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가? (How God sees us)

 

 

  인간의 삶의 실타래를 내면으로 부터 풀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지금 모든 심리학의 경계들에 접근한다. 심리학은 얽혀져 있는 전체로부터 극소수의 실들을 풀어낼 수 있다. 그것은 완전한 감금상태(captive)를 유지하려는 속박과 매듭에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으나, 그것은 결코 가장 깊고 가장 기초적인 근거를 드러내거나 벗겨 놓을 수는 없다. 인간은 그 자신의 자기판단(self-judgment)과 의견안에서, 결코 충분한 객관적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자기 자신의 판단으로, 인간은 결코 올바른 문장을 발음할 수 없다. 심지어 자신을 넘어선, 가장 혹독한 판단을 말하는 순간에까지도, 자신 속 깊이, 인간은 그가 자신에 관한 그런 훌륭하고 진실한 판결을 내렸다는 자부심으로 웃는다.

 

  하나의 정당한 의견을 만들기 위해, 인간은 그 자신의 모든 사변과 사색에서 벗어나야 하며 기꺼이 하나님께 귀 기울이려고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고 계실까? 우리 삶에 관한 하나님의 판결은 무엇인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신앙하는 것만이 삶에 있어서 우리 행위의 동기들에 빛을 비출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가를 말씀해 주셨다.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의 상태를 보시는 자신의 정교한 통찰을 보여주셨으며,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것은, 그분의 판결과 의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도약이다. 즉, 나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인, 내 자신에 관한 판결을 포기해야 하며, 내 삶의 깊이 갈라진 틈들과 숨겨놓은 곳들을 아시는, 그분의 판단에 복종해야만 한다.

 

  우리가 신앙의 어려움들에 관해 말할 때, 나는 거기에 가장 큰 어려움이 놓여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는 내 스스로, 우리가 우리의 비밀스러운 자기평가(self-evaluation)로 부터 전향해버리는 지점에 도달할 것인지의 여부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판결하신 그 판단 앞에 모든 억압을 포기할 것인지의 여부를 묻는다. 신앙은 실로, 내가 더 이상 자기사색(self-contemplation)과 사변에 빠져있지 않은 것이라는 용기 있는 결정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인간, 즉 나 자신의 수수께끼를 더 이상 풀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에 관한 하나님의 의견이 완전히 굴복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그 판단 외에, 나에 관한 어떤 다른 판단도 받아들이기를 거절한다. 나는 어떠한 조건(숨김) 없이 하나님 편에 서기를 원한다. 나는 그분께서 무엇을 말씀해 주실 것인가와 그리고 나에 관하여 결정할 것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한다.

 

  우리가 그런 성실한 의도로 성경을 펼칠 때, 우리는 매우 주목 할만한 발견들을 하게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발견은, 성경속의 선한 사람들이 종종, 매우 악한 행위들을 행한다는 것이며, 또한 성경속의 악한 사람들이 종종, 매우 놀랍고도 고귀한 행위들을 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힘센 남자이며,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고 고상한 성격의 소유자 이지만, 그도 역시 가끔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러한 무서운 행동을 하곤 한다. 그의 내적인 삶의 다른 측면을 보게 되는 것이다. 아합은 악한 왕이며, 비겁자이고 우상숭배자이지만, 그 역시 그가 약간의 훌륭한 것들을 말할 수 있는 때도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드러냄으로써, 인간성이 두 종류, 즉 좋고 나쁜 것, 고귀하고 사악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를 그 첫 번째 그룹으로 계산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단순한 한 인간의 존재일 뿐이며, 그것이 전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책에서 인간존재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시지 않는다. 오직 한 종류가 있을 뿐이다. 그 대립(contraposition)은 우리가 상상해 왔던 것과는 아주 다르다. 다만 하나의 대립이 있을 뿐이다. 즉 그가 그 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인간 존재와,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인간 존재이다. 이것을 실제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는, 인간에 관한 성경적인 가르침은, 결국 아래와 같이 된다. 즉 인간 속에 약간의 선함이 있다는 면에서,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인간을 내버려두시지 않았다는 사실과,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두 번째 발견은, 성경은 인간이 참으로 신비스럽고 복잡한 존재라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마음이 교활하고 간교하다고 말하면서, 누가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 라고 선언한다. 인간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음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꿰뚫거나 관통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다.

 

  이 모든 것들에 관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굴복해야 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시편 139:23)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이를 능히 알리요마는” (렘 17:19)

 

  우리는, 그러나 우리가 인간 속에 선함이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후회할 수 있는 도피처를 기술하는 것으로, 이 말들을 파악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의 불가지성(unknowableness)과 그의 마음의 불측량성(unfathomableness)은, 그의 마음속 깊은 그 곳에서, 여전히 그의 삶에 새로움(newness)을 제공할 수 있는, 고상하고 신적인 힘이, 잠자고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러한 마음을 다루실 때, 그리고 우리에게 그런 마을에서 생겨나는 것들을 보여주실 때, 그분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증거와 훼방이니”(마 15:19).

