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아닌 '하나님의 사람' 칼빈일 뿐 | ||||
세계칼빈학회 주제 논문 논평 ③ 박쿠스의 '칼빈, 거룩한 영웅인가 가장 나쁜 기독교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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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자 '베자' 작품에 드러난 스승 '제네바의 칼빈' 올바로 읽기 조명 칼빈의 삶 이분법적 변증 경계…신앙인 눈으로 전기 읽기에 지침 제공 다양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 칼빈의 초상들. 제네바 종교 개혁 센터의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이레나 박쿠스(Irena Backus) 교수는 초대 교회교부들의 신학이 종교개혁자들과 후기 종교개혁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깊이 있게 탐구해 왔으며, 최근에는 이를 근대 서구 시민사회 형성기의 사상과 연결시키는데도 큰 관심을 쏟고 있다. 박쿠스 교수의 최근 연구는 그녀의 신학적 화두가 칼빈의 제네바로부터 제네바의 칼빈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는 연역적 접근과 귀납적 접근을 동시에 추구함으로써 진리에 이르고자 하는 학자적 몸부림이라 여겨진다. "칼빈의 제네바"는 오늘날 그를 따르는 학자들과 성도들에게는 개혁신학의 토대를 놓은 칼빈 신학의 절대성을 표현하는 수사(metaphor)가 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제네바의 정치적 독재자 칼빈을 독설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반-칼빈주의자들(anti-Calvinists)의 희화(戱畵)적 모토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양 극단을 피하기 위해서 학자들은 역사적 정황 가운데 있는 "제네바의 칼빈"을 올바르게 읽어 내고자 하였다. 오늘날 "각색되지 않은 칼빈"(unaccommodated Calvin)이라는 기치를 걸고 '칼빈의 칼빈'을 읽고자 하는 칼빈 신학교의 리처드 멀러(Richard A. Muller) 교수의 스승 스타인메츠(David C. Steinmetz)의 책 <정황 속의 칼빈>(Calvin in Context)은 그 자체로 이러한 경향을 잘 대변해 주는 이름이다. 정황 속의 칼빈을 칼빈의 작품 속에서 읽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제네바"를 "제네바의 칼빈"으로 읽자는 것이다.칼빈의 전기는 아마 이러한 추구의 접점에 있는 장르일 것이다. 칼빈은 갑작스런 회심(suvita conversio)을 경험한 이후 "스스로에 대해서 기꺼이는 말하지 않겠다"(De me non loquor libenter)는 것을 일종의 원칙으로 삼고 살았다. 어거스틴과 루터와는 달리 칼빈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회심 이후 동시대의 다른 개혁자들과는 달리 인문주의에 관한 작품을 특별히 쓴 적이 없다. 당시에 가장 뛰어난 법학적 식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세 오경의 마지막 네 권에 관한 한 권의 큰 주석(Harmonia)과 거의 오늘날 책으로 말하면 5000 쪽에 육박할 신명기에 대한 설교는 했지만 법학에 관한 책을 쓰지 않았다. 이는 에라스무스와 멜랑흐톤과 같은 동시대인들의 학문적 경향과는 사뭇 달랐다. 그러므로 칼빈의 전기에 대한 후대인들의 의존은 더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삼 년 전에 제네바 종교 개혁 센터의 초청을 받고 칼빈의 신학을 연구한 적이 있었다. 당시 박쿠스 교수와 함께 칼빈의 원전들을 읽었었는데, 그녀는 칼빈의 신학에 미친 에라스무스의 영향과 칼빈의 대적자로서 후에 종교적 똘레랑스(religious tolerance)의 제창자가 되었던 세바스찬 카스텔리옹(Setastian Castellion)의 칼빈 비판에 몰두해 있었다. 특히 당시 "제네바의 칼빈"을 그의 수제자였던 베자의 신학적 작품들로부터 탐구하고 있었다. 이번 세계 칼빈 학회에서 발표된 그녀의 작품은 그 일부라고 여겨진다. 칼빈의 전기에 대한 박쿠스 교수의 본 논문((Calvin, Saint hero or the worst of all possible Christians?)