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토마스 뮌쩌의 급진적 사회혁명운동

  지금까지 우리는 비교적 온건한 재세례파 운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제 이들과는 다른 형태의 과격한 사회혁명사상을 가졌던 토마스 뮌쩌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토마스 뮌쩌의 생애와 그 시대1)
  교회개혁 하면 우리는 으레 루터나 쯔빙글리나 칼빈을 생각하지만 이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여러 개혁자들이 있었다. 토마스 뮌쩌(1488?~1525)는 그 많은 개혁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 16세기 인물 중 그만큼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사람도 없으리만큼 그는 세찬 비난을 받아 왔고 19세기 이후에는 그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시도되었다.
  토마스 뮌쩌는 1488년 독일 삭소니 지방의 하르쯔(Harz) 산록에 있는 작은 마을인 스톨베르크(Stolberg)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초기생애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으므로 뮌쩌의 가정적 배경이나 생활환경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전혀 없다. 그의 출생 연도에 대해서도 다른 견해들이 많고 어떤 이는 1488년에서 1491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현존하는 뮌쩌에 대한 가장 오래된 자료는 그의 라이프찌히 대학 등록 서류인데 여기에는 “Thomas Müntzer of Quedlinburg"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가 라이프찌히 대학에 입학할 때인 1506년은 인문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때였다. 그는 이러한 인문주의적인 학문 분위기에서 그의 젊은 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가 이 대학에서 얼마동안 수학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1512년에는 브란덴버그(Brandenburg)의 선제후였던 요아킴 1세에 의해 설립된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입학하였다. 이 대학은 인문주의 운동이나 새로운 학문 분위기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이 대학 신학부의 빈피나(Conrad Winpina)교수는 존 테첼(Johnne Tetzel)의 면죄부 판매를 지지했고 루터의 개혁운동을 반대하던 인물이었으니 개혁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다. 이 대학에서 뮌쩌는 희랍어와 히브리어 그리고 라틴어를 배웠다.
  그가 언제 성직자가 되었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1514년 5월 6일 부라운슈바이크(Braunschweig)에 있는 성 미가엘 교회의 교구신부로 초청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할레(Halle)시 근교에 있는 프로이제(Frohse)의 작은 수도원으로 갔다. 이곳은 학문 연구에 몰두 할 수 있는 적절한 곳이었다. 이곳 수도원에서 수도원 규율에 메이지 않는 신부(secular clergy)로 있으면서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1)
  뮌쩌가 이곳에 있을 때 루터의 95개조가 발표되었는데 루터의 이리한 도전은 뮌쩌에게 상당한 충력을 준 것으로 보인다. 1518년 가을 뮌쩌는 루터를 만나고 그의 개혁운동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비텐베르크로 갔다. 이때의 만남은 두 사람의 최초의 상봉이었고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루터느 이때 뮌쩌의 진지한 학구열과 뜨거운 정의감, 그리고 행동주의적 기상을 발견하고 좋은 인상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이때부터 뮌쪄는 교회개혁의 이상을 가지고 순례자의 삶을 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519년에는 루터와 엑크(Eck)와의 공개토론을 보기 위해 라이프찌히에 가기도 했고 그해 말경에는 보이디쯔(Beuditz) 수도원으로 갔다, 이곳에서 그는 독서에 몰두하였고, 신비주의 사상을 접하는 기회가 됐던 것 같다. 이 수도원은 중세의 대표적인 신비주의자였던 성 버나드(St. Bernard)계 수도원으로서 중세적 신비주의, 곧 피오레의 요아킴(Joachim of Fiore)의 묵시적 종말 사상을 접했던 것도 이 때였던 것 같다. 13세기를 전후하여 유럽에 풍미했던 이 종말 사상은 전쟁과 기아, 흑사병과 같은 처참한 현실 앞에서 배태된 사상이었다. 특히 타울러(Tauler)의 신비사상과 접할 수 있었던 기회가 됐다. 그는 「독일신학」(Deutsch Theologia)과 타울러의 저작들, 그리고 요아킴의 「예레미야 주석」을 읽고 교회개혁을 넘어서 혁명적 사회 개혁사상을 확립했다. 이곳에서 유대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의 역사서와 어거스틴의 저서와 서간문 등을 접하기도 했다. 뮌쪄가 이때 요세푸스의 저작을 읽었다는 점은 뮌쩌의 생애 자취를 통해서 볼 때 상당한 상관관계를 보여 준다. 로마의 압정에 대한 유대미족의 끈질긴 항쟁과 저항정신은 뮌쪄로 하여금 과격한 혁명사상의 이데올로기를 갖게 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뮌쪄의 삶에 새로운 전기를 부여한 것은 1520년 그가 쯔비카우(Zwickau)에 도착한 이후로 보인다. 그는 루터의 추천으로 1520년 5월 쯔비카우의 성메리 교회에 임시 설교 목사로 부임하였고 이때로부터 그의 사상을 변혁이념으로 변모되어 갔다.
  쯔비카우는 투링기아(Thuringia) 분지와 보헤미아의 산록 사이에 놓여 있는 매력적인 도시로서 표면적으로는 번성하는 도시였으나 실상은 사회적 혁명의 온상이 되기에 충분한 도시였다. 당시 이 도시 주변에는 은광이 산재해 있었으므로 잡다한 직업인들이 모여들어 혼란을 야기하였고, 은광의 개발로 화폐가치는 하락하였으나 반대로 소비용 물가는 상승일로에 있었다. 시당국은 세금을 인상하였으며 이곳 방적업은 파산하여 실업자가 급증하였다. 이때 보헤미아 지방에서 이주하여 온 후스파(Hussits)와 이태리 북부지장에서 이주해온 왈도파(Waldensians)들이 실업자군과 합세하므로 이곳의 사회상은 이름 그대로 위기였다. 그들은 보다 낳은 사회, 보다 안정된 삶을 누리려는 본능적 욕망을 갖고 있었으나 현실적 상황은 그 반대였다. 뮌쩌가 쯔비카우에 있을 때 이곳에는 세 집단의 교회가 있었다. 로마 가톨릭교회, 루터파, 그리고 스토크(Nicholas Storch)가 영도하는 과격파였다. 루터파에는 주로 귀족들과 중산층의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스토크파에서는 광산노동자들과 직물공 등 비교적 하류층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루터파에 속한 교회에 부임하여 비교적 온건한 설교를 했으나 이 지방 하층민과 노동자들을 접하면서 그의 설교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루터파에 속해 있었으나 점차 스토크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스토크는 본래 쯔비카우에서는 상류층에 속하는 자였으나 급작스럽게 번창해가는 광산업 때문에 파산당한 일로 현실사회에 대한 극단적 반감사상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반감은 그로 하여금 과격한 개혁운동자로 이끌어 갔던 것이다. 스토크는 열정적 개혁운동과 천년왕국사상을 통해 당시 하층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뮌쩌는 스토크와 접촉하며 소위 ‘쯔비카우의 예언자들’(Zwickaw prophets)로 불리워졌고 설교 내용도 과격해지기 시작하였다. 결국 뮌쩌의 급진사상이 문제가 되어 시 당국은 뮌쪄를 심문하려고 소환장을 발부하였으나 그는 응하지 않았다. 뮌쩌는 많은 하층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이들의 세력이 확대되어 가자 시 의회는 무력을 사용하여 뮌쩌를 지지하는 66명의 시민을 검속하는 한편 뮌쩌의 해임을 선포하였다. 이때가 1521년 4월이었다. 이 같은 사상적 전화 때문에 뮌쪄는 루터와 결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1521년 4월 16일 밤 쯔비카우시를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날은 마침 루터가 보름스제국의회에 출두하는 날이기도 했다.

