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기대에 부푼 백일몽들 (Hopeful daydreams )

 

 

  당혹한 입장의 한가운데서도 인간은 여전히 자신속에 하나의 포기 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즉 그것은 희망이다. 실의와 큰 실망의 때가 있지만 언제나 그 기분은 변하여, 평안함과 확신이 되살아나며, 다시 인간은 희망적인 기대들을 가지고 스스로를 추켜올린다.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우리는 인간이 역사의 과정속에서 온갖 종류의 생각(cosideration)끝에 이런 희망을 세웠다는 것을 관찰한다. 항상, 인간은 스스로를 안심시키려고 애써왔으며, 조용히 계속해서 미래를 향해 세워갈 수 있는 기초를 발견하려고 애써왔다.

 

  결국, 이성이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가변적이고 일시적인 대립에 대하여 승리를 얻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있어 왔고, 아직도 여전히 있다. 욕망뿐인 사나운 동물도-고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결국에는, 현명하고 분별력이 있는 통찰력에 의해 길들여 질 것이다. 우리는 서로 더불어 평화롭게 산다는 것이, 그리고 이 세상에서 서로에게 방과 공간을 허락하는 것이 편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우리가 결국 이것을 배우며 실천하지 않는가? 우리의 가증스럽고 비도덕적인 이기주의의 짐승같은 힘은, 이성적인 숙고에 의한 한계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맑은 사고와 조용한 반성이 한번 우리를 꿰뚫고 지나가면, 결국 우리로 하여금 삶을 새롭게 세우며 질서정연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하나의 균형을 발견할 것이다. 그와 같은 것이, 인간이 자신의 낙관(optimism)을 기초로 하는 첫 번째 근거이다. 그리고 그 다음 근거는 첫째 근거에 못지않게 견고하고 확실한 것이다.

 

  인간은 논증되어져 온 것처럼, 항상 사회적이면서 이기주의적인 존재였으며, 지금도 그렇다. 이기주의는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가며, 모든 것 중에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자신에게로 돌린다. 그리고 인간의 내적 불모지(inner barrenness)는 항상 자신을 다시 공동체의 힘(the arms of community) 안으로 몰아넣는다.

 

  삶이 이 두 가지 힘으로 이루어 진다면, 도대체 왜 화해에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하게 되지 않을까? 만일 필요하다면, 인간은 그의 자아(ego)를 공동체의 관계에서 부인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이것을 배워왔고, 그리고 그의 자아가 부차적이어야 하며 공동체가 일차적으로 중요시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인간은 서서히 새로운 상황에 익숙하게 될 수 있고, 그리고 모든 그의 문제들은 풀려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한 국가의 단위로 이런 실험을 하게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방법은 이와 같은 원리들을 일반적으로 모든 인류와 모든 국가들의 공통적인 관심에 적용시키기 위하여 발견되어야 한다.

 

  그와 같이 인간은 신뢰와 확신에 관하여 자신의 실들을 엮어가면서, 모든 절망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즐거운 방종(abandon)속에서 세계평화와 세계 친선의 아름답고도 공상적인 공중누각(air castle)에 자신을 내어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을 그는, 자신과 자신의 동료와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삶을 생각할 때  조차도 그는 자신의 모습을 자신 속에 세워두고자 한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이 변덕스러운 대립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과 자신의 두뇌가 악한 생각들을 많이 한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여전히 자신의 경우가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처럼 희망 없는 것이 아니라는 이상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내적 자아 속에서, 인간은  확신하는 바를 나타내며,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그 선(the good)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겉만 아름다운 환상으로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절벽(yawning precipice)을 감추고 있다.

 

  인간은 참으로 절망과 비천의 구석으로 몰리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많은 굴곡과 사선으로 스스로를 왜곡해 왔다. 나는 고대 동양인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깊이 묵상할 때, 인간이 많은 악한 힘들로 옷 입혀져 있으나, 자신 속에 깊이 잠자는 조용한 증거(witness) 즉, 열정과 비참함의 잡다한 활동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속하거나, 그것 안에 있지 않은 증거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인간에게는 그 게임으로 부터 자신을 지키는, 그리고 기류에 따라 끌려가기를 거부하는 한 방관자(an looker)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방해하는 모든 오물에 의해 때묻지도 더렵혀지지도 않은 인간 내부의 방관자이다.

인간이 방탕하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인간이 사악함의 혼동상태(hodge podge of wickedness)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인간 속에 그것에 속하지 않은 어떤 것이 있다는 조용한 보호구역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삶의 거대한 대양속에서 매우 작은 섬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전쟁과 다툼에 지쳐버린 우리는 그곳에서 안식을 발견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후퇴할 수 있다.

