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존 헷셀링크의 '칼빈의 신앙교육서들에 나타난 교리' ② 아키라 데무라의 '칼빈과 아 라스코의 교회법령 비교연구' ③ 박쿠스의 '칼빈, 거룩한 영웅인가? 가장 나쁜 기독교인인가?' ④ 빈 얀서의 '칼빈의 성만찬 신학의 새 해석'
제9차 세계칼빈학회가 지난 2006년 8월 네덜란드 엠던에서 열렸다. 기독신문은 이미 4회에 걸쳐 당시 학회에서 발표된 주요 주제논문들을 소개한 바 있다. 이 연재와 동일한 주제로 한국칼빈학회(회장:이양호)가 7월 16일 정례 발표회를 가졌다. 여기서 발표된 논평들을 지난 연재에 이어 줄여 소개한다.
"프랑스 개혁교회가 제네바교회보다 칼빈 교회론에 더 근접" 제네바교회와 달리 국가간섭 없이 칼빈신학 교회제도에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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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차 세계칼빈학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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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몬드 멘처 교수는 현재 미국 아이오와주에 있는 아이오와대학교의 종교학과 교수인데 2001년부터는 크룸 페밀리(Daniel J. Krumm Family) 석좌교수로 종교개혁 역사학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1997년에 16세기 학회(Sixteenth Century Studies Conference)의 회장을 역임한 바 있는 멘처 교수는 16세기 유럽사를 다룬 단행 본 시리즈(Sixteenth Century Essays & Studies)의 편집자이고, 16세기 유럽사의 가장 권위 있는 학술잡지인 Sixteenth Century Journal의 편집위원이다. 16세기 개신교사에서 사회사적인 관점을 가지고 연구하는 대표적인 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멘처 교수는 뉴욕 포담대학교에서 학부를 하고 위스콘신대학교 역사학과에서 로버트 맥큔 킹던(Robert M. Kingdon) 교수의 제자로 석사를 하고 이 학교에서 1973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로버트 킹던 박사는 한국 선교사였던 매큔(George McCune)선교사의 외손자인데 일반 사학자지만 16세기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학문적 작업을 하였기에 1981년에는 미국 교회사학회의 회장으로 피선되기도 했다. 그는 그 취임 연설에서 교회사학회가 교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교회제도에 관한 연구에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고, 그 하나의 실천으로 칼빈의 제네바 컨시스토리 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킹던 교수와 그의 제자들의 연구는 이 분야에서 독특하며 16세기 제네바의 사회상과 평신도들이 어느 정도 칼빈의 종교개혁을 공감하고 체화하였는지를 잘 보여줌으로써 개혁주의 전통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또한 구체적으로는 칼빈의 목회의 성격과 내용 그리고 컨시스토리를 통한 성도의 훈련과 권징의 구체적인 사례를 밝히는데 탁월한 공로를 세웠다. 킹던 교수와 그의 제자들(대표적으로 Jeffrey Watts 교수를 들 수 있다)이 제네바 컨시스토리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면 멘처 교수는 칼빈의 신학과 목회가 프랑스 칼빈주의 교회와 위그노들에게서 어떻게 유사하게 또는 다르게 적용되었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해 왔다.
그는 위그노와 프랑스의 칼빈주의 교회에 대한 다수의 연구논문들을 발표했다(Society and Culture in the Huguenot World, 1559-1685, Blood and Belief: Family Survival and Confessional Identity among the Provincial Huguenot Nobility, Sin and the Calvinists: Morals Control and the Consistory in the Reformed Tradition, Heresy Proceeding in Languedoc, 1500-1560 등).
이번 세계칼빈학회에서 멘처 교수가 발표한 논문은 그동안 그가 연구한 프랑스 칼빈주의 교회들의 성도의 훈련과 권징을 재정리하면서 먼저 칼빈의 교회론을 정리하여 동일한 교회론을 근거로 하여 세워진 두 개의 교회, 즉 프랑스교회와 제네바교회의 상이점과 차이점을 비교하여 소개하고 있다.
프랑스계 이민자였던 칼빈이 제네바 교회의 목회자로서 시의회나 제네바 유지들과의 갈등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교회를 세워갔다면, 프랑스에 있던 칼빈주의자 위그노들은 프랑스 정부의 개신교 박해정책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으며 교회를 발전시켰다. 교회의 직제나 성도의 훈련과 치리(Church Discipline)의 경우 제네바 교회와 프랑스 칼빈주의 교회는 칼빈의 신학을 공유하였음에서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데 있어서 서로 조금씩 다른 양상을 가지게 되는 것은 결국 신학은 목회의 자리, 신자들의 삶의 자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하는 것임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라 하겠다.
이 논문의 서론에서 멘처 교수는 "프랑스 개혁교회에 의해 제도화된 칼빈의 교회론이 어떤 측면에서 그의 이론적 모델에 더 가깝다거나, 더 자유롭다거나 혹은 더 순수한 형태를 대표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이에 대해 그는 프랑스에 있던 칼빈주의 교회는 국가의 협조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실제로 칼빈의 신학에 더 근접할 수 있는 자율성을 보장받았다고 주장하여 자신의 질문에 거의 "예"라고 답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예로서 프랑스 개혁주의 교회는 제네바 컨시스토리와는 달리 출교를 시행하는 데 있어서 시의회의 간섭을 받지 않는 절대적 권위를 가졌고 출교의 목적을 강화하기 위하여 전표나 동전을 사용하여 성만찬 참여하는 사람들의 자격을 철저하게 확인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컨시스토리의 구성원에 프랑스 교회가 집사를 포함한 것은 칼빈의 제시와는 다른 것이지만 집사들도 평신도 대표이라는 점과 빈자구호를 담당하던 집사의 직무를 생각할 때 컨시스토리의 기능이 오히려 더 확대되고 다양해졌다고 볼 수 있겠다.
논평 = 이정숙 교수/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교회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