  뮌쪄는 보헤미아의 프라그로 갔다. 여기서 그는 루터의 제자로 인식되어 크게 환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곳에서 후스가 처형된 후 온건한 성격을 지지하던 우트라퀴스트와는 달리 과격한 혁신을 주장하던 타보르파(Taborties)와 손을 잡고 한층 더 과격한 개혁운동에 가담하였다. 1521년 11월 1일에는 마치 루터가 95개조의 항의문을 비텐베르크대학 게시판에 붙였던 것처럼 소위 ‘프라그 선언서’(Proague Manifesto)를 여러 교회 문에 붙였다. 이 선언서에는 그는 민중들의 가난은 사제들, 지배계층의 압제의 결과라고 보고 사제제도를 비판하였고 기록된 성경보다는 성령의 내적 경험의 우월성을 주장하였다. 이 선언서는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와 루터파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뮌쩌는 보헤미아의 뿌리 깊은 민족적 저항정신을 이용하여 전 프라그 시민을 루터파적 개혁에서 과격한 개혁으로 전환시키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1522년 12월 뮌쩌는 관원의 체포를 피해 보헤미아를 떠났다.
   1523년 봄에는 수도원을 빠져나온 게르센(Ottilie von Gersen)과 약혼하였고 알스테드(Alstede)시의 요한교회에 부임할 때까지 가난과 굶주림의 방랑생활을 계속하였다. 
   알스테드에 부임하여 그는 대담하게 예배의식을 개혁하고 독일어로 예배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과격한 개혁사상 때문에 설교 제한조치를 받았고, 이 도시에서 일어난 소동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지배자와 공공연한 싸움을 기피해 왔으나 이제는 전제군주들과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교황보다는 봉건 제후들이 싸움의 대상이 되었고, 복음적인 교회개혁 운동보다는 사회체제의 근본적 변혁을 꿈꾸는 혁명적 사상을 진일보 하였다. 그는 봉건체제의 변혁운동을 통하여 자기 이념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런 그의 사상 때문에 1524년 8월 23일 알스테드를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로부터 그는 농민전쟁에 가담하게 된다.