  예수께서는, 우리가 확실히 집착(고집)할 수 있는, 하나의 단순한, 선하고 건전한 덕에 관심을 두지 않으신다.

한번은 바울이 그 자신에 관하여 말한 적이 있다. 그는 그 자신의 생각을 공식화하려하지 않고, 그는 다만 자신에 관한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말한다. 그 판단은 이렇다. “왜냐하면 내가 내 속에는 (즉, 나의 육신에는) 도무지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 (롬7:18)[개역 한글성경 번역 :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즉 ”내 육체에는“ 이란 그 말은 바울이 어떠한 조건들(reservations)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키며, 그것은 마치 저 육체의 바깥쪽에 여전히 어떤 선한 것이 발견되어 질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러한 조건들을 말한다. 왜냐하면 육체(flash)란 단어는 단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 그 자신 속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지적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아주 힘든 진술이며 그것의 의미를 헤아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의지(forces)와 성향(inclinations)의 저 거대한 컴플렉스(complax)에 관하여 하나의 판단이 여기서 극히 짧은 말들 속에 전달되어지며, 그것은 최종적이고 결론적이다.

  인간은 하나의 반위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는 근심이 없고 피상적이지만 그는 또한 공포로 가득차 있다. 그는 자기 중심적이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그는 항상 다시 공동체의 지체 속으로 조종된다. 그는 지적이고 매우 신중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지만 동시에 무질서하고 마귀적이다. 그는 위대한 도덕적 행위가 가능하고 신실함과 자기희생,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것 까지도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잔인하고 발광적이며 미치광이다.

 

  지금 성경은 저 복합적인 인간을 그의 모든 실성함(demencions) 속에서 그의 모든 반위로써 파악하며 어떤 선한 것이 그 속에 없는 어떤 것으로서 그를 거부한다. 이것은 진실한 측도, 즉 하나님 거룩한 의지의 표준과 기준에 따라 모든 인간의 덕 (virtue)이 완전히 없어져버린(완전히 파괴되어 버린)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전히 인간 속에 선한 것이 있다는 면에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인간 자신의 계획(design)에 내버려 두시지 않으신다는 그 사실에 기인하지만, 인간에 관한 그 분의 관심을 보여 주신다.

 

  인간이 그렇게 송구스러운 상태에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슬프다. 모든 이상주의(idealism)는 일격에 완전히 파괴되어 버리고, 인간은 매우 극단적인 염세주의(pessimism)에 빠져버리게 된다. 만일 이것이 인간의 상태라면 우리가 인간과 인간의 역사에 관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만일 저것이 우리에 관해 이야기 되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이라면 우리는 삶을 지탱해나갈 용기를 어디서 얻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모든 희망의 한계에 당면하게 된다. 여기서 보다 나은 미래에 관한 모든 전망과 모든 가능한 해결책이 뿌리채 잘려나가 버린다.

 

  성경은 우리를 이런 무서운 판결의 어둠에 방치해 두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에 관한 많은 다른 것들과 아주 다른 성격의 것들을 말하고 있다.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존재의 완전한 어둠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보호의 대상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에 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온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종종 인간을 부르시며 그에게 말씀하신다. 인간의 삶은 다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되어 질 수 있다. 여전히 그런 강하고 도덕적인 힘이 인간 속에 활동 하고 있다는 사실과 인간 속에 옳고 그르며 선하고 악한 것에 관한 지각능력이 있다는 사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인간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중앙에 계셔서 하나님께서는 그 분 안에 계서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가 그분에게 순종하도록 탄원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희망 없는(hopelessness)비참한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의 사랑하시는 은혜의 동반자들(partakers, partrait)이 될 수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인간에 관해 제공하는 형상과 초상은 여전히 위로부터의 몇몇의 밝은 빛을 보여준다.

 

  우리가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켜 생각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수수께끼를 풀 수 없다. 단지 우리가 인간의 형상을 하나님의 빛 안에서 볼 때만이 그것은 뚜렷해지고 분명해진다. 무슨 희망이 사라져 버린 곳, 모든 기대가 끝나버린 곳, 우리의 생각의 영역 바깥쪽인 그곳에서 새로운 희망과 새로운 창설(foumdation)이 시작되며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죽음을 기뻐하시지 않으시며 오히려 우리가 그분에게로 돌아가서 살아야 할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확신이 시작된다(겔 1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