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도피 (The Escape)

 

 

  이러한 대화의 괴로움(painfulness)을 도피하는 방법들은 많이 있는데 수세기 이래로 그것들 모두를 사용해 왔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근래 그리스도께서 이 대화에 관하여 무엇을 가지고 말씀하시는가를 논의하려 들지만 우리는 우리가 그분에게 나아가서 그분의 말씀을 듣기 전에, 알려지지 않은 분과 이러한 대화를 하는 큰 어려움으로 부터 도피하기 위하여 인간이 만들어 왔던 많은 시도들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다른 방법들에서 자연 속에서 알려지지 않은 분의 모습들을 발견해왔다고 상상했던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은 그들의 눈을 높이 별들에까지 올려놓았는데 그 별들은 밤마다 조용하고 놀라운 자리바꿈을 한다. 캄캄한 자정(meridian 자오선)을 지나 그들이 나무들과 관목, 식물들을 관찰했는데 그것들은 서로 뒤섞여 있는, 생명을 주는 땅으로 부터 발생한다. 그들은 황폐한 사막의 황무지를 응시했고, 바다의 한결같은 노래를 들었다.

 

  그들은 모든 자연을 전체적으로 조망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저것이 신(God)이다. 그분은 여기 혹은 저기에 계시지는 않지만, 그분은 모든 것을 포옹(포함)하시는 총체(the all-ambracing all)이시다. 그분은 모든 꽃 가운데 살아 계신다. 그리고 생명의 바삭거리는 신비한 소리로 흔들리고 진동하는 땅, 영양분을 제공하는 땅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모든 나무들마다 조금씩은  신성 (a little of God)이 있다. 하나님은 분자 등이 서로를 꽉 붙잡고 있는 파괴할 수 없는 자성(magnetism 자력의 성질) 안에 계시는데 회전하는 행성들도 이 자성의 원리에 의해 질서 정연한 궤도 안에서 서로를 이끌어 준다. 저 무한함으로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우주와 모든 대립들은 차츰 사라져 버리고, 모든 논쟁과 불일치들은 모호해지고 흐릿해졌다. 하나님께서는 빛 가운데 그리고 새날의 영광중에 계시지만, 또한 그분은 밤의 어두움 중에도 계신다. 숲속에 떨어진 낙엽은 새로운 층들(new layers)을 형성시키며, 모든 녹색식물은 그들의 수액과 즙을 이 떨어진 낙엽에서 얻는다. 죽음으로부터의 생명, 생명으로부터의 죽음을 말한다. 밤 그리고 낮과 그림자가 또한 죽음과 생명이 연속됨 속에 알려지지 않은 분의 음성 즉 하나님의 음성이 있다.

 

  이런 방법으로 세계를 관찰했던 사람은 동시에 함께 자기 자신을 달리 바라보아 왔다. 그 사람은 그가 거대하고 끝없는 무한함 속에서 아주 적은 그리고 무의미한 작은 원소보다 더 가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생명의 동일한 힘과 추진력은 정맥(veins)을 통해 흐르며, 그의 허파(lungs)는 다른 사람들이 마시는 것과 동일한 공기를 흡입한다. 인간은 우리가 세계라 부르는 저 거대한 모자이크에 동화되어 버린다. 인간은 그것들 중에 아주 조그마한 조각에 불과하며 다른 단편들보다 더 좋게 깊게 보아 준다 해도, 근본적으로는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이다. 그가 그것을 우주의 충만함(the fullness of the universe)과 대조해서 볼 때 그 자신의 생명이  사라져 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거기에는 더 이상 어떠한 친분도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생명 없는 것을 움직이게 하고 식물과 동물에 그 모습을 갖추게 하는 것과 동일한 끌어당기고 배척하는 자성의 힘은, 또한 인간 속에서 그들의 새로운 형태들을 발견하는 힘과 매우 흡사하다. 그리고 인간은 단지 저 거대한 덩어리(body)의 한 작은 점 - 광대한 태양의 한 작은 파도에 불과하다.

 

  인간이 생각해낸 또 하나의 발견은 선과 악의 규범들이 변한다는 것이다. 그 규범들은 그들의 가장 자리과 권위를 잃어버렸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함께 일해야 하는 그분(the Other)께서 단지 총체(the all)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와서 명령들을 만들고, 인간에게 요구하는 그런 강력한 법칙은 더 이상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다만 자연의 한 부분품이기 때문에 어떠한 선 혹은 악도 알 수 없지 않은가!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양이 전력을 다해 그 풀을 끌어당김으로써 생명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자연은 단지 빛과 그림자의 주기적인 상호작용(rhythmic interplay)과 변화를 알 뿐이다.

 

  만일 내가 그 자연의 일부분이라면 그 때 내게는 저 생명의 강요성(compulsion)- 나보다 강한 어떤 것이 나를 파괴하고 죽음 바깥에서 살게 하기 까지 그 생명 안에서 나의 자리와 위치를 유지시키는 강제성-외에 아무것도 없게 된다. 그 때 둘러싸고 있던 법칙은 박살나고 남는 것이라며 내 자신 속에 억제된 고유의 성질이 있을 뿐이다.

 

  이것 뒤에 가장 위대한 발견이 뒤따르게 되는데 왜냐하면 현재의 삶이 단지 하나의 “독백” (monologue)에 불과할 뿐 더 이상 “대화”(dialogue)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고 내가 그분에게 말하는 그런 분(Other)은 계시지 않는다. 그분(The Other)은 다만 내 자신일 뿐이며 나의 삶은 나 자신의 존재와 대화하는 하나의 독백-지금 내 안에 구체화 되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독백-이 되어 왔다.

