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수치스러운 혼돈 (a most shameful chaos): 동성애에 대한 칼빈의 견해


 

 

 

지난 28일 서울광장에서는 동성애자들의 축제인 퀴어 퍼레이드가 개최되었다. 주최측 추산 3만여명이 운집하는 대규모 행사이었고 많은 기독교 단체들이 이를 반대하는 행사를 개최하여 이 지역은 상당한 교통 혼잡이 발생했다고 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한국의 많은 동성애자들이 소위 ‘coming out'을 시도하고 있음에 대한 단적인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 언론은 우리 사회에서 어느 정도 부정적 뉘앙스를 지닌 ’동성애자‘라는 일반적 단어 대신에 ’성소수자‘라는 다소 생소한 단어를 사용하여 이들의 축제에 대해서 보도했는데 우선 이 단어의 사용부터 일반인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소수자 (minority)’가 보호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 사회 일반 시민들에게 쉽게 어필할 수 있는 개념으로 다가온다. 따라서 이들에게도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자신들의 성적 편향과 관계없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는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다소 긍정적인 이미지를 제공하려는 포석이 깔린 표현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 동성애자가 이성애자들과 동등한 권한을 누려야 한다는 차원에서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동성 간의 결혼이 합법화된 것을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의사를 표현한 바 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자 칼빈은 동성애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아주 단호하고 분명한 성경적 입장을 지지했다. 소돔과 고모라에 나타난 천사를 환대했던 롯의 이야기가 동성애의 문제로 직결되는 것을 보여주는 창세기 19장 4절에 대한 주석에서 칼빈은 동성애를 ‘가장 수치스러운 혼돈 (plus quam deforme chaos, CO 23,268)’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대한 반항적 위반이라고 선언하였다. 하나님께서 6일째 되는 날 인간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음을 창세기 기사는 분명히 증거한다. 창조에 관한 기사를 전설로 간주했던 20세기의 대표적 신학자 칼 바르트 (Karl Barth)조차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와 지으신 이 사실에서 하나님의 형상 (?)을 정의하고자 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사실에서부터 남녀 사이의 결혼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이며 이 결혼의 테두리 안에 정상적인 남녀 사이의 성관계가 성립된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기고 이성애가 아닌 동성애를 추구하는 것은 적어도 칼빈에게는 많은 종류의 죄악을 한꺼번에 뒤섞어 놓은 것과 다를 바 없는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칼빈은 창세기 19장 주석을 통해서 전혀 의심의 여지없이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 입장을 견지한다. 동일한 성경본문을 해석하면서 교부 터툴리아누스 (Tertullianus)는 동성애에 대해서 상당히 진보적인 (?) 입장을 취한 것으로 미국의 동성애 연구가 존 보스웰 (John Boswell)에 의해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칼빈의 입장은 상당히 강경하다. 이 본문 주석에서 칼빈에 의해 사용된 표현들 (e. g. ‘극도의 야비함’, ‘비열하고 극악한 야만성’ 등)은 사용된 부정적인 평가를 넘어서서 동성애를 그 자체로서 이미 하나님의 엄중한 보복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여기에서 칼빈의  단호함과 결연함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동성애를 인정하려는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고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자 한다면, 관용과 이해심이 결여된 것이라는 비판이 가해질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yes와 no를 철저하게 분별할 줄 아는 윤리적 이해력과 결단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동성애가 하나님이 제정하신 질서를 무너뜨리고 혼란을 가중시키는 가증스러운 행위임이 분명하므로 어떤 경우에도 기독교인의 삶에서 용납될 수 없는 비윤리적 행위임을 천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령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유순함(docility)을 경험했을 때, 칼빈은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감으로 가득한 마음을 지니게 되었고, 외적으로는 이 말씀에 대한 철두철미하고 정확한 순종심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칼빈의 경건심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두려움의 차원을 의미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를 자신의 구체적 삶 속에서 행동으로 옮기려는 실천적 경건심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성애를 인정하려는 전 세계의 일련의 움직임이 우리나라에도 곧 거센 파도처럼 몰아치게 될 것이다.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감을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인정하고 이러한 경외감을 삶 속에 구현하기를 추구하는 개혁주의자들은 동성애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시는 ‘가장 혼란스러운 혼돈’의 상태로 치닫는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은 사실상 다양한 종류의 죄악들이 한꺼번에 뒤섞이는 무서운 혼란의 상태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동성애를 용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일부를 지키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안이한 사고를 버려야 한다. 동성애가 뿌리내릴 수 있는 우리 주변의 다양한 외적 요인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투구를 착용하고 성령의 검을 지니고 이를 이겨내고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지혜가 더욱 간절하게 요청된다. 지금까지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무관심으로 일관해 왔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돌이켜서 칼빈의 태도로부터 이를 철저하게 배격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한 단면임을 배워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