독일에 있어서의 농민전쟁은 종교개혁시대에 비로소 일어난 운동이 아니라 이미 100여년  전부터 계속되어 왔던 것으로서 농민들의 불안정과 불만이 농축된 대규모 민중봉기였다. 농민들은 노동하는 짐승과 같았고 중과세에 짓눌려 있었으며 혁명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독일 남부의 농민들에게는 더욱 심각했다. 1524년 6월 지방영주들에 대한 작은 반란을 계기로 농민반란이 일어나 1525년 2월에는 독일의 서부, 남부지역으로 확대되었고 역사상 보기 드문 대규모의 농민전쟁(Bauernkrieg)으로 발전되었다.
   그해 2월 27일부터 3월 1일 사이에는 쉬바비아(Swabia) 농민들에 의해 제시된 12개조의 요구조건은 이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다. 이 12개 조항은 재세례파 인물인 휴프마이에르(Balthasar Hubmaier)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온건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2) 그 내용은 이미 본서 제2장에서 언급한 바 있다.
   뮌쩌는 농민전쟁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그는 종말론적 희망 속에서 인간의 평등과 재산의 공유와 균등한 분배를 역설하였고 이와 같은 임무를 위해서는 폭력의 사용을 적당한 것으로 보았다. 결국 그의 개혁의 의지는 사회혁명적 의지로 전환되고 있었다. 그는 슈바벤(Schwaben), 튀링겐(Thueringen), 뭘하우겐(Muhlhausen)등 여러 도시를 왕래하며 농민들의 단합과 결속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옛 선동지역인 튀링겐과 만스펠드(Mansfeld)로 돌아와서 혁명군을 조직하고 그 선두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루터는 농민들의 12개조의 서명을 거부하고 ‘평화에의 권면: 슈바비아의 농민들이 채택한 12조항에 대한 대답’(An Admonition to Peace: A Reply to the Twelve Articles of the Peasants in Swabia, 1525,4) 이라는 권고문에서 교회영주들의 학정을 비난함과 동시에 농민들의 정당한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강력히 촉구하였다. 한편 농민들에 대해서는 반란이 옳지 못하다고 경고했다. 이 글의 전반부는 농민혁명의 책임이 우선 국가에게 있는 점을 지적하고 이 제후들이 복음을 모독하였고 농민들을 착취했다고 비판했다. 또 농민들의 봉기와 뮌쩌같은 혁명적 개혁자의 등장은 제후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보았다. 후반부에서는 농민들을 향하여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로마서 13장에 기초하여 국가 혹은 세속권력은 하나님이 그의 섭리를 위해서 제정하신 신적 기관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국가 권력에 대한 항거는 곧 하나님의 권위에 항거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루터는 통치자가 아무리 약해도 이것이 혁명을 일으킬 원인이 될 수 없다는 보수적 입장을 취했다. 국가자체가 하나님의 칼을 들었으니 지배자 계급의 악행은 이 국가의 칼에 의해서 처단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따라서 루터는 하나님이 주신 이 세속통치권을 박탈하려는 농민들도 강도요 농민들을 수탈하고 착취하는 국가의 관료들도 강도라고 하였다. 끝으로 루터는 교회개혁이란 혁명이 아니라 설교된 말씀의 능력에 힘입은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농민전쟁은 복음의 진수와 너무 거리가 멀다는 점을 지적하였다.3)


