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칼빈·웨슬리 신학자들 만나다 | ||||
총신 신대원·총회신학원 종교개혁기념 신학 세미나 신학 입장 날카로운 대변 앞서 종교개혁 대의엔 한목소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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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와 칼빈과 웨슬리가 만난다면 그들 사이에서는 무슨 말이 오갈까? 그리고, 루터주의자와 칼빈주의자와 웨슬리주의자가 만나면 그들은 또 무슨 말들을 주고받을까? 루터와 칼빈과 웨슬리가 만난 자리에서보다 이들 각자의 추종자들이 만난 자리에서 아마도 더 격한 논쟁이 오가지나 않을까? 어떤 사상을 세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서 ‘주의’가 생겨남을 역사는 흔하게 보여준다. 루터주의자와 칼빈주의자와 웨슬리주의자가 만났다. 종교개혁기념일을 앞둔 10월 27일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과 총회신학원 원우회·총학회가 ‘루터·칼빈·웨슬리의 이신칭의와 경건’을 주제로 연 종교개혁기념세미나에서 루터대학교 김선회 교수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김재성 교수, 그리고 서울신학대학교 한영태 교수가 각자 자신들의 선각인 루터와 칼빈, 그리고 웨슬리의 신학과 사상을 소개하고 함께 토론했다. 종교개혁의 후예라는 공통의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신학으로는 서로 날카롭게 맞서기도 하는 세 ‘주의’ 사이에 오간 대화답게, 이날 토론은 상호 존중과 형제애의 분위기 가운데 같음과 다름을 모두 확인하는 자리가 됐다. 1517년 종교개혁의 첫 불을 댕긴 이에 대한 존경을 담아 이날 첫 주제 강의는 루터에게 돌아갔다. 김선회 교수는 ‘루터의 이신칭의과 경건’을 제목으로 루터의 두 가지 의-의인과 성화-와 그의 ‘자기 부정’의 경건을 소개했다. “루터를 진실하게 따르는 사람들은 지금도 그의 ‘법정적 의인론’을 고수하고 있다. 법정 형식이 ‘선포’ 또는 ‘전가’를 가장 잘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루터는 인간의 ‘자기 부정’에서 경건을 찾으려 한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와 ‘믿는 자들의 의’를 구별하였다. 하나는 밖에서 오는 객관적인 의이고, 다른 하나는 주관적 의이다. 루터는 엄격한 의미에서 의인과 성화를 구별한다. 그러나 성화를 주관적 의라 말한 것은 의인과 성화가 별개의 것이 아님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객관적 의의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 주관적 의이기 때문이다. 객관적 의는 외래적인 것이며 인간의 품성이나 행위와 전혀 관계없는 것이다. 밖에서 오는 의는 ‘하나님의 의’(롬1:17)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이다. 루터가 어거스틴에게서 얻은 중요한 교훈은, 은혜는 인간 안에 있는 습득한 품성이 아니라 인간의 의를 시작하고 완성하는 하나님의 호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은혜를, 루터는 부정적인 방법으로 깨달았다. 왜 은혜가 선물이라야 하는가? 원죄로 인한 전적인 타락, 인간의 자기 구원의 전적인 불가능성 등으로 인간을 이해함으로 절대적으로 의가 밖에서 와야 함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외래적인 의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이 수동적인 의를 얻는 길은 자신이 죽으므로 ‘단념하는 일’ 또는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이다. 인간은 신적 ‘현재’에 몰입하기 위하여 자신의 내면을 비워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경건은 여기서 시작된다. 자신을 비우고 경건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채우고 그를 신랑으로 모셔 들이는 데서 오는 경건을 말한다.” ‘칼빈의 경건, 그리고 칭의와 성화’를 제목으로 두 번째 주제 강의를 맡은 김재성 교수는 칼빈의 ‘이중적 은혜’과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서의 그의 경건을 강조했다. “루터는 값없이 주시는 칭의를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기독교 신자가 순종의 생활을 열심히 해야만 한다는 동기 제시를 분명히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이중적 은혜’라는 용어로서 믿음에 의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얻게 된 축복을 설명하였다. 첫째, 은혜는 하나님과의 화해를 그리스도의 순결함을 통하여 이룩한다는 것이다. 둘째, 은혜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여 흠 없고 점도 없는 생활의 거룩함을 이루어간다. 인간 차원에서 행하도록 노력해야만 하는 ‘성화’ ‘선행’ ‘회개’ ‘인간의 노력’ 등이요, 다른 하나의 은혜는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의로움이라고 설명하였다. 따라서 칼빈의 신학에서는 값싼 은총이란 있을 수 없다. 철저히 피 흘리기까지 인간은 은총을 받은 자로서 살아가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은 두 가지 은혜를 매우 조심스럽게 구별하였다.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적 행위로서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으로 인하여서 믿는 자들을 받아들이시고 용서하시는 은혜이다. 중생(또는 회개 또는 성화)는 성령에 의해서 진행되는 일상의 기독교 신자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거룩하게 하심과 순종 가운데서 새롭게 되어진다. 그리고 그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고 있다. 칼빈은 회개를 중생으로 해석하였다. 칼빈은 경건이란 ‘하나님의 은혜들을 아는 지식이 포함된 그분의 사랑과 결합된 존경심’이라고 정의하였다. 경건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두려움을 포함하는데, 율법에 언급된 합당한 예배를 수행하는 가운데 기꺼이 존경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두려움’이라는 것은 공포심에 사로잡힌 자들의 도피심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아 닮아가려는 열망이다.” 한영태 교수는 루터와 칼빈을 따르는 “종교개혁의 참된 아들”로서 이들의 신학을 계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비판하며 자신의 독창적인 신학을 세운 웨슬리를, 그의 만인구속설과 ‘복음적 신인협동설’에 초점을 두어 설명했다. “웨슬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절대적인 법에 의하여 구원의 범위가 선택된 소수에게만 제한된다는 데 반대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속죄의 범죄를 제한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은 세상의 모든 죄인이 예외 없이 해당된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만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으며, 죽으셨으며, 멸망할 수밖에 없는 모든 이를 위해 대속하셨다’고 주장한다. 웨슬리에게 나타나는 구속의 우주적 의미는 만인구속설이지 만인구원설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만인구속설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업 때문에 자동적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지만, 누구든지 믿는 자만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업이 모든 사람의 내적, 외적인 죄를 대속하셨다면, 왜 모든 인간이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 즉 하나님의 예정에 해답을 둔다. 그러나 웨슬리는 보편적 은혜 개념에 따라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에서 해답을 발견한다. 타락 이전에 완전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던 인간이 타락 후에는 이것을 읽어버렸다. 그러나 자연인은 이미 하나님의 선행 은총에 의해 약간의 자유의지와 얼마간의 판단력을 지니고 있다. 즉 선행은총의 기초 위에서 선택과 결단의 기회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은혜가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유로 하나님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위하여 신인협동설이 생긴다. 그러나 웨슬리의 신인협공동설은 펠라기우스주의나 세미펠라기우스주의와는 구별되는 복음적 신입협동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