은 그 성격에 있어서 오히려 진부한 감이 없지 않다. 이 논문은 관점은 대체로 칼빈의 "성격" 혹은 "인격"에 맞추어져 있는데, 이와 같은 논의는 '칼빈의 인간됨(L’humanité de Calvin)'이라는 일종의 전기를 써서 남편이자 아버지, 친구, 목사로서의 칼빈을 조명한 스타우퍼(Richard Stauffer) 이후에는 신학계에서 거의 사라졌다. 오늘날 칼빈의 전기를 다룬 작품들은 대체로 그의 인격 자체보다는 그의 신학의 형성과 발전에 집중하거나(T. H. L. Parker, Alenxandre Ganoczy 등), 그의 생애에 대한 가치판단을 보류하고 그 자신의 심리와 그 자신 생애의 수사학적인 의미에 더욱 관심을 쏟고 있으며(William J. Bouwsma, Olivier Millet 등), 칼빈의 동시대인들과 그가 살았던 시대적 정황에 몰두 하지만 단지 그 사실 자체만을 전하고자 한다(Bernard Cottret, Michael Mullett 등). 그렇다면 박쿠스 교수의 본 논고는 스타우퍼 이전의 진부한 "칼빈의 성격 논쟁"을 다시 제기하는가? 본 논고가 칼빈의 후예들인 베자와 콜라동(Nicolas Colladon)이 저술한 찬사로 가득 찬 전기와 칼빈의 대적으로서 예정론 논쟁으로 말미암아 제네바에서 추방되었던 볼섹(Jerome Bolsec)의 혹독하게 비판적인 전기를 통해서 칼빈의 어떠함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없지는 않다. 만약 이것이 주된 취지라면 저자로서 박쿠스 교수는 어느 위치에서 어느 관점에서 이 글을 개진해 갔을 것이다. 그러나 본고의 관심은 칼빈의 전기를 다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료로서 인용되어 왔던 베자와 콜라동의 전기가 과연 "성자 숭배적인 전기"(hagiography)였는가? 라는 점에 있다. 베자의 칼빈 전기는 '성자숭배' 아니었다 칼빈의 전기는 그를 이어 받아서 제네바 교회의 수석 목사가 되었으며 제네바 대학교의 교장으로서 섬겼던 베자에 의해서 그의 사후에 해를 넘기지 않고 '존 칼빈의 생애와 죽음에 대한 간략한 역사'라는 이름으로 불어로 집필되었다(1564). 베자는 이 글을 그의 스승의 미완의 마지막 글이었던 여호수아서 주석의 서문으로 썼다. 그리고 같은 해에 독립된 책으로도 출판했다. 이곳에서 베자는 칼빈을 평생을 이단에 대항해서 싸웠던 목사의 전형이자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완전한 도덕성의 소유자로서, 성적으로는 극도로 절제했으며 종교적으로는 큰 관용을 보인 신앙의 사표로서 그렸다. 이러한 칼빈의 모습은 일찍이 포씨디우스(Possidius)가 그렸던 어거스틴의 모습과 흡사했다. 베자의 전기는 다음해 콜라동에 의해서 증보되었다. 콜라동은 여호수아 주석의 불어판을 출판하면서 이로써 그 서문을 대신했다. 콜라동의 전기는 수차례 출판되었는데, 사실 당시 사람들은 그 저자가 실제로 베자라는 것을 몰랐다. 콜라동의 전기는 단지 증보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전기는 더욱 역사적이었으며 어떤 측면에서 신학적이었다. 콜라동은 칼빈의 생애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했다. 그리고 그는 칼빈의 생애 전체를 평가함에 있어서 그의 업적 자체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했다. 이로써 칼빈의 생애를 "변증적으로 묘사하고자"(apologetic colouring)했다. 이러한 저술 태도는 당시 봇물 같이 쏟아져 내려왔던 칼빈에 대한 비판에 맞서고자 하는 취지로부터 비롯된 바도 없지 않았다. 1575년 베자의 제2차 전기는 그가 칼빈의 편지를 편집하면서 증보해서 저술했다는 측면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칼빈의 편지들이 매우 신중하게 엄선되었기 때문에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베자의 전기 기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어떤 사실을 확정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새로운 전기에서 추구된 칼빈은 근본적으로 같은 칼빈이었다. 다만 마치 성자숭배를 연상하듯이 "의식적인 칼빈"(a Calvin cult)이 강화되었다. 칼빈의 신체에 대한 묘사가 등장했다. 그는 중키에 매우 창백한 얼굴을 가졌으며 그의 안색은 경직되어 있었으나 마지막 까지 영민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고 그려졌다. 