그러나 뮌쩌는 농민전쟁의 지도적, 주도적 인물로서 1525년 4월에 뭘하우젠에서 알쉬테드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만일 여러분 가운데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이, 단지 세 명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구하는데 전심(專心)한다면, 십만 명이라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진합시다! 때가 왔습니다! 흉악한 자들은 개와 같이 놀라고 있습니다. 형제들에게. 안심하고 증언을 지키도록 호소하십시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창세기 33장에 있는 것같이, 비록 에서가 친절한 말을 할지라도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 사악한 자들의 고민을 보십시오! 그들은 친절한 말로 애원하는 아이들 같이 울며 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명기 7장에서 모세를 통하여 명하시고 또 우리에게도 계시하신 바와 같이 불쌍히 여기지 마십시오. 촌락과 도시에서 특히 광부들과 그 밖의 쓸만한 사람들에게 호소하십시오. 우리는 앞으로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 앞으로, 앞으로 불이 뜨거울 때에 앞으로 나아갑시다. 여러분의 칼이 식지 않게 하십시오. 힘을 덜어서는 안 됩니다. 쇠를 때리십시오! 니므롯의 모루에서 쿵, 쾅, 때리십시오! 그들의 탑을 꺼꾸러뜨립시다!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은 여러분은 사람으로서의 공포를 벗어 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군주로 있는 동안은 하나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할 수 없습니다. 앞으로, 앞으로 어둡기 전에 앞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가십니다. 그의 뒤를 따릅시다. 하나님 뒤를 따릅시다.
                                     믿음 없는 자들에게 대적하는 하나님의 종 토마스 뮌쩌로부터
                                                                                                             
(서명)

또 1525년 4월 29일에는 프랑켄하우스젠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기도 했다.


여러분은 아무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나의 가난한 백성은 힘이 더 강해지리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그들을 공격할 것입니까? 그러므로 대담하고 하나님만을 믿으십시오. 그는 여러분의 적은 집단에 여러분이 믿는 것보다 더 큰 힘을 주실 것입니다. …… 친절한 말에 넘어가서 유약한 동정을 하지 마십시오. 이와 같이 실행하면 여러분의 운동은 성공할 것입니다.
                                                   
뭘하우젠 들판에 있는 그리스도인 단체로부터. (서명)


루터의 평화에의 권고가 있었으나 농민들의 분노의 행동은 식어지지 않고 삭소니 지방까지 파급되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자 루터는 1525년 5월 ‘강도와 살인을 일삼는 농민에 반대하여’(Against the Robbing and Murdering Hordes of peasants)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루터는 제후들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악을 제거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정치질서를 파괴하는 폭동은 용납할 수 없다면 칼로써 폭도(농민)들을 진압할 것을 촉구하였다. 심지어는 미친개는 몽둥이로 다스려야 한다는 비유를 들어 무력진압을 촉구하였다.
   용기를 얻은 제후들은 루터파와 가톨릭과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1525년 봄 농민에 대한 무력 탄압이 시작하였다. 어떤 조직이나 기초적 훈련 없이 싸웠던 농민들은 도처에서 영주군에 의해 숙명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1525년 5월 15일 프랑켄하우젠(Frankenhausen)에서는 1만 명에 달하는 헷세(Hesse), 작센(Saxory) 및 부룬스빅(Brunswick)의 연합군(국가축)에 의하여 제압되었다. 이때에 5천 명 정도가 들판과 거리에서 죽었고, 300명은 법정에서 참수되었다. 반란의 도시 뭘하우젠은 1525년 5월 19일 함락되었다. 이렇게 되어 농민전쟁에 희생된 사람은 10만 명에 달했다.
   전투가 막바지에 달했을 때 뮌쩌는 어떤 집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어 있다가 체포되었다. 지독한 고문을 받고 사기가 빠진 뮌쩌는 뭘하우젠에 있는 친구들과 아내와 자식들에게 더 이상 정치당국에 대하여 노여워 말며, 더 이상 무죄한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마지막 편지는 썼다. 그리고는 1525년 5월 27일 처형되었다. 그의 시체는 반란을 꾀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광장에 있는 기둥에 매달아 놓았다.


