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
이 모든 질문들의 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성경을 펼쳐,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께서 알려지게 된 것과, 그분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오셨다는 것을 읽는다. 예언을 통해 수세기동안 준비하신 후에 그분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나타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바로 그 감찰하심(eyes)을 본다. 그 휘장은 옆으로 밀쳐졌으며 하나님께서는 오셔서 자신의 백성을 방문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읽을 때 충격적인 첫번째 사실은 그런 특별한 방법으로 그분은 우리들과 같은 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모든 문제들과 수수께끼들을 가지고 세상을 감찰하셨고, 세상은 하나님께서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모두에게 동일하게 비를 내리시는 그분의 감찰하심(eyes)을 피하지 못했다. 달리 말하면 이 세상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할찌라도, 그것은 여전히, 그리고 모든 면에서, 선과 악에 관한 우리의 개념과는 다르다. 그것은 마치, 우주적인 체계가 정의와 불의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며, 마치 그것이 선과 악 사이의 무서운 싸움에 관하여 무관심하고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우리 삶의 위대한 통치자(The great Regent)이시고 우리를 자신의 손으로 친히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때때로 우리의 간청과 우리의 슬픔에 전혀 귀 기울이시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아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그의 비유중 하나에서 불공평한 심판자(unjust judge)로 묘사했으며, 여기에서 그는 그분이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셨으며, 표면상으로는 그 분을 요구하는 자들의 소리를 매우 느리게 들으셨다고 덧붙였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그 무시무시한 어두움과, 고통스러운 가장 두렵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abyss)에 들어 가셨을 때, 그같은 불평과 비탄이 그의 입술로부터 터져 나왔는데 한 번은 절망 중에서 인간으로서 말씀하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모든 것들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휘장(curtain)의 “이러한 측면”에 서 계신다. 그리고 그분은 알려지지 않은 분의 슬픔과 수수께끼에 아낌없이 사용되셨다. 그리스도는 고통의 가장 어두운 심연에서 그것을 응시하셨다. “그는 ...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막 14:33)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지각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신 바로 그 예수께서 동시에 위로부터 오신 그분이시다. 그는 계속해서 그와 아버지가 하나이시며 그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힘 있는 구원사역을 이루신다는 것을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에 관한 그의 모든 가르침에서 드러낸 그 빛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아주 명백해진다. 우리가 그분의 말씀하신 그 말씀들을 숙고할 때 우리의 마음은 바로 그 빛으로 조명되어지며 밝혀진다.
우리는 첫째로, 잘 알려진 저 탕자(Prodigal Son)의 비유를 생각할 수 있으리라. 그 탕자는 고향(home)을 떠나 자신을 어지럽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내맡겼다. 그리고 저 먼 타국에서 그는 거기서 또한 그가 그 알려지지 않은 분과 함께해야만 했는데, 그분께서는 심지어 자신의 삶의 여정(goings)을 통제하신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동한 그는 감각적인 쾌락의 생활에 도취되었고 이 세상의 마력에 미혹되었다. 그러나 그의 재산이 떨어졌을 때 거기에서 굶주림과 절망의 나날들을 보내게 되었으며, 그런 다음 그 알려지지 않은 분과의 극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그의 모든 친구들이 그를 버렸으며, 그는 배고프고 고독한 거러지가 되었다. 살아남기 위하여 그는 일자리를 찾아야 했지만, 그가 발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직업이란 돼지 치는 것이었고, 전혀 모르는 이방인의 것이었다. 이 이방인은 우연히도 그의 고용인들의 배고픔에 어떠한 동정도 보이지 않는 불쾌한 사람이었다.
그 젊은 사람은 그 돼지가 먹는 것(the husks of the swine 쥐엄열매:개역한글판)으로 여전히 그의 배고픔을 달래려 했는데 그것은 그가 받은 부족한 임금으로는 충분한 음식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심지어 그 찌꺼기 조차도 그에게는 부족했다. 확신컨대, 인생의 통치자이신 그 알려지지 않은 분께서는 이 젊은 사람을 매우 거칠게 다루셨다. 불행중의 불행이로다! (Misery upon Misery) 푸르고 밝은 하늘은 찬란하게 초록의 세계위에서 반짝거린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그 아들은 점점 더 알려지지 않은 분의 능력에 감동을 받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또한 이 청년이 후회하고 그의 “집”으로 돌아올 때 일어났던 사건에 관하여 말씀하신다(눅 15:20).
저 먼 타국에서 이 젊은 아들 때문에 괴로워 하고 슬픔과 비탄에 싸여있었던 알려지지 않은 위대한 분께서 그 비유에서의 성부(the Father)와 동일한 분(Person)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 청년이 저 먼 타국에 있을 때 단 한순간이라도 그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을 잊거나 포기해 버리신 적이 없다. 말하자면 탕자는 두개의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났다. 그는 매우 충격적이면서도(blow upon blow) 전혀 이해할 수 없는(riddle upon riddle)방법으로 알려지지 않은 분으로서의 그분을 만났다. 그러나 저 동일한 하나님께서는 그가 집에 가까이 왔을 때 그를 맞아 주셨는데 하나님의 모습은(face of God) 변해있었다. 지금 그것은 또 다른 하나님이셨다. 그 알려지지 않은 분께서는 알려진 분이 되어있었다.
그러면 그분께서 정말 그렇게 되셨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모습은 변해있지 않았다. 다만 그 청년 자신이 변해있었다. 그는 다른 길로 집에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겸손과 회개의 방법이었다.
