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성만찬 신학 핵심은 '드러냄' | ||||
세계칼빈신학회 주제 논문 논평 ④ 빈 얀서의 '칼빈의 성만찬 신학의 새해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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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칼빈에 대한 연구들이 국제적인 차원에서 축적되고 심화되면서, 칼빈의 모습에 대한 새롭고 발전적인 상이 제시되고 있다. 네덜란드의 자유대학과 레이든대학에서 칼빈 교수좌를 가지고 있는 빈 얀서(Wim Janse) 박사가 세계칼빈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은 그 절정을 보여주었다. 그의 논문은 이번에 발표된 주제 강연 가운데서 가장 큰 호응과 반향을 받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얀서 박사는 지난 11월 16일에 자신의 수정된 논문의 최종본을 필자에게 개인적으로 보내옴으로 현재의 글에 큰 도움을 주었기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에 근거해서 빈 얀서 박사는 칼빈의 성만찬 신학을 새롭게 제시한다. 한명의 신학자로서 칼빈의 성찬의 신학은 1536년부터 1564년까지 지속적으로 "역사적 발전"(historical development)을 했다. 칼빈의 성만찬 신학의 발전을 크게 세 시대로 구분하는데, 이것은 독특한 공헌점이다. 첫째는 쯔빙글리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시대(1536-7)이고, 둘째는 루터적 성격을 보여주는 시대(1537-48)이며, 셋째는 다시 영성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시대(1549-1550s)이다. 그 의미는 이것이다. 칼빈은 종교개혁의 본질에 있어서는 타협을 불허하는 시종일관한 투사로서 로마가톨릭의 화체설을 신랄하게 반대했지만, 평생을 칼빈과 친밀한 교제를 유지했던 마틴 부써(M. Bucer)와 같이, 칼빈은 종교개혁 운동 내부에 있어서는,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조율하고 융화할 줄 알았던 유연성있는 신학자였다는 것이다. 얀서 박사에 의하면, "유일한" 칼빈의 성찬 신학이라는 표현은 하나의 픽션과도 같다. 스미츠(L. Smits)가 칼빈의 성만찬 신학에서, 얀서 박사는 가장 기본적인 교리적 일치로서 정말 중요한 것은, 쮜리히(Zurich)의 설교자들과 토론한 이후에 칼빈의 성만찬 신학의 정확한 표현으로서 결론지어진 1549년의 Mutua consensio 즉 Consensus Tigurinus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에 근거해서 요약하자면, 칼빈의 전체 작품들이 보여주는 것은, "칼빈의 주의 만찬 교리"가 두 경향, 즉 루터의 성만찬적 실재론(sacramental realism)과 쯔빙글리의 영성주의적 상징주의(spiritualistic symbolism) 사이를 움직였던 성령론적(pneumatological) 견해였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칼빈의 성만찬 신학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exhibitio"(드러냄)이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되시지 않으면서도,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인간들에게 실제로 주시는 것이다. 이 드러냄(exhibitio)은 주의 만찬의 신비적인 측면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은혜의 선물의 실체를 존중해 준다. 은혜의 실체와 초월 모두를 유지하기 위해서 칼빈은 쯔빙글리의 순수한 상징주의(pure symbolism)와 루터의 성찬 실재론(sacramental realism)이라는 양 극단적인 이론을 넘어섰다. 칼빈은 루터주의자들과 동역이 필요할 경우에는 자신의 입장을 루터파의 그것과 조율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러나 1549년 쯔빙글리주의자와 루터주의자간의 간격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가 실패했을 때, 칼빈은 반대로 스위스의 쯔빙글리파에 우호적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러나 1560년대에 북독일에서 멜랑흐톤 주의자들에게 보다 많은 공간이 열렸을 때, 칼빈은 다시 1540년대와 같이 친-루터적인 접근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1562년에 막시밀리안(Maximilian) 황제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왕으로 임명되었을 때, 칼빈은 "많은 좋은 독일인들"이 프랑스의 성만찬 교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루터적인 견해에 일보 양보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칼빈은, 마틴 부써가 그랬듯이, "위대한 대화의 신학자"(the great theologian of dialogue)라고 표현될 수 있다. 1549년의 Consensus Tigurinus보다 2년 앞에 있었던 스위스의 압력과, 칼빈이 불링거의 문서에 서명한 것은, 칼빈의 성만찬 견해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칼빈은 1550년대에 