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l Barth의 신학, 개혁신학을 만나다

 

이신열 교수(고신대 신학과)


 

 

바르트의 신학에 관해서 짤막한 지면에 제대로 논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많은 전기 내지 평전들이 작성되어 출판되었으며 (대표작은 일반적으로 에버하르트 부쉬 (Eberhard Busch)에 의해 쓰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신학을 다양한 측면에서 다룬 신학적 평가서들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러나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그의 신학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글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화란의 G. C. Berkouwer, 미국의 C. VanTil 같은 인물들의 글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간략한 방식으로 다음의 세 가지 차원에서 고찰한 후에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나름대로의 비판을 시도하고자 한다. 첫째, 그의 신학의 특징적인 차원을 살펴보고 둘째, 그의 신학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이유와 셋째, 그의 신학에 나타난 비개혁주의적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바르트 신학의 특징

바르트 신학은 도대체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바르트의 신학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지만, 막상 바르트의 신학을 바르트의 신학으로 만드는 독특한 바르트만의 무엇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이는 바르트 신학에 통달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필자도 바르트 신학에 통달했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저런 모양으로 바르트를 연구하고 가르쳐 온 결과에 근거해서 그의 신학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신학은 특징은 방대함, 깊이, 그리고 독창성이라는 세 단어에 의해 총괄된다. 우선 방대함이란 아마 그의 주저 (magnum opus)에 해당하는 <교회교의학>을 읽으려고 시도해 본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느끼게 되는 주제일 것이다. 바르트는 교의학을 단순히 교의학으로만 간주하지 않는다. 그에게 교의학은 신학의 모든 주제를 총괄하는 신학이다. 그에게 교의학은 곧 신학이며 신학은 곧 교의학이다. 그가 <교회교의학>에서 다루지 않는 신학의 분야는 거의 없다. 그는 총체성을 지닌 신학자로서 신학의 분과화 현상이 일어나기 전에 신학이 원래 지니고 있던 신학의 방대함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는 신학자이다. 그의 신학이 지닌 방대함은 신학이 포괄하는 모든 지식에 관한 것이다. 그는 신구약 성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주해에 임한다. 또한 교회사의 모든 시대에 걸쳐 발생하였던 사건들이 어떤 차원에서 교리적 또는 교의적 의미를 지니는가를 캐묻는다. 또한 신학이 지닌 윤리적이며 실천적 차원도 빠뜨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의학은 그 자체로서 신학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총체적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교의학자의 아주 흥미로운 단면이 드러난다. 교의학자는 신구약, 교회사, 실천신학을 위시한 신학의 모든 분과를 마치 제 집 앞마당 드나들듯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으로 보인다. 마치 자신의 분과가 교의학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교의학이 지닌 방대함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섭렵(?)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런 섭렵의 종착역은 언제나 자신이 다루는 교의의 문제이다. 여기에 바르트의 신학이 지닌 첫 번째 특징, 즉 방대함이 발견된다. 둘째, 바르트의 신학이 지닌 깊이이다. 그의 신학은 방대하지만 이 방대함이 그 깊이에 대한 방해물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방대함은 깊이를 위한 출입문에 해당된다. 그는 성경의 특정 본문 주해에 임하면서 자신의 신학의 깊이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탕자에 관한 비유를 주해함에 있어서 바르트는 자신의 주해작업이 얼마나 신학적이며 교의학적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는 특정 본문의 주해는 결코 주해에 머무르지 않고 한 차원 더 깊이 나아간다. 이 깊이는 물론 기독론적으로 그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이 그의 신학이 기독론적 신학이라고 불리는 주된 이유이다. 바르트는 신학의 모든 주제에서 기독론적 깊이를 발견한다. 탕자 비유를 통해 그는 비유 깊숙한 곳에 숨어계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마치 광부가 광물을 캐내기 위해 깊은 탄굴에 들어가기를 마다하지 않듯이 기독론적 심원으로 깊숙이 추적해 들어간다. 바르트는어느 정도의 깊이에 머무르지 않는다. <칼빈의 신학>이라는 그의 저서를 살펴보면 이러한 신학의 깊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칼빈이라는 16세기 신학자를 연구하기 위해서 표면에 드러난 16세기 신학을 고찰하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심층에 자리 잡은 중세 로마 가톨릭 신학으로 파고 들어간다. 이 책의 대부분이 오히려 중세 로마교에 할애된다. 그렇지만 그 깊은 곳에서 그는 칼빈 신학의 핵심을 찾고자 노력한다. 여기에 바르트 신학의 두 번째 특징이 드러난다. 셋째, 바르트 신학이 지닌 독창성이다. 그의 신학의 독창성은 바르트를 바르트로 만들었으며 바르트의 신학을 20세기 신학의 최고봉위에 올려 놓았다. 그는 다른 사람을 모방하는 신학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창적 신학, 그야말로 '바르트의' 신학을 구현했다. 그렇다면 그의 신학의 독창성은 무엇인가? 이 독창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집중에서 출발하고 종결된다. 그는 1909년에 스위스의 작은 마을 자펜빌이라는 곳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했는데, 얼마가지 않아 자신의 설교가 전혀 그의 청중들에게 다가가지 않으며 호소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뼈아픈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신학이 인본주의의 신학이었으며 하나님을 놓친 신학이라는 엄청난 현실을 깨닫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돌아간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몸부림치게 된다. 이 몸부림의 결과로 주어지게 된 것이 바로 1919년에 발행한 <로마서주석>이었다. 이 책은 즉시 유럽의 신학계를 뒤흔들었으며, 이 책 한권으로 그는 괴팅겐의 교수로 초빙받게 된다. 엄청난 반향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말씀을 향한 그의 관심과 열정이 결국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 세상을 완전히 초월하신 전적 타자로서의 하나님, 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는 사실상 정통교회가 지금까지 수 천년 동안 추구해 온 신학의 본질중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것을 몰랐던 것일까? 그는 이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알았던 것이 자신의 목회적 삶에 반영되지도, 이를 지배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지닌 엄청난 영향력이 잘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신학이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지니게 되었고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선 것이다. 여기에 그의 신학이 지닌 세 번째 특징이 발견된다.

