불행을 겪으면서 기울어져가는 국운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상황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그 때 성령 하나님께서는 사경회를 통해 그들에게 말씀으로 도전하셨다. 말씀은 살아서 그들의 골수와 폐부를 찔러 쪼개었다. 그들은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죄를 애통함으로 고백했다. 자신의 영적 게으름과 위선을 통회하고 자복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 앞에 닥친 국가적 불행이 자신의 미지근한 신앙 때문이라고 느꼈는지도 모른다. 말씀 앞에 거꾸러져 울부짖으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이 회개의 역사는 삽시간에 전국적인 교회회개운동이 되었다.
마르다 헌트리(Martha Huntley)의 평가처럼 1907년 “대부흥 운동은 비기독교인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는 운동이 아니었고,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영적 갱신운동”이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일어난 이 뜨거운 영적 갱신운동은 이제 더 이상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교회 내의 각성과 갱신은 교회 밖에 있던 많은 불신자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였다. 갱신운동은 어느새 교회 밖의 사람을 위한 부흥운동으로 변해 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아무도 계획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상조차 하지 못한 전혀 뜻밖의 사건이었다. 마치 무엇에 홀린 듯 온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거듭나는 일에 혼연일체가 되었을 때 홀연히 시작된 엄청난 부흥의 역사가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아무도 이러한 일을 하나의 운동으로 기획하지 않았고, 회개의 함성이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칠 때에도 그것을 교회 부흥운동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 교회가 마치 미리 짜놓은 각본이 있기라도 한 듯 일사분란하게 이 갱신운동에 동참했다. 그들을 움직이는 엄청난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 보이지 않는 손의 역사였다.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16세기 종교개혁시대에 유럽에서 일어난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1907년 한국 땅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영적 갱신운동의 결과로 한국교회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2년 정도 지나자 내적 갱신에 대한 뜨거움도 점점 식어갔다.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미국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 세 사람이 1909년 초에 부흥의 열기를 이어가기 위해 5만 명을 회개시키자는 제목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1909년 10월 8-9일에 개최된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공회인 한국복음선교총회(General Council of the Evangelical Missions)는 “올 해에 백만 영혼을 그리스도께로(1,000,000 souls for Christ this year)”라는 슬로건을 채택하고 1910년 10월 9일까지 1년 동안 구령운동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결의했다. 당시 한국교회의 교인 수가 모두 20만 명 정도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 구령운동의 목표는 거의 달성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난 2년 동안 성령께서 보여주신 형언할 수 없는 교회부흥의 역사를 경험했다. 아무도 계획하거나 예상하지 못했지만 결과는 너무나도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 아마도 그들은 치밀하게 계획하고 전국 교회가 동참한다면 그 결과는 몇 배로 폭발적일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성령의 기적이 다시 한번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한국교회사 속에서 1910년은 백만명인구령운동의 해가 되었다.
1910년에 한국교회는 백만 명을 교회로 불러들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재정이 어려운 사람은 시간을 바쳤다. 이것이 교회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소위 “날연보”이다. 더불어 엄청난 물량의 문서배분운동이 있었다. 가가호호 방문 전도와 노방전도에도 열심을 내었다. 또한 수많은 부흥강사들이 국내로 초청되었고 그들은 발바닥에 물집이 날정도로 전국을 돌며 순회부흥회를 개최했다. 백만명구령운동은 일부 지역이나 일부 교파만의 일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가 동참한 대대적인 민족복음화운동이었다. 한 곳에서 부흥회가 개최되면 그 주변의 교회들이 함께 동참하도록 종용되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주도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교사들에게 있었다. 그들은 거의 모두 마치 목숨이라도 건 것처럼 이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결과는 목표와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다. 하지만 이 운동에 대한 선교사들의 평가는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긍정적인 면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교회사가들도 대부분 선교사들의 이러한 평가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액면대로 평가하자면 이 운동은 실패작이다. 아니 실패작 정도가 아니라, 순수한 성령의 역사를 불순한 인간의 역사로 변질시키는 교회왜곡, 부흥왜곡의 원조이다.
1910년의 백만명구령운동은 분명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한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 운동은 한국교회에 심각한 부정적인 유산을 물려주었다. 1907년 대부흥 사건은 갑자기, 그리고 영적 순리에 따라 일어난 것인 반면에 1910년 백만명구령운동은 미리 계획된, 그리고 목표지향적인 운동이었다. 1907년에 시작된 대부흥은 교회 내의 영적 각성에 따른 결과였다. 그 때 부흥은 결코 교회의 목표가 아니었으며, 단지 교회 내에 있는 교인들의 영적 각성과 갱신이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그러나 1909년 중반부터 부흥은 점차 결과에서 목표로 둔갑하기 시작했다. 갱신에 뒤따르는 부흥이 아니라, 부흥을 위한 갱신이 요구되었다. 숫자의 증가가 성장의 결과가 아닌 목표가 되었다. 교회의 모든 것은 점차 부흥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갔다. 한마디로 1907년 대부흥의 신적 역사는 1910년 백만명구령운동을 거치면서 인간적이고 인위적인 역사로 변질되고 왜곡되었다. 이러한 변질과 왜곡은 1907년의 사건과 1910년의 운동을 동일한 사건 내지는 연속적인 사건으로 묶어서 평가하는 역사가들에 의해 비호되고 조장되었다. 1910년 이후부터 한국교회는 부흥회가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를 나타난 결과로 평가하는 습관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1910년 이후 한국교회는 부흥에 대한 새로운 전통이 생겨났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결과를 목표로 설정하고, 인위적인 고취심을 성령의 감동하심과 혼동하고, 자발적인 참여를 조직적인 선동으로 대체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헌신적인 교회일치운동을 지분 나누듯 갈라먹기 식 연합운동으로 변질시키고, 나타난 현상과 양적 결과에 따라 성령의 은혜와 역사의 크기를 저울질하는 이상한 부흥 개념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부흥 개념의 일차 요구 조건은 거저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뛰어난 인간의 능력이다. 마치 얼마나 큰 은혜가 나타나느냐 하는 것조차 하나님의 자유로운 손에 달린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뛰어난 인간의 효과적인 능력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보다는 능력을 받은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그런 사람을 찾게 된 것이 아닐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 자신의 지상교회를 통치하신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는 어느 시대를 불문하고 언제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교회는 머리되신 그리스도에게로 모인 자들의 모임이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자리는 어떤 위대한 능력을 지닌 사람도, 어떤 충성스러운 교회나 교단도, 어떤 헌신적인 기독교 단체도 대신할 수 없다. 그분은 우리 개인의 주인뿐만 아니라, 온 교회의 주인이시며 온 우주의 주인이시기를 원하신다. 그리스도께서 그 자리에서 밀려나게 될 때 어떤 개인이든, 교회든, 교단이든, 기독교 연합단체든 타락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반대로 찬탈한 그리스도의 자리를 그리스도께 다시 돌려드릴 때 바로 그곳에서 회개와 각성과 갱신이 일어난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시는 선물이다. 선물이란 수고에 대한 상급이나 댓가가 아니다. 또한 선물이란 주어질 수도 있고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오직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은혜의 선물인 부흥을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유사품을 만드는 일은 가능하지만 결코 진품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선물인 부흥은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실 때에만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을 경험하는 자는 들내거나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께 엎드려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돌려드릴 것이다. 모든 것이 오직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은혜라고! 그리고 그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갱신의 열정이 더욱 뜨거워지도록 간절히 기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