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십계명 (율법1)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잘못된 이해

 

사람이 등불의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마 5:17)

 

율법 폐기론(Antinomianism)자들은 신자들의 삶에 있어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하고 율법의 중요성을 전면 부정하거나 간과한다.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도덕법을 지켜야 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그 도덕법으로부터 자기들을 자유케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하나님의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케 하였을 뿐 아니라 그 율법에 복종해야 할 모든 의무로부터도 해방시키셨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은혜는 모든 불순종을 정당화해 주는 면허장과도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마 5:17)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폐하신 것은 율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지 율법 그 자체는 아니었다(마 5:21~28, 15:1~9). 사실상 예수님은 올바른 해석을 통하여 율법을 다시 새롭게 하시고 온전케 하신 것이다(마 5:18). 그리고 율법과 은혜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새 언약”을 예찬하였던 사도 바울도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고 하여 율법폐기론에 대한 그의 정죄를 분명히 하였다.

 

율법 폐기론자들의 가장 큰 오류는 ‘칭의’와 ‘성화’를 혼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칭의)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사랑에 의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지킴으로 믿음 안에서 날로 성장(성화)해 간다. 또 하나의 심각한 오류는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율법 곧 십계명을 각 성경에서 서로 다르게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구약시대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먼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였고 그리고 그 복종의 대가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으로부터 이미 해방하신 후에 주신 것이며, 그들은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그 율법을 지키게 된 것이다(출 20:1~2). 그리고 신약 성경도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의 당연한 노력임을 가르치고 있다. 구약 성경은 자기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한 기념비적인 증거로 가득 차 있다. 그와 같이 신약 성경도 하나님의 계명으로 차득 차 있다.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그의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온전히 나타낼 수 있다(요 14:15).

 

율법주의(Legalism)는 율법 폐기론자들의 정반대 입장에 서 있는 이단이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주의자는 바리새인이었고 예수님은 그들을 심하게 책망하셨다. 율법주의자들의 가장 근본적인 오류는 은혜 위에 율법을 두고 율법을 준행함으로 스스로 구원에 이르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아브라함의 자녀로서 그들의 혈통적 신분과 율법에 대한 그들의 열심을 믿었다. 이것은 바로 복음에 대한 부정이다. 그리고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의 정신을 배제한 율법의 형식적인 조항에 집착한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스스로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위하여 먼저 그 율법의 의미를 축소시켜 해석하려 한다(마 19:21).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법에다 자신들이 스스로 만든 법을 추가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적인 ‘전통’(유전)을 하나님의 법과 동일한 자리로 끌어 올렸다. 그것으로 백성들의 자유를 빼앗고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하신 그들을 새로운 사슬로 묶어버렸다.

이러한 율법주의적 횡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끝나지 않고 새로운 형태로 오늘도 교회를 괴롭히고 있다. 율법주의는 흔히 율법폐기론에 대한 반작용으로 제기된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율법폐기론자들의 도덕적 방종에 빠져서도 안 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보다 더 엄격한 형식적인 계율을 만들려고 해서도 안 된다. 율법주의자들의 또 다른 왜곡은 사소한 점들에 대한 순종에 열심하는 반면에 율법의 보다 중요한 문제들을 스쳐지나가는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이 책망하신 것에서 잘 나타난다(마 23:23~24). 동시에 율법폐기론의 유형들은 흔히 율법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온갖 행패를 다 부릴 수 있는 도덕적 방종을 도모해서도 안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참된 신앙적 자유를 도덕적 방종과 혼돈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러한 율법폐기론과 율법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신중하게 연구하는 길이다. 그렇게 할 때 구원받은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최선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