 

2. 바르트의 신학이 매력적인 이유

흔히 20세기는 바르트의 세기이었다고 말한다. 바르트는 20세기를 풍미한 20세기의 신학자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신학이 지닌 종교개혁적 뿌리를 찾아내었고 다시금 정통주의 신학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그의 신학은 또한 신정통주의 신학으로 불리워진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도 관련을 맺고 있다. 1914년에 1차 대전이 발발했으며 이는 유럽과 전세계에 걸쳐 엄청난 공포감과 위기감을 조성했다. 그의 신학은 이러한 시대적 위기의식 속에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이 무능한 신학이며 직면한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없는 신학임을 직시한데서 비롯되는 신학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바르트의 신학은 위기의 신학으로 불리워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련의 객관적 사실들이 그의 신학을 매력적인 신학으로 만드는가? 아니면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그의 신학이 지닌 방대함, 깊이, 그리고 독창성이 그의 신학을 매력적인 신학으로 만드는가? 여기에 대한 답을 필자는 나름대로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그의 신학이 지닌 매력은 헤겔의 변증법에 근거를 둔 변증법적 차원에서 비롯된다. 이는 이미 종교개혁자 루터의 신학에도 어느 정도 발견되는 신학방법론에 해당되지만, 바르트는 이를 전적으로 승화시켜서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론으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는 신학에서 건전한 균형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충분하게 탐지하고 있는 신학자이었다. 신학은 긴장 속에서 탄생하고 균형을 통해서 완성된다. 신학은 어떤 한 종류의 신학적 흐름이 등장하고 이렇게 등장한 흐름이 또 다른 종류의 신학적 흐름에 의해서 자신의 위치가 지닌 정당성이 평가받는 구도 속에서 흘러간다. 바르트는 자신의 신학, 위기의 신학, 말씀의 신학에 내재된 능력을 활용하여 자신보다 시대적으로 앞섰으며 자신의 신학 형성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자유주의 신학, 인본주의 신학을 여지없이 부인하고 이와 결별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독특한 신학방법론을 세워나갔다. 이는 철두철미하게 변증법적 신학의 흐름에 관한 것이다. 또한 내용적인 면에 있어서도 그의 신학은 변증법적이다. 바르트는 자신의 계시론과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지닌 양면성, 즉 신성과 인성을 변증법적으로 전개하면서 신학에서의 긴장과 균형을 유지해 나가는 독특한 신학적 방법론을 취했고 이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방법이 되었다. 둘째로 그의 신학이 지닌 매력은 그의 신학이 지닌 활력에서 비롯된다. 아마도 '활력'이라는 단어가 그의 신학이 지닌 진정한 멋과 매력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는 단어일 수 있다. 그러나 바르트의 신학에는 다른 신학이 지니지 못한 살아있는 기운이 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계몽주의의 산물로서 합리적인 신학이며 인간이 지닌 능력을 극대화하고 이를 찬양하는 반신본주의적 신학이다. 이는 사실상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정을 상실한 맥빠진 신학이다. 하나님을 지향하고, 그를 추구함에서 비롯되는 피조물의 피조물됨에서 비롯되는 뜨거움과 에너지를 상실한 신학이다. 이성을 지니고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은 이미 진화의 최고 단계에 도달한 존재이며 사실상 하나님을 논하나 그의 실제적 도움을 부인하는 신학이다. 이런 신학에는 만물의 주인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한 어떤 열정도 발견되지 않는다. 설사 있다하더라도 이는 다 식어버린 열정아닌 열정에 불과한 것이다. 바르트는 이런 신학적 분위기 속에서 탈피하고 이를 철저하게 부인하는 가운데 자신의 신학이 살아있고 활기를 지녀야 할 이유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찾은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금 공부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갈망했던 신학의 뜨거움을 비로소 회복하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이제 과거에 그가 발견하지 못했던 모든 것을 초월하는 놀라운 신적 확신이 나타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학이 그가 발견한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면 그것이 비록 반복되는 차원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저돌적인 차원을 지니게 된 것이다. 여기에 바르트 신학의 놀라운 매력이 발견된다. 그의 신학에는 야성미가 넘쳐난다. 마치 먹이를 놓치지 않고 추격하는 사자의 질풍노도와 같은 맹렬함이 그의 신학에서 발견된다. 그는 칼빈의 신학을 원시림에 비유했지만, 바로 자신의 신학에 다른 신학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신선함으로 가득찬 신학의 바람이 불어온다. 여기에 바르트 신학의 놀라운 매력이 숨겨져 있다. 저돌성, 야성미, 신선함, 이 단어들은 비록 바르트 자신이 사용한 단어들이 아니지만, 그의 신학이 지닌 놀라운 매력을 묘사하기에 어느 정도 유용한 개념들을 묘사하는 단어들이다. 바르트의 신학을 대할 때 인간에 의해 채색되지 아니한 원래 그대로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20세기인들을 매료시킨 그의 신학이 지닌 놀라운 힘의 원천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3. 바르트 신학의 비개혁주의적 모습