뮌쩌의 사회혁명사상
우리는 앞서 언급한 바처럼 기독교적 메시아니즘이 사회혁명운동으로 변한 경우를 뮌쩌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뮌쩌의 혁명사상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사상은 교회사의 위기마다 나타났고 또 유럽에서 모든 혁명의 숨은 원동력이기도 했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가 속히 오리라는 기대가 교회 내에서 압도적인 힘을 얻을 때마다 개혁 혹은 혁명사상은 싹텄던 것이다.
   뮌쩌의 생의 여정에서 발견되는 한 가지 특징은 그가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흡사 에라스무스(Erasmus)와도 같았다. 뮌쩌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하여 자신의 안락을 구하기보다는 방랑의 생을 살면서 메시아니즘적 천년왕국 건설을 위한 끊임없는 사회개혁적 생을 살았다. 
   그의 삶 속에 투영된 뚜렷한 사상은 신비주의적 혁명 사상이었다. 신비주의 사상은 그의 영성주의(Spiritualism)에 기초하여 타울러 등 중세 신비사상과 요아킴의 묵시적 종말사상은 항상 사회혁명을 꿈꾸기 때문에 심지어는 폭력을 통해서라도 천년왕국을 앞당기려고 했다. 다시 말하면 뮌쩌는 그가 꿈꾸는 이상사회를 참고 기다리기 보다는 폭력을 통해서라도 앞당기려 했는데 이것이 그의 사회혁명적 행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즉 천년왕국의 실현은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체제의 개혁, 정치, 사회의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류터(R. R. Reuther)는 이와 같은 뮌쩌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이며 외향적인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4)

뮌쩌는 기록된 말씀, 곧 객관화된 외적인 말씀(external word)보다는 성령이 우리에게 직접 주시는 계시 곧 내적인 말씀(inner word)을 더욱 강조하였다. 곧 성령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믿는 자의 영혼 속에 말씀하신다는 주장이다. 이런 점에서 뮌쩌는 초월적 차원을 확보하고 있으나 기록된 말씀과 선포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계시는 소홀히 하였다.5) 루터가 로마 가톨릭의 교회 절대주의에 반대하여 성경적 절대주의를 주창하였다면, 뮌쩌는 성경절대주의에서 떠나 성령주의로 전환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영성주의 혹은 심령주의(Spritualism)로서 재세례파를 포함한 급진적 종교개혁자들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성령의 내적 계시 혹은 내적인 말씀을 경험한 사람들은 택함을 받은 사람으로서 이들로 구성되는 교회가 참된 교회이며 이들은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그리스도의 원수들, 곧 로마 가톨릭교회, 세속 권력, 그리고 이 세속권력에 도움을 받아 교회개혁을 이끌어 간다고 보는 루터의 개혁운동을 쳐부순 후 성경이 말하는 종말론적 소망을 이 땅위에 세워가야 한다는 일종의 실현된 종말 사상을 가졌던 것이다.
   뮌쩌는 초대교회의 공동체적 생활양식(물질의 공동사용과 분배, 행2:44-47, 4:32)을 천년왕국과 일치시켰고, 이 약속된 천년왕국이 더디 온다면 선택받은 이들이 사회혁명을 통해서 앞당겨야 한다고 믿었다.

