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재세례파의 교의와 사상
지금까지 우리는 재세례파의 역사와 지도적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재세례파는 삼위일체교리, 유아세례 등에 있어서 개혁주의와 견해를 달리하지만 이와 같은 오도된 교리나 신학에 대해서는 지면관계상 생략하고 재세례파 운동의 이념 혹은 개혁정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근본적인 문제
재세례파의 근본이념은 16세기 당시의 국가 교회(State-church)는 신약교회 원리에서 떠난 타락한 제도를 보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원시교회로 돌아가야 한다는 복귀개념 속에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베인톤은 “리포메이션(Reformation)이란 말은 루터의 개혁운동을 지칭하는 말이라면, 개혁파(Reformed)란 말은 쯔빙글리나 칼빈의 개혁운동을 지칭하고, 회복(Restored)이란 말은 재세례파의 이념이나 사상 혹은 개혁운동에 대한 포괄적인 표현이라”고 했다.1) 그들은 신약성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복귀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원시교회는 오직 진실된 신자들로 구성되었고 교회와 국가가 결합되기는커녕 도리어 박해받고 경멸당하고 거부당하는 순교자의 교회로 파악하였다. 그래서 저들은 교회는 국가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국가교회 혹은 제도교회(Established church)로부터 독립을 이루려는 일종의 자유교회 운동이었다. 재세례교가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재세례를 주장한 것도 국교회로부터의 분리의 논리적 결론이었다. 이것은 성인 세례 혹은 신자의 세례를 실시함으로서 국가교회 체제를 극복하려 했던 것이다.

교회관
교회의 복귀운동은 재세례파의 핵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교회관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들은 신약성경 시대와 콘스탄틴 이전 시대의 교회를 참되고 순수한 교회로 보고 이 시대적 교회에로의 회복을 의도하였다. 그래서 리텔(Franklin Littell)은 이를 ‘원시주의’(Primitivism)라고 명명하였다.
   재세례파는 교회의 타락은 교회가 국가와 타협, 야합하여 교회의 독립성을 누리지 못한 국가교회제도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이들은 루터나 쯔빙글리나 칼빈이 비록 교회와 국가 간의 분리를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개념상의 분리이지 실질적 분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저들은 여전히 중세적이며 로마가톨릭과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재세례파는 교회의 타락은 4세기 곧 콘스탄틴 시대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콘스탄틴 황제 이후의 교회와 국가 간의 타협 혹은 결합을 교회 타락의 가장 중요한 징표로 보았다. 이 타협을 통해서 교회는 더 이상 신자의 자발적인 모임이기를 거부하고 국가적 의식(유아세례)이나 강압과 무력정복에 의한 집단적 개종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저들은 교회와 국가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했던 것이다. 세바스치안 프랑케(Schastian Frank)나 카스파 쉬웬크펠트(Caspar Schwenkfeld)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황제권의 개입의 결과로 영적 자유가 침해되었다고 보았다.
   재세례파가 말하는 타락한 교회의 두 번째 표징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수행된 전쟁이라고 보았다. 폭력은 어떤 이유나 경우를 막론하고 모두가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되며 또 무력을 사용하여 종교적 자유를 통제하는 것은 분명한 타락의 징표로 보았다. 그래서 저들은 무저항주의와 절대평화주의를 견지했던 것이다.
   재세례파가 보았던 교회타락의 세 번째 표징은 삶과 예배에 있어서 형식주의(dead formalism)였다. 내적 진실성보다는 의식, 외적 웅장함 등 제도화된 교권체제는 교회가 타락한 증거라고 보았다. 그래서 저들은 단순한 의식과 간략한 성찬식 거행을 시행했다.


재세례파는 교회는 믿는 자들의 자의(自意)에 의한 모임이어야하며, 국가나 권력의 통제나 간섭으로부터 철저하게 독립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 ‘믿는 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를 통해 구성된 회중은 형제들(Brotherhood of believers)이며 이 신자들의 순종을 강조하였다. 성경을 통해서나 혹은 공동체 안에서 일단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순종하는 일 뿐이라고 보았다.
   이상을 살펴볼 때 재세례파는 당시 자연스럽게 수납되었던 국가-교회 제도를 거부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국가와 구별된 전적으로 중생된 자의 모임이어야 했다.


세례관
중생된 자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는 고백된 신앙을 토대로 하는 신자의 세례관에 기초한다. 이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새로운 생활을 할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주의와 로마 가톨릭 사이의 가장 명확한 경계선이 성경의 권위라고 한다면 재세례파와 개혁주의자들 간의 경계선은 ‘신자의 세례’라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지각이 없는 유아들은 교회의 정식 회원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유아세례는 인정될 수 없다고 보았다. 이들에게 있어서 신자의 세례는 제자로서의 삶과 교회에 대한 관점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재세례파는 이 당시 유아세례란 국가와 교회가 결합한 상태에서 국가적 의식으로 행해졌으며 이것이 국가교회의 특징이라고 파악하였다. 모든 유아들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아세례에 대한 거부는 시민적 종교에 대한 거부와 결합되었다. 교회는 시민사회의 종교적 규약(sanction)이 아니라 세계와 사회의 현 체제에 대립하는 새로운 피조물로 이해한 것이다.
   그들은 할례와 세례를 동일시하는 것을 부인하고 할례에서 유아세례를 유추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보았다. 또 이들은 성경에서 유아세례의 근거를 찾을 수 없고, 이것은 교황에 의해 창안된 것으로 보아 거부하였다. 세례는 교육, 믿음, 회심을 거쳐야 하는데 이런 것은 유아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인의 결단 없이 이루어지는 유아세례는 무효이며 따라서 성인이 된 후 다시 세례를 받아야 했다. 이점은 1527년에 작성된 신앙고백문서인 슬라이타임 신앙고백(Schleitheim Confession)에도 명백히 드러나 있다.