또 다른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수수께끼를 더욱 날카롭고 엄하게 정의 하신다. 누가복음 20장에서, 예수께서는 한 포도원을 경영하면서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주어 경작하게 하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말씀하신다. 그 포도원의 주인은 다음과 관련하여 알려지지 않은 분이심을 나타낸다. 이 예화에 나오는 그 소작인들은 유대인들이다. 그 알려지지 않은 분께서는 여전히 배후에서 끝까지 남아계셔서, 그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내는데, 그들은 종들에게 포도원에서 나는 소출 중 얼마를 주어야만 했다. 분명히 여기서 보다 깊은 의미는 이 종들이 선지자들이며, 그분의 명예와 그분의 의를 방어하고 가르치기 위해 나아갔던 모든 자들이다.
때가 되어 포도원의 주인은 그 소작인들에게서 소출 얼마를 거두기 위해 한 종을 보낸다. 그러나 그 소작인들은 그를 심히 때리고 쫓아내어 빈 손으로 보냈다. 그 알려지지 않은 분은 지금 또 다른 종을 보내신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분의 말씀 이외에 어떤 다른 권위를 가지고 보내어진 것이 아니다. 단지 그가 그 알려지지 않은 분의 말씀 그리고 오직 그분의 말씀만 의지해야 하는 결과들로 인해, 그 소작인들은 이 두 번째 종 역시 심히 때리고 부끄럽게 만들어 빈 손으로 쫓아내어 버렸다.
이제까지 아무런 사건도 발생치 않았다. 그리고 다시 세 번째 종이 보내어 졌는데 그 역시 알려지지 않은 분의 메세지(message)와 말씀이외의 어떤 다른 제재(sanction:백성들의 잘못에 대해 징벌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능력)도 없다. 그 위대한 알려지지 않은 분께서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고 숨겨져 있으며 감추어져 있다. 그리고 이 세 번째 종 역시 상하게 되고 쫓겨난다.
마침내 그 주인은 자신의 아들(His Son)을 보내지만, 그 아들까지도 그 알려지지 않은 분의 말씀 이외에 다른, 그분의 능력을 보이기 위한 어떤 종류의 명령도 받지 않는다.
이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그 엄청난, 실로 세상을 뒤 흔드는 문제를 간략하게 개설하신다. 즉 이 세상에는, 그 백성에게 와서 회개하라고 외치는 전도자(preacher)들이 있지만 그들은 보내신 분(the Sender)에게서 어떤 제재(sanction)도 받지 않았다. 종말의 때까지 어떤 제재도 받지 않을 것이다. 즉 번개불로도 천둥으로도 징벌함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dispensation)동안에 사람은 그 말씀만 의지해야한다. 그 알려지지 않은 통치자께서는 그분의 날이 올 때까지 여전히 배후에 계신다. 내가 복음을 읽을 때, 그것은 항상 예수께서 어떻게 이러한 문제들을 당신의(His) 제자들에게 명백하게 설명하시고 밝히시는 가를, 내게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심지어 가장 어려운 문제, 즉 자연(nature)이 최소한 도덕적 규범들(moral norms)에 관하여 관계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세상에서 미친듯이 날뛰는 그 무섭고도 비참한 도덕적 전쟁(moral war)에 대해 완전히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는 듯한 사실까지도, 그분께서는 그들로부터 숨기지 않으셨다.
선교사이고 음악가며 철학자로 잘 알려진 알베르트 슈바이쩌(Albert Schweitzer)는, 그가 쓴 책 중 한 권에서, 그가 세상에서 만난 하나님과 그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이 다르다고 기술한다. 세상에서 그분께서는 불가해(enigmatic)하고 기적적이며, 창조적인 능력으로 나타나시지만, 내 속에서 (즉, 내의식속에서)그분께서는 그분 자신을 도덕적 의지(maral will)로 나타내신다. 창조의 중립성(neutrality)문제에 대해, 예수께서는, 우리가 이미 인용했던 그 말씀에도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에게 공히 떠오르는 태양을 만드시고, 의로운자와 불의한자 모두에게 동일하게 내리는 비를 내려 주신다”는 것을 언급하신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문제를 언급하실 때, 그분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율법의 공의로움(justice)과 올바름(rightneous)에 관해서 우리 마음에 의심을 일으키게 할 정도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더욱이 그분께서는 그것을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완전하심(unfathomable perfection)의 한 예로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Him) 섬기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실 뿐만 아니라 자신을(Him) 몹시 싫어하는 자들에게까지도, 자신의 사랑에 너무 완전하시고 변함이 없으시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께서 이 문제를 아주 높은 단계(place)에 위치시켜 놓으셨는데 이 비밀(mystery) 안에서 그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아버지(Father)의 위대함을 알게 하신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어느 정도까지는 바로 두 번째로 중요한 어떤 한 문제이다. 복음과 복음 설교의 본질적인 핵심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하시려는 자신의(His) 영원하고 거룩한 의지를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셨다는 것인데, 만일 우리가 그분과 더불어 화해하게 된 때라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과 구세주 안에서 우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것이 그로부터 와서,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는 이 세상의 위대한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떤 의미로는 우리의 마음 문 앞에 한 요청자(a begger)로 서시어, 우리에게 우리의 문을 열고 자신을(Him) 향해 우리의 눈을 들라고 명하신다. 위대하시며 경외심을 품게하는 알려지지 않은 분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진 분으로 오시며,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안에 있기를 원하시는 아버지(Father)로서 그분을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하신다.
배후에 계시는 세상의 통치자(regrnt)께서는 여전히 알려지지 않은 분이시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의 마음에 들어오시는 그 순간, 그 알려지지 않은 분께서는 항상 자신의(His) 잃어버린 그래서 방황하는 어린아이를 기다리고 계셨던 유일한 분, 그 자비로운 아버지(Father)로 나타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