지금까지 우리는 바르트 신학의 긍정적인 단면들을 살펴보았다. 바르트 신학은 많은 장점들을 지닌 신학이다. 신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한 독창성을 지닌 신학이며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킨 엄청난 호 신학이다.

그렇다면 그의 신학은 과연 얼마나 개혁주의적인 신학인가? C. VanTil을 위시한 몇몇 신학자들은 그의 신학을 바르트주의로, 즉 기독교에 대항하는 새로운 종교로까지 폄하하기도 한다. 이들의 주장에는 바르트가 사실상 정통적 기독교의 신학을 변모시켜 자기 나름대로의 새로운 신학을 구상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강조는 사실상 그가 인간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 즉 내재의 가능성이 완전히 상실된 신학을 추구하도록 만드는데 이는 신학적 딜레마를 구성한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바르트가 제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접촉점이며 이 접촉점은 전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어서 믿음이라는 도약대를 사용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문제는 여기에서 드러난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에게 거의 자동적으로 믿음을 제공한다는 것인데 이는 결국 인간이 지녀야 할 믿음을 사실상 자의식에 근거한 인식으로 정의하도록 만든다. 이는 사실상 개혁주의 신학이 가르치는 믿음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G. C. Berkouwer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바르트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므로 거기에 상응하는 인간의 반응이란 사실상 없는 것이다. 인간의 역할을 최소화되어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신 것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인식하는 정도에 머무른다. 바르트의 믿음에 관한 이러한 이해는 요한 칼빈이 내세운 성령론적 특징을 지닌 믿음의 정의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칼빈은 믿음을 인간 내면에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파악한다. 그에게 믿음이란 성령의 인치심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호의를 그리스도 안에서 확신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를 차이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바르트에게 믿음이란 성령론적 역할이 최소화되거나 극소화된 상태에서 단지 인간의 인식 작용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을 가리키지만 개혁신학은 인간 마음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주어져서 인간이 실존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확신을 강조한다. 이러한 확신이 없는 믿음은 정상적인 믿음이 아니다. 바르트가 말하는 믿음이란 칼빈과 개혁신학에 있어서 하나의 견해이며 인식에 지나지 않는다. 칼빈에게 믿음은 견해와 인식을 포함하지만 이를 넘어서는 놀라운 지식이자 확신이다. 이러한 확신의 배경에는 성령 하나님을 위시한 삼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함께 한다. 바르트는 이 점에 있어서 자신이 가장 극찬하고 따랐던 칼빈의 진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것이 그의 신학에 나타난 비개혁주의적 신학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것은 바르트 신학의 주변부에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다. 하나님을 인간을 전적으로 초월한 존재이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에게 나타나신다. 바르트에게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해당된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사실상 바르트는 개혁신학신학의 진수에서 이탈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물론 하나님의 초월 또는 불가완해성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님의 현현 가능성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내주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믿음을 받아들인다. 비록 이 믿음이 그 자체로서는 도구에 불과하지만, 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주어질 때 이것이 더 이상 어떤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것이 된다. 이는 인간의 논리적 사고나 능력으로는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믿음을 소유하게 된다. 그래서 구원의 핵심 사안인 칭의도 성화도 결국 믿음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 점에 있어서 한스 큉이 <Justification>이라는 책에서 올바르게 지적했듯이, 사실상 개혁신학의 전통적 이해를 저버리고 오히려 가톨릭의 이해에 더 가까운 견해를 택하게 되었다. 이 점에 있어서 바르트는 비개혁주의적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비성경적인 견해를 지니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바르트주의는 개혁신학의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