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성 바돌로매 날의 대학살

프랑스의 종교적인 내전이 계속되는 중에도 몽모랑시가(家)의 꼴리니의 영향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이것은 케더린에게는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케더린은 꼴리니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꼴리니 암살 미수사건이 알려지자 위그노들은 진상조사를 정부에 요구하였다. 수세에 몰린 케더린과 기즈가는 꼴리니만이 아니라 모든 위그노들을 처치할 음모를 꾸몄다. 케더린 드 메디치는 성 제르마인 칙령을 발표하는 등 위그노와 천주교 세력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녀의 궁극적 목표는 위그노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계략적인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케더린은 자신의 딸이자 왕인 샤를르의 동생인 마가렛과 개신교 지도자인 나바르의 왕자 앙리(Henry of Navarre)와의 결혼을 주선하였다. 이 결혼은 젊은이의 단순한 의미의 결혼이 아니었다. 로마 가톨릭 교도인 신부와 개신교도인 신랑의 결혼이었고 계략과 음모와 살의가 숨겨진 계략적인 결혼이었다. 이들의 결혼식은 1572년 8월 18일로 예정되었다. 프랑스인들은 이 결혼식으로 내란이 종시되고 평화의 시기가 올 것을 기대하였다. 전국의 모든 귀족들과 명사들이 초대되었다. 꼴리니를 비롯한 많은 위그노 지도자들도 파리로 모여 들었다. 가톨릭교도인 신부와 개신교도인 신랑의 결혼을 통해 이루어질 종교전쟁의 종식을 축하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파리로 모여 들었고 8월 18일 결혼식은 축제분위기 속에서 성대히 치러졌다. 위그노들은 이 결혼식 뒤에 숨어 있는 야만적인 음모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식 후에 열린 잔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역사에 기록될 가장 잔인한 살육이 시작되었다. 이날이 1572년 8워 24일, 성 바돌로매의 날(St. Bartholomew's day)이었다. 그날 밤 케더린은 자기 아들인 왕에게 위그노들이 왕족과 가톨릭 신자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하고 그 주모자는 꼴리니라고 모함하였다. 따라서 이를 사전에 막기 위해서는 위그노들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평소에 우유부단하고 심약한 왕은 이 말을 믿고 이를 허락함으로서 사상 유래가 없는 대 학살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1572년 8월 24일 성 바돌로매 축제일 밤 샤를르 9세와 케더린의 허락 하에 기즈 공은 파리의 치안담당자에게 살육지시를 내렸고 이날 자정 성 제르마인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암살음모자들의 저격을 받고 병상에 누워 있던 꼴리니는 참혹하게 난자당했으며 수많은 위그노들이 무방비 상태에서 피살되었다. 갓난아이들이 둔기에 맞아 쓰러졌고 늙은이들이 칼에 찔려 무참히 죽어갔다. 부녀자들과 아이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죽어갔고 시체는 세느강에 버려졌다. 위대한 학자 페투루스 라무스(Petrus Ramus)는 무릎꿇고 기도하는 중에 목이 잘렸으며 그 시체는 길거리에 버려졌다. 이 살육사건은 파리에서 3일간 계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약 3천 명 가량의 위그노들이 파리시에서 살해되었고 도시는 피로 물들었다. 심지어는 루브르왕궁에서도 피가 냇물처럼 계단위로 쏟아져 내렸다고 한다. 왕과 혈연관계가 있는 두 사람은 프로테스탄트 왕자들, 곧 루이드 꽁드(Louis de Conde)와 앙리 부르봉(Henry Bourbon)까지도 왕 앞에 끌려가 개종을 약속하고서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학살사건이 이처럼 참혹하리라고는 케더린 자신까지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루이스 스피츠는 쓰고 있다. 이 파리의 학살은 전국적인 학살을 예고하는 신호였다. 전국적인 희생자는 상당수에 달했다. 약 7만 명의 위그노들이 천주교도의 칼날에 목베임을 당했다. 일반적으로 역사가들은 약 3만 명에서 7만 명의 위그노들이 살해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소식은 곧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신실한 가톨릭교도였던 당시 황제 막시밀리안 2세까지도 이 소식을 듣고 공포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은 상복을 입고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였다고 한다. 제네바에서는 이 비통한 소식을 듣고 금식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 13세는 이날을 축하하여 ‘하나님께 찬양’이란 뜻의 ‘떼 데움’(Te Deum)성가를 부르도록 명하였고 특별 감사의 미사를 집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날을 기념하여 기념 메달을 주조하였다. 여기에는 한 손에 십자가를, 다른 한손엔 칼을 든 천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로마에서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3일간 불을 끄지 않았다고 한다. 스페인의 필립(Philip) 2세는 이 소식을 들을 때 생전 처음으로 웃음을 터트렸다고 스페인 사가(史家)들은 기록하고 있다.

히브리서의 말씀은 예언적이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 강하게 되기도 하며 …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 (히 11:33~37). 이처럼 수많은 사람이 살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위그노가 다 소멸되지는 않았다. 그 모진 격량 속에서도 ‘남은 자’들이 있었다. 이 학살 사건은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사실이었지만 위그노들을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아직 많은 생존자들이 남아 있었고 차츰 위그노의 수가 증대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