 

  때때로 생각컨대, 인간은 자신의 육체적 실체(corporeality)가, 드러난 모든 비참함(궁핍)을 책임져야 한다고 상상한다. 인간은 하나의 육신이며 그리고 그 육체적 조건과 체질이, 인간에게 배고픔과 목마름을 주고, 탐닉적인 식욕(sensual appetite)과 매일 그를 난처하게 하며 괴롭히는 욕정을 불러일으킨다. 그 육체적 실체는 인간이 나약한 원천이다. 인간은 그의 사상을 보다 높고 귀한 것에 올려놓으려고 시도할 수 있으나, 그의 육욕의 무거운 무게가 계속해서 다시 끌어내려버린다. 그리고 그 문제를 이와 같이 볼 때, 그 비참함은 정당화된 것처럼 보인다. 즉 계속해서 인간이 그의 길을 잃어버리고, 내적으로 그를 괴롭히는 욕망과 분쟁의 미로에서 헤매고 다니는 것은, 실제로 인간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역시 죄를 범하게 할 수 없지 않는가!

 

  생각컨데, 어떤 인간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들이 그의 결핍의 원인이라는 구실을 열심히 갖다 댄다. 그 중심이 부패된 한 문명 속에서 어떻게 한 사람이 선할 수 있는가? 우리가 젋을 때에 우리는 해롭고 쓴 독을 마셨다. 우리가 이제 늙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독을 마시우게 한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만일 우리가 과격한 쿠데타(radical coup)로써 한 문명을 뒤집어 돌릴 기회를 가졌다면, 그렇다면 미래의 세대들은, 저절로, 더 좋아지고 깨끗하게 될 것이다.

 

  예! 우리는 모두, 우리가 하나님의 법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과, 우리가 전에와 같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고통스럽게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깨달음을 피할 방법은 많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주 혹독하게 다루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감추도록 우리를 돕는 편안하게 하는 방법이나 수단은 많이 있다.
For are we not human?

 

  죄의식이 너무 크게 우리를 압박해 올 때 우리는 스스로를 쉽게 기쁨의 종교적 흥분(religious flushes)에 마음을 놓으며, 결국 정기적으로(periodically) 우리의 삶에 정통하게 된다. 그 때 우리는 의무에 대해 경건하고 헌신적인 외투로서 우리 스스로를 꾸민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많은 선한 행실들을 수행해 왔고, 많은 선한 생각들을 해왔다는 생각으로, 우리 스스로를 추켜세운다. 그래, 우리는 실제로 많은 시간동안 하나님을 생각해 왔고 심지어 그분을 열망해왔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를 가엽게 느끼고, 우리 스스로를 제물로 간주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보다 더 가깝게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이런 혼란하고 무질서한 세상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다.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매우 진지하게 얼마나 많이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는가를 심사숙고하고 묵상한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공포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숨기기 위하여, 경건의 참호 속으로 피해버린다.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가 불행한 피조물들이며 모든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실수를 만들어내며, 그리고 우리의 최선의 노력이 비탄에 도달한다고 이해해 주실 것이다. 만일 진리가 일찍이 알려지게 되었더라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모든 그러한 이기주의를 통하여, 그리고 모든 그러한 정신나간 미혹들을 통하여, 보다 나은 피조물들이 되기 위한 우리의 욕망과 우리의 경건의 황금빛 실을 꿰메어가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어질 것이다.

우리는 인간, 그 불가해성(Man, the Enigma)을 다루고 있다. 인간 마음의 중심부에는, 두려움과 무근심(lightheartedness), 그리고 이기주의와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를 바라는 욕망 사이의 불일치와 불화가 있다. 인간의 삶은 이성적인 생각들의 극점과 삶을 마음껏 살려는 혼돈된 욕망 사이에서 흔들거린다.

 

  인간은 모든 면에서 변덕스러운 대립의 존재이다. 인간은 얽히고 뒤섞여 있다. 모든 절망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희망을 유지해 왔으나, 모든 그의 노력은 정욕 앞에 부서지고 만다. 인간은 여전히 비참한 죄인으로 남아있으나, 그는 아직도 그의 최종적인 승리를 믿고 있다. 인간은 그의 내적인 혼동의 간격(the chasm of his inner confusion)을 깨닫고는 있으나, 아직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있다. 도대체 인간은 어떻게 저 내적 불일치를 벗어날 것인가? 도대체 인간은 어떻게, 스스로를 보는, 그리고 그의 삶을 보는 바른 관을 얻을 것인가? 누가 인간에게 그가 실제로 누구이며, 누구이어야만 하는가를 말해줄 것인가? 그러면, 그는 어떻게 저렇게 될 수 있는가?

 

  그리이스의 조각품은 우리에게, 뱀에 얽힌 이야기 ,라오콘(Laocoon ;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것으로, 트로이 전쟁에서 목마를 트로이 성내에 들여서는 안된다고 경고하여 아덴(Athena)의 노여움을 사서 두 아들과 함께 거대한 바다뱀에게 목졸려 죽은 아폴로(Apollo 신전의 사제; 역자주)를 전해주었다. 그래서 인간은 아슬아슬한, 모든 기쁨을 앗아가는, 그리고 그 자신의 존재를 질식시키는 수수께끼들에 뒤엉킨 채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