 

  그리고 이처럼 삶의 특성과 의미는 공격받게 된다. 삶은 그것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과 신분을 증명할 만한 표시(mark of identification) 즉 대화의 특성을 잃어버린다. 인간이 지금 이야기 할 수 있는 상대(one)는 하나도 없다.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의해 모든 측면에서 둘러싸여진 채로, 그는 홀로 서 있을 따름이며, 그는 다만 하나의 작고 무의미한 부분품(part)일 뿐인 그 자신에 불과하다.

 

  삶이 대화의 특성을 잃어버릴 때, 인간은 그의 삶을 살아가는 순간들에서 어떤 도움도 없이 홀로 서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필요할 때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그를 파멸하겠다고 위협할 때, 그는 빠져 나갈 길을 발견할 수 없다. 그는 무서운 시험이 그를 잡다 당기고 내던지며 넘어뜨릴 때 그 자신에 관한 이해 전부를 잃어버린다. 달성할 전망도 따라올 과정도 도달할 목적도 그 이상 성취할 목표도 없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홀로 있음(lonesomeness)으로써 생기는 완전한 무력상태(helpness)의 인간이다. 인간과 더불어 이야기 할 수 있고 이야기해야 하는 그분이(the Other)사라져 버릴 때, 삶의 가치와 의미 모두를 잃어버린다.

 

  이 모든 것들이 고통스러운 경험들이 된 시대가 인류 역사에서는 계속 있어 왔으며 그리고 그것들은 특히 오늘날 우리 자신의 시대에까지 실제적이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분에 관한 물음은 일찍이 이전보다 더욱 실제적이 되었다. 삶이 의미 있고 조화로운 대화인지 혹은 미친 정신 나간 독백인지의 문제는 오늘날 수많은 정신과 마음에 밀접하게 관련된 중요한 문제이다.

 

  단순히 알려지지 않은 분을 전적으로 무시해 버리고, 그분을 그들의 삶과 사고로 부터 빼어 버리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일상적인 사건들(happenings)의 의미와 배경을 맹목적인 자연 법칙(blind law of nature), 혹은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돌리려는 자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신(the divine)을 인간의 논리적 사고에서 찾으려 하며, 그들의 생각을 인간 자신 속의 내적 싸움(inner conflict)으로 변형 시킨다. 그러나 동시에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삶의 핵심은 파괴되어 왔다. 하늘은 여전히 우리 위에 높이 둥근 모양(arch)을 하고 있으나, 무한한 그리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신뢰로서, 우리의 마음을 의탁할 수 있는 하나님은 더 이상 계시지 않는다.

 

  비록 그것들이 아무리 공상적이고(visionary), 이상주의적(idealistic)이라고 할지라도, 이 모든 상상들(imagination)은 도망(flight)과 도피(escape)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충성으로부터 하나의 도피이다. 그것들은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제단을 뒤집어 놓고, 그 자리에서 쉬지 않고(restless) 씨름하는 사람이 자신을 보면서 자신을 섬기는 하나의 거울(mirror)을 올려놓는다. 내가 알려지지 않은 분다. 알려지지 않은 분을 찾음에 있어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살며, 나의 의지를 따라서 그 알려지지 않은 분을 발견해 왔다.

 

“내가 내 영혼의 선장이다.”-William Ernest Henly-
 “내가 바로 내 사고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한 하나님(a God)이다.-William kloos

 

  지금 전쟁의 위기가 전 유럽을 가장 근본적으로 진동시키고 뒤 흔들어온 이 모든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명백함(clearness)에 직면케 한다. 이런 도망할 수도 풀 수도 없는,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불가해성(enigma)이, 혼란스럽고 흥분된 우리 시대의 아주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가정해서 하는 말이 아님을 나는 확신한다.

 

  모든 시대에서 두 가지 사실은 우리에게 더욱 명백해진다. 우리의 제한된 시야(horizon)와 이해, 그리고 이기심(egoism)을 가진 인간존재들로서, 우리가 자연의 웅대함에서 알려 지지 않은 분의 모습을 읽으려고 할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 상상은 희미해져가고 더러워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총체(the All)가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 쉽고, 우리가 저 총체의 불꽃들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작은 광선들이며 반영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렇게 생각할 때, 대화는 질식되고 숨 막히게 되며 중단되어 진다.

 

  두 번째로 우리의 개인적이고 이성적인 삶의 방향과 경험의 테두리 안에 있는 인간 존재로서, 알려지지 않은 분을 인식하려고 할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내적인 감정들을 숭배하기(derify) 쉽고 우리자신의 규범과 기준을 세우려는 경향이 있다. 그럴 때에, 알려지지 않은 분은, 일찌감치 더 모호해지고 멀어지며 동떨어지게 된다. 그 거울은 제단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며, 그 때 대화는 끝장나게 된다.

 

  이 두 사실의 압박감 아래서 우리는 다시 고대 아덴(Athens)사람들이 이와 같이 날카로운 공식을 제공했던 그 물음에 직면한다. 즉 알려지지 않은 분은 누구신가? 우리가 어떻게 그분에게 접근할 수 있으며 어떻게 그분과 직접 만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분과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의 삶이 가장 깊은 의미에서 그것이 그 무엇이어야 함이 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