뮌쩌의 사상의 출발점은 신비주의였는데 문제는 어떻게 그의 신비주의 사상이 사회혁명적 사상으로 발전했는가?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비주의적 경건의 내면을 이해해야 한다. 신비주의란 신(神)과의 직접적 만남을 체험하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모든 중간매체를 거부한다. 그래서 교회제도, 의식, 심지어는 신적 계시의 역사적 문서인 성경까지도 배격하려고 한다. 그래서 신비주의는 과격성을 지니고 있고 하나님과의 직교를 방해하는 것을 제거하는 데는 폭력적 성격을 띠게 된다. 다시 말하면, 신비주의는 기존 교회의 여러 제도나 의식 등이 신께 자유로이 접근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확신과 결합될 때 혁명적 변혁사상을 동반하게 된다. 
   이와 같은 경우를 14세기의 “자유 성령 형제단”6)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고,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의 쯔비카우의 예언자들이나 호프만(Melchoir Hoffman), 뮌스터(Münster) 사건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물론 신비주의가 사회혁명으로 발전되는 단계에는 사회불만적 요소를 무시할 수 없다. 이것 또한 혁명적 사회변혁사상의 잠재력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작센(Sachsen)과 트링겐(Thüringen)의 광산지대에서, 그리고 알쉬테드(Allstedt), 쯔비카우(Zwickau), 뭘하우젠(Mühlhausen)에서 신비주의로부터 혁명으로 넘어가는 운동에는 사회적 불만이 중요한 동기였던 것이다.
   정리해서 말하면 뮌쩌의 개혁운동은 루터처럼 ‘개혁된 교회’를 꿈꾸지 않고 ‘새로운 교회’를 꿈꾸었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 내에 나타난 잘못과 오류를 제거, 시정, 정화하여 교회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뮌쩌는 이와 같은 온건한 개혁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교회를 꿈꾸고 있었다. 1521년 11월 1에 발표한 뮌쩌의 ‘프라하 선언’은 이와 같은 정신을 잘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그 택하신 자들에게 특히 이 나라에서 놀라운 일을 하실 것이다. 새 교회는 여기서 설립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이 수호되도록 모든 사람이 돕기를 나는 호소한다. 나는 엘리야의 정신으로 누가 바알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가르쳤는가를 지적하겠다. 여러분이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여러분이 내년에 회교도들에게 죽임당할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실 것이다. 나는 내가 하는 말을 알고 이 말이 참되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예레미야가 부득이 참은 고난을 쾌히 받으려 한다.7)


이때로부터 2년 반 후인 1524년 7월 22일에 세무관리였던 짜이제(Hans Zeyse)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새로운 교회의 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목을 내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집짓는 사람이 버릴 것입니다.8)

즉 새로운 교회를 위한 급진적 개혁운동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각오였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뮌쩌는 신비주의적 종말사상을 가진 혁명적 개혁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뮌쩌의 개혁운동을 죠지 윌리암스(G. H. Williams)는 ‘급진적 개혁’(the Radical Reformation)으로 베인톤(R. Bainton)은 ‘좌익 개혁’(the Leftwing Reformation)이라고 불렸고 스미린(M. M. Smirin) 등 사회주의적인 역사가들은 그의 개혁운동을 ‘민중종교개혁’(Volksreformation)이라고 불렀다. 뮌쩌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그가 출현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당한 평가일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소외된 계층과 가난한 이웃에 대한 기독교적 자애를 구체화 해가는 일이 복음적인 사회개혁운동의 기초가 될 것이다.




1) T. Müntzer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기본사는, T. Müntzer, Sein Leben and Seine Schriften(Otto H. Brandt의 서문과 함께 Jena에서 1933년 출판됨)이며 Thomas Müntzer에 관한 국내 자료로는 이영헌, “Thomas Müntzer의 혁신운동,” 「교회와 신학」13집 (장로회 신학대학, 1981), 113-146; 이형기, “Thomas Müntzer와 농민전쟁,”「종교개혁 신학사상」, (장로회 신학대학, 1984), 203-228; 홍치모, 「종교개혁사」, (성광문화사, 1977), 101-119
1) Gordon Rupp, Patterns of Reformation, London; 1969, 157-162
2) Document Illustrative of Continental Reformation, ed. by B. J. Kidd, 174~77. 3) 이형기, 208.
4) R. R. Reuther (서남동역), 「메시아 왕국」, 한국신학연구소 (서울: 1982), 18.
5) 이형기, 206.
6) ‘자유성령형제단’(The Brethren of the Free Spirit)과 그들의 혁명적 요소에 대해서는, Norman Cohn, The Pursuit of the Millenium (New York, Oxford, 1957), 149-185를 참고하라.
7) T. Müntzer, 61. E. Benz, 62에서 중인
8) Müntzer,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