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세계의 중립성(The neutral world)

 

 

  또한 예수께서 이 세상의  중립성 (neutrality)에 관하여 특별한 빛을 던져주신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고 이 토론을 끝낼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은 우리에게 이 중립성이 다만 일시적인 국면(only a temporary phase)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때때로 전쟁과 범죄, 재난과 재해의 한가운데서도, 태양은 여전히 일상의 과정을 따라 떴다가 진다. 마치 잘못된 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그러나 자연은 모든 인간의 다툼과 논쟁을 초월하여 있다. 자연은 신앙과 불신앙, 즉 하나님을 대항한 싫어함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함 사이의 전쟁을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예수께서는 그것이 이런 길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악인(evil one)의 그 무시무시한 전쟁은 중립적 배경에 대한 윤곽을 보여준다. 자연은 편들지 않는다. 자연은 다만 그 다툼에 대하여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왜 저것이 그렇느냐고 물을 때,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저런 문제들의 유일한 해답(thing)은 신앙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믿어야만 한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힘이 없이도, 그리고 번개, 지진, 폭풍, 다른 중성적 재난들과 같은, 그러한 보이는 표적 없이도, 우리는 그들의 말에 관한 그 위대한 주인(owner)의 종들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의 의식이 우리에게 그들이 옳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그 종들을 믿어야만 한다.

 

  만일 자연이 이러한 전쟁 속에 혼합된다면-가야바(Caiaphas)의 궁전이 예수께서 책망하시던 그 밤에 무너졌을 것이라고 한다면, 혹은 만일 빌라도(Pilate)가 청중들 한가운데서 거의 죽도록 맞았을 것이라고 한다면-신앙은 더 이상 신앙일 수 없을 것이다. 즉 신앙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의 단단한 기반(solid ground)일수 없을 것이다. 그때 모든 사람은 포기와 항복을 강요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들은 우리에게, 우리의 의지에 대항하고, 하나님에게 동의하기를 강요할 것이다. 또한 그때, 하늘나라(the Kingdom of Heaven)는 모든 사람을 위해 강제적인 왕국(a realm of compulsion)이 될 것이다. 유일하고도 결정적인 것, 즉 신앙과 확신에로의 소명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세계 역사의 모든 세기들을 통하여 두 측면이 남게 되는데, 즉 자연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삶의 경험 안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그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께서, 멀리서부터 우리에게 오시는 성부(the Father)로부터의 한 다른 위격(Person), 혹은 존재(Being)이신 것처럼 보인다.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의 무릎을 꿇고, 그분 안에서 성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볼 그 순간, 이 두 가지는 하나이며 동일한 것으로 증명된다.

 

  두 번 째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또한 자연을 전혀 다르게 보도록 하신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의 그 빛 안에서 자연을 퍽 가까이서 보려고 할 때, 자연은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중립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자연은 또한 가르치며, 그리고 그 자신의 방법으로 설교한다.

 

  들판에 핀 꽃들은 온종일 우리에게 자신의(His) 창조물을 부양하고 보살피는데 결코 지치지 않으시는 그분에 관하여 말해준다. 조그마한 겨자씨 한 알은 우리에게 하나의 비밀을 말해주는데, 즉 지극히 작은 어떤 것이 차츰 매우 크고 강한 것으로 성장한다는 비밀이다. 하늘을 날으는 새들도 어떤 메세지를 우리에게 전한다. 가지가 휘어진 포도나무도 우리에게 이야기 하나를 들려준다. 저 비할데 없는 모든 창조의 예술적 역사는 그것의 가장 깊은 의미에 있어서, 논의나 토론쪼로 중립적이지 않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비록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은 듣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한 이야기를 말해준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계신 성부를 알았을 때, 그리고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자연을 관찰했을 때, 그때 나는 거기서 나를 만나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저 혼란스러운 모든 아름다움 속에서 그분 자신을 나에게 보여주시는 그 하나님께서는 그 문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바로 그 동일한 성부(the Father)이시다.

 

  삶에서 그것들의 모든 변덕스러움(freakishness)과 이랬다 저랬다함(capriciousness)과 다양한 변화(variegation)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의 경험들까지도, 중성이 아니다. 확실히, 선한 사람은 오직 기쁨과 번영(prosperity)만을 경험하고, 악한 사람은 고통(misery)과 재앙(adversty)만 당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종종 그 반대의 경우가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가 나의 죄악됨(sinfulness)과 상실된 상태(lost state)를 인식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나의 무릎을 꿇는 것을 배웠을 때, 그때 그러한 경험들은 다른 면을 갖게 된다.

 

  사탄의 사자(messenger)가 와서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려고 내 육체에 가시를 둘 때, 그때 나는 이 모든 것 배후에, 너무 우쭐대는 것으로 부터 나를 지키려는 목적이 있음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고후 12:7-9). 나는 이 모든 변덕스럽고도 발작적인(fitful) 사건들 가운데, 하나의 일정한 계획이 나의 삶을 움직이고 있음을 알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처음 그랬던 것으로 보였던 만큼 변덕스럽지 않다는 사실, 또한 깨닫는다. 나는 내가 전에 감지할 수 없었던 분명한 윤곽(lines)과 배경을 알아채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나아가서 나의 하나님을 더 잘 배워서 알 때, 그리고 내가 그분과 대면하기에 익숙해질 때, 그때 내가, 알려지지 않은 분이시며 삶의 통치자이신 그 분을 진정으로, 오래토록, 뚫어지도록 바라본다면, 나에게 성부께서 가지신 것과 똑같은 모습을 드러내 보이신다는 것을, 나는 또한 깨닫는다. 그 성부께서는 나를 그리스도 안에 받아 주셨던 바로 그분이시다.

 

  저 먼 타국에까지 배고픔과 고독, 행복과 불행을 보내신 그 하나님께서는, 처음 기다리고 계셨던 그 성부(the Father)와 완전히 다른 하나님이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분의 가장 깊은 본질(essence)에 있어서, 그분은 너무나도 동일하시다. 그것이 희미하고 애매모호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 자신을 나에게 나타내신, 그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거룩한 의지와 매우 밀접하게 뒤섞여 있는 이 모든 것들 안에, 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 알려지지 않은 분이 영원히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고 있는 동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비밀이 어느 날 풀려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휘장이 걷힐 때 그 시간이 올 것이며, 그때 우리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다.

 

  우리는 아덴(Athens)의 그 제단,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제단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그 제단 대신에 하나의 거울을 바꾸어 놓은 것, 즉 그들의 그 알려지지 않은 분의 자리에 그들 스스로를 올려놓은 것을 보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하는 저 무자비한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하며, 반항적으로 비방하고 모독한다는 것 또한 알았다. 그러면 우리는 그 알려지지 않은 분의 그 제단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아덴에서 그것을 직면 했을 때, 바울은 그것을 거기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그것에 관하여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그분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알려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