세례는 회개를 배우고, 생이 변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의 죄가 도망하여 진 것을 진실로 믿는 자들.... 그와 함께 장사되고 그와 함께 다시 살줄을 믿고 원하는 모든 자들에게 반드시 시행되어야 한다..... 이 의미에 의하여 로마 교회의 극악한 교훈인 모든 유아세례는 배척되어야 한다.


그들은 세례는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는 주장을 거부하고 유아는 물세례와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믿는 자의 세례’는 회심의 표로서 교회 회중이 되는 데 필수조건인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을 가리켜 재세례파(Anabaptists, Rebaptizers, Wiedertaufer)라고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들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위스 형제단에게 있어 세례란 전통적 의미에 있어서의 성례라기보다 일차적으로 제자로서의 순종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세례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회개하고 그의 마음이 변화하며, 그 결과로 새로운 생을 살아가기 열망하는 자에게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휘브마이어에게 있어서 세례는 “공적인 신앙고백이며, 내적인 신앙의 증거”였다. 그러므로 세례에 있어서는 회개와 함께 신자의 순종행위가 수반되는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유아세례를 반대하였으며,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 그 누구도 어린아이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았음을 지적하였다.
   필그림 마르펙은 한걸음 더 나아가 할례는 옛 언약의 표이며, 언약 할례는 중생한 자만이 받을 수 있고,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결과이며, 따라서 믿음 없이 받는 세례는 세례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재세례파의 성경관, 가견적 교회관, 제자관은 세례에서 그 중심점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세계관은 재세례파 운동의 뚜렷한 표식이 된 것이다.

국가관
재세례파는 국가는 “이 세상 나라”(the kingdom of this world)에 속했다 하며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분리주의적 입장을 취하였다. 이들은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려는 것은 소위 그리스도의 나라와 이 세상나라를 구분하는 두 왕국 개념에 기초한 것으로서 교회와 국가(세상)를 절대적 대립의 관계로 보고 있는데 이것이 교회관과 국가관의 핵심이다. 이 점은 슬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와 훗터파 대 신조서(Great Article Book)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슬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온전하심 밖에서는 검을 사용하도록 정하였다. 그리하여 검은 악한 자들을 심판하여 죽인다. 또한 선한 자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다. 율법에서 검이 악한 자들을 심판하고 사형에 처하는데 사용하도록 정해졌듯이 이는 세상 군주들이 사용하도록 정해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로마서 13장은 세속권위에 대한 그들의 논의의 근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재세례파는 일반적으로 세속정부가 하나님께 복종하는데 반대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정부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세속정부가 이들을 탄압, 박해하고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유린할 때 이들은 보다 높은 소명(higher calling)에 순종하기 위해 세속정부에 불순종하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슬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는 국가관의 문제에 대해 특히 3가지 점을 말하고 있는데, 첫째는 선을 방어하고 보호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인 악한 자에 대항하여 검을 사용할 수 있는가, 둘째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인 일에 대해 불신법정에 설 수 있는가? 셋째로는 그리스도인이 세속정부의 위정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세 질문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여 세 질문에 대해 부정적인 해답을 제시했다.
   즉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있으나 이 세상의 시민이 아니요 하늘의 시민이라는 점이 이 해답을 함축해 준다. 결국 이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문제였다. 이들은 중생한 자가 신자의 세례를 통해 교회의 회원이 되고, 회원이 된 자는 복종과 제자됨에 대한 의식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문자적으로 지키려고 하였고 예루살렘 교회와 같은 공유(共有), 공생(共生)의 공동체(행2:42-47)를 꿈꾸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무저항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삶을 지향하였다. 로마의 탄압과 박해 하에서의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은 무저항주의와 비폭력적 입장에 서 있었다. 슬라이트하임 고백서와 훗터파의 대 신조서에는 검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고 있다. 메노 사이먼스(Meno Simons)는 진일보하여 중생한 신자는 싸움으로 남을 속박하거나 전쟁에 첨가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고 메노나이트파는 집총과 병력의무를 기피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평화주의(Pacifism)와 반전(反戰)사상의 근대적 선구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재세례파는 개인의 신앙과 양심이 국가에 의해 속박될 수 없고 하나님 아래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종속적 권위로서의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관헌(官憲)에 대한 재세례파의 견해는 대개 정교 분리원칙에 입각하여 종교의 자유를 확보하고 종교적 양심의 문제에 대한 강제력 사용을 반대한다. 또 무력이나 폭력의 사용은 금지하며 그리스도인은 양떼로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그들의 신앙원리 속에 종합적으로 집약되어 있다.




1) Bainton, The Reformation of the Sixteenth Century, 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