명백하게 드러내 놓고 쯔빙글리적인 진술을 사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루터주의자에 관하여, 칼빈은 자신을 1549년의 쯔빙글리적인 입장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칼빈의 1555년과 1556년의 <변호들>과 그의 1557년의 베스트팔(Westphal)에 대한 <마지막 충고>(Last Admonition)에 나타나는 칼빈의 진술들은, 스위스 사람들이 1549년 이전의 칼빈에 대항하여 사용했었던 내용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Consensus에 대한 베스트팔의 반대는 종종 불링거에 대항하는 1549년 이전의 칼빈의 반대가 반복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유일한" 칼빈의 성만찬 신학이라고 하는 정적인 견해가 왜 비-역사적인지를 웅변적으로 설명해주는 이유가 된다. 그러면 우리의 초점을 보다 좁혀서 칼빈의 성만찬 신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칼빈의 모든 자료들이 일치하는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칼빈은 지속적으로 신랄한 반 가톨릭주의적인 입장이라는 것이다. 1549년 이전이나 이후나 이점에 있어서 칼빈의 공격은 변함이 없다. 시종일관한 칼빈의 비판은, 매일 미사의 희생제사, 빵과 포도주의 성체화,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화됨, 개인적인 미사, 죽은자들을 위한 미사, 비밀 고해성사, 그리고 교황제에 대한 정죄와 주의 "참된 기관"으로부터의 일탈 등이었다. 이런 칼빈의 강조는 분명하게 말해서 칼빈 자신의 회중에게 우선적으로 목적되었는데, 공동체 안에 숨어있는 니고데모주의자들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칼빈의 성만찬 신학은, 1549년 이전에 기록된 칼빈의 작품들과 1549년 이후에 저술된 저작들은 사이에서, 전적으로 달라지고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1546년의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칼빈은 성만찬시 그리스도의 몸은 루터파와 유사하게 실제적인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스위스의 입장(즉 쯔빙글리의 견해)과 거리를 두고 있다. 빵을 받아먹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받는 것이다. 빵을 쪼갬에 참여함에 의해서 우리는 그의 몸에 참여한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이 자신을 나타내심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렇지만, 1549년 이후인 1555년 이후에 나온 그의 설교에서 칼빈은 이전과는 다른 발전된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성례의 "선물"로서의 특징을 철회하고, 기념적이며 교회론적-윤리적의 측면으로 해석하고 있다. 성찬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과의 연합함을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 연합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성례의 선물은 기념, 확신, 확인이라는 의미로서 믿음 안에서 매일 경험되어 지는 확신이다. 특히 1558년의 칼빈의 설교를 보면, 성만찬과 관련된 문맥에서 압도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들이 "그때", "~할 때"였다. 이것은 일상의 삶 속에서 지속되는 신앙생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칼빈은 성찬에 참여함의 윤리적인 조건을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헌신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들을 깨뜨리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칼빈은 강력하게 권면한다. 우리가 신실하신 그리스도에게 열려질 때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칼빈, 그는 진정 누구인가? 그의 신학은 무엇인가? 칼빈에 대한 후대의 해석들이 칼빈의 신학인가? 어느 한 작품에 나타난 칼빈, 어느 한 시기의 칼빈의 모습이 칼빈인가? 진정한 칼빈은, 그의 생애 전체에 나타난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 칼빈은 온순하고, 유연성있으며, 발전적인 사상을 갖는 한명의 "좋은" 신학자였을 뿐 아니라, 통찰력있는 교회 지도자였다. 그의 앞에는, 신앙 때문에 난민처럼 조국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개인적인 삶의 현장이 있었고,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이 전개되는 숨을 조이는 종교개혁의 치열한 역사가 있었다. 칼빈은 그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그의 심장을 드리며 종교개혁 교회를 섬겼던 우리와 성정이 같은 그리스도의 제자였던 것이다. 논평 = 안인섭 교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역사신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