여기에서 헤라클레스와 같은 칼빈의 이미지는 오히려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대비적으로 나타났다. 다만 베자는 하나님의 섭리에 붙들린 "거룩한 영웅"을 그리고자 했다. 마치 칼빈이 그러했듯이, 베자는 간결한 문체로 유용하게(in brevitate et facilitate) 성도들을 세우기 위해서(edificatio) 그의 스승의 전기를 썼던 것이다. 제네바에서 추방된 후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하여 프랑스에 정착한 볼섹은 칼빈의 전기(1577)와 베자의 전기 (1582)를 탈고함으로써 개혁주의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었다. 그는 베자에 의해서 그려진 기독교 영웅의 이미지를 지워 내고자 노력했다. 그는 칼빈이 조국인 프랑스에 미친 악영향과 주변 국가에 끼친 피해에 대해서 강조했다. 볼섹은 그의 비판이 사감(私感)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글은 진리에 기초하고 있으며 공식적인 문건들과 칼빈 자신의 글들이 이를 입증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칼빈의 이단성을 지적하기 위해서 고대의 이단들을 연대기적으로 고찰한다. 그리고 칼빈의 신학을 이러한 이단들의 아류로서 다룬다. 칼빈에 대한 볼섹의 인신공격은 입에 담기조차 어렵다. 칼빈의 아버지(Gérard Cauvin)는 교회의 재산을 유용하고 사취하는 신성모독을 행하였으며 어린 칼빈은 젊은 사제로서 동성연애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칼빈이 그의 이름을 칼비누스(Calvinus)로 바꾼 것은 유벤날(Juvenal)의 풍자시에 나오는 복수의 왕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성도착자로서 제네바의 부녀들은 교리를 배우려고 그의 집 앞에 기다린 것이 아니라고 썼다. 베자가 칼빈의 순결과 교리적 엄격함을 칭찬했다면 볼섹은 칼빈을 음란자로서 배도자로서 매도했다. 베자가 하나님의 위로 가운데서의 칼빈의 죽음을 그렸다면 볼섹은 성병으로 죽어가는 한 파렴치한을 묘사했다. 이러한 이중적인 칼빈의 묘사가 존재한다. 그러나 진실은 이중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박쿠스 교수는 어떤 입장에서 어떤 칼빈을 그려야 할 당위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역사가로서 진실이 무엇인지, 즉 무엇이 실제로 있었는지에 대한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볼섹이 겨냥했던 것은 베자가 그린 칼빈 자신이라기보다는 칼빈을 신성시하는 베자였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로써 하나님을 마스터한 칼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스터 하신 사람 칼빈"(Calvin the man who God mastered)을 진실 쪽에 세우고자 한다.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의 생애가 필연적으로 신성시되는 것은 아니다. 베자와 콜라동은 신성시된 성자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대로 살았던 한 사람의 삶을 그리고자 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본질을 공유하지는 못하지만 그의 형상을 받았다. 그의 형상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행한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 사람에게 양향성이 있듯이, 볼섹이 그렸듯이, 또 다른 칼빈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분법적 변증에 머물지 않으신다. 다만 베자가 제2차 전기에서 강조했듯이, 연약한 칼빈과 능하신 하나님께서 계신 것이다. 본 논고는 "하나님의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 읽기"의 한 표현 양식으로서의 신앙인의 전기 읽기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신앙인의 삶은 신앙인의 관점에서만 신앙적으로 읽혀진다. 논평 = 문병호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