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낭트 칙령

왕이었던 샤를르 9세는 무능하여 그가 왕위에 있던 1574년까지 프랑스는 혼란한 때였다. 그는 1574년 24세의 나이로 간헐적인 발작증 등 정신 이상으로 사망하였다. 이제 왕위는 앙리 3세에게로 이양되었다. 그는 1574년부터 1589년까지 15년간 왕위에 있었으나 우둔하고 유흥과 쾌락을 즐기는 불량아였다. 그는 한 광신적 수도사에 의해 피살되므로써 발로이스왕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제 왕위는 나바르의 앙리에게로 돌아갔다. 그는 케더린의 딸 마가렛의 남편으로서 위그노였다. 성 바돌로매의 날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그는 이제 36세의 장년이었다. 그가 앙리 4세란 이름으로 즉위하자 위그노들에게는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그러나 가톨릭교도들은 그에게 반기를 들었고 종교전쟁은 계속되었다. 스페인 군대의 위협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프랑스 왕으로서 통치자가 되기 위해 개종의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위그노들은 소수에 불과하였고 절대다수인 가톨릭교도들이 왕을 인정하기를 기피했기에 그는 어머니의 신앙을 포기하고 1593년 7월 25일 개종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앙리의 개종으로 가톨릭교도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반드지 그렇지는 않았다. 앙리는 옛 전우들(?)을 배반하지는 않았다. 그는 즉위한 지 9년 후인 1598년 4월 13일 위그노의 종교적 권리와 자유 시민으로서의 법적 권리를 인정하는 낭트칙령(Edict of Nantes)을 발표하였다.
   낭트칙령은 위그노들이 파리 시내를 제외하고는 그들이 이전에 예배당을 소유하였던 모든 장소에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자유를 허락하였다. 위그노들은 국가 공무원직과 의회 의원직을 비롯하여 모든 정치적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그래서 프랑스 전역에서 양심의 자유가 선포되었고 위그노들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예배의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다.

이제 프랑스에서의 개혁교회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비록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매우 중요한 종교적 해결책이었다. 앙리 4세는 1610년 한 암살자에 의해 세상을 떠났다. ‘예수회’에 속한 광신적 가톨릭교도(Ravaillac)는 국왕이 내심으로는 프로테스탄트라고 생각했으므로 그를 살해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예수회란 1534년 스페인의 익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ioyola)가 창립한 가톨릭교회 단체였다. 이 단체는 개신교 박멸을 최상의 목표로 하였고 교황에의 절대 복종을 강조하고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었던 악명 높은 단체였다. 앙리 4세가 사망하자 그의 어린 아들 루이(Louis) 13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루이 13세는 1610년 당시 겨우 9살의 어린 소년이었으므로 앙리 4세의 미망인 곧 루이 13세의 어머니 마리 드 메디치(Marie de Medici, 1573~1642)가 7년간 섭정하였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앙리 4세의 결혼에 대해 부기해 두고자 한다. 앙리 4세(1553~1610)는 보통 나바르의 앙리(Henry of Navarre)라고 불리었는데 앙리 3세에 이어 1589년부터 1610년까지 프랑스 왕이었다. 그는 두 번 결혼하였는데, 첫 부인이 발로이스가의 앙리 2세와 케더린 드 메디치의 딸인 마가렛(Marguerite, 1553~1615)인데 앙리 4세는 1572년 이 여자와 결혼하였으나 1599년 이혼하였다. 두 번째 부인은 마리 드 메디치(1573~1642)였는데 이 여자와는 1600년에 결혼하였다. 이 두 번째 부인에게서 난 아들이 바로 루이 13세였다. 그래서 앙리 4세가 죽은 후 이 두 번째 부인은 어린 아들을 도와 7년간 섭정을 하였던 것이다.

루이 13세는 1624년경부터 절대왕정을 추구하였고 그의 아들 루이 14세는 여기서 진일보하여 왕권신수설을 주창하였다. 특히 그는 1685년 낭트칙령을 폐기하고 위그노들을 다시 박해하였다. 그는 프랑스 전국의 프로테스탄트 목사와 지도자는 14일 이내에 국외로 퇴거할 것을 명하는 칙령을 내렸다. 위그노의 교회당이 불살라지고 학교는 폐쇄되었다. 불과 몇 주 안에 8천여 처의 집회소가 폐쇄되었다. 신교의 자녀들은 신부에게 끌려가 영세를 받게 하였고 가톨릭 학교로 옮겨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많은 개신교도들이 순교하였고 다수의 사람들은 망명의 길을 선택하였다. 이렇게 되어 많은 위그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스위스, 네델란드, 영국, 미국 등지로 이민하였다. 최초의 박해로부터 박해의 종식까지 약 4백만 명의 신교도가 프랑스를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많은 귀족들과 학자들 그리고 프랑스의 고급인력이 프랑스를 떠남으로써 프랑스는 결국 국가적인 손실을 입게 되었지만 이들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신앙운동을 전개함으로써 그 나라는 선한 씨앗을 뿌렸다고 할 수 있다. 그 씨를 받은 대표적인 국가가 미국이었다.
   1888년 ‘세계장로교회 동맹’(Pan-Presbyterian Alliance)이 개최되었을 때 프랑스의 저명한 설교가인 버지르(Bersier)는 프랑스 개혁 교회를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우리들은 위대한 장로교회 대표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고난을 감내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수적으로는 지금도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은 다른 많은 나라들을 풍성하게 하였습니다.” 이 말은 진심이었다.


1) 기즈가와 케더린 시대의 박해에 관한 기록은 1554년 진 크리스핀(Jean Crespin)이 쓴 작품을 1619년 사이몬 구라르트(Simon Goulart)가 보완한 「순교기」(Martyrology)에 소중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서는 무려 789명의 순교자들에 관한 기록과 사형선고를 받은 2,120명의 신앙적 투쟁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