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종교적 대립과 내전

지금까지 우리는 프란소와 1세(1494~1547, 재위기간 1515~1547)와 앙리 2세(1519~1559, 재위기간 1547~1559) 통치하에서의 개혁운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앙리는 1559년에 사망하였는데, 칼빈은 그의 죽음을 “하나님의 자비로운 섭리”라고 하였다. 그는 복음주의 운동의 박해자였기 때문이다. 앙리가 죽은 후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이지만 앙리의 아들 프란소와 2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겨우 15세였다. 이때쯤부터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위그노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위그노들은 상당한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들은 단지 교회라는 신앙공동체만이 아니라 정치적 세력(당파)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개혁교회는 계속 확장되어 갔고, 1562년에는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만도 프랑스 전역에 2,150여 개 교회에 달했다. 이제 위그노의 숫자는 무려 100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앙리의 미망인 케더린 드 메디치는 교황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미 로마교회를 이탈한 자들을 창이나 칼, 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들의 숫자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한 여인의 솔직한 판단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의 위그노와 가톨릭교도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노골화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르봉가(家), 몽모랑시가 그리고 기즈가 등 귀족가문의 정치적, 종교적 배경을 살펴보는 일은 중요하다.

당시 부르봉가는 친 프로테스탄트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왕가에는 개종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555년 나바르(Navarre)의 왕이 된 앙띠완느(Antoine, 1518~1562), 재위기간(1555~1562)와 여왕이 된 쟌느 달브레(Jeanne d'Albret)그리고 앙띠왕느의 동생인 루이(Louis, 1530~1569, Prince of Conde')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몽모랑시(Montmorency)가(家)의 경우에도 개종자가 있었다. 따라서 부분적으로는 친 개신교적이었다. 몽모랑시의 안느(Anne)는 가톨릭교도로 남아 있었으나 그의 누이의 세 아들은 모두 개신교도가 되었다. 그들이 오데(Odet, 1517~1571, 1561년 개종), 가스파르 드 꼴리니(Gaspard de Coligny, 1519~1572, 해군제독) 그리고 프랑소와 당뜰로(Francois d' Andelot)였다.

반면에 기즈가(Guise家)는 친 스페인적, 친 가톨릭교적이었다. 이 왕가는 로마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앙리 2세에 이어 프란소와 2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자 프랑스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게 되었다. 왜냐하면 프란소와 스코틀랜드의 메리와 혼인하였는데 메리의 어머니는 바로 기즈 가문의 여인(Mary of Guise)이었기 때문이었다. 부르봉가나 몽모랑시가는 기즈가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려 하였고, 앙리2세의 미망인인 케더린 또한 기즈가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그녀는 아들의 섭정으로서 프랑스를 통치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560년이 되자 여러 정치 집단 간의 세력다툼은 심화되었다. 이때 개신교 귀족들은 젊은 국왕 프란소와를 기즈가의 영향권 밖에 두기 위한 대담한 시도를 하였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것이 소위 앙브와즈 음모(Conspiracy of Amboise, 1560년 3월)라고 불리우는 국왕 생포 계획이었다. 부르봉가의 꽁데 공(Prince of Conde)은 이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체포당했다. 이렇게 되자 기즈가의 영향력은 도리어 확대되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프란소와 2세는 왕위에 오른 그 이듬해인 1560년 12월 6일 급서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16세에 지나지 않았다. 곧 그의 동생이 샤를르(Charles) 9세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케더린 드 메디치는 10살 난 아들(샬를르 9세)의 섭정직을 차지하였다. 나바르의 왕 앙띠완느(Antoine, 1581~1562, King of Navarre 1555~1562)은 전국을 통괄하는 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는 기즈가의 세력을 제한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녀는 신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으로 프로테스탄트들을 지원하였다. 1562년 1월 17일, 섭정 케더린은 그녀의 수하에 있는 수상 로피탈(Michel de L'Hopital)을 통해 위그노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최초의 칙령, 곧 성 제르마인 칙령(the Edict of St. Germain)을 발표하였다. 이 칙령은 위그노들이 도시 밖에서 공적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허용한 칙령이었다. 즉 위그노들은 도시 밖에서 주간에 비무장으로 모이기만 한다면 자유로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다(도시 안에서는 사적인 모임만을 허락함). 그러나 이 칙령 전문(前文)에서는 이러한 조치가 절대로 왕국 내에서 두 개의 종교가 영구히 존재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신께서 진정한 연합을 이루시기까지 평화와 통일을 유지시키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칙령은 위그노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러한 조치는 순전히 정치적인 계산에 의한 것이었지, 결코 신앙적인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케더린은 이를 통해서 위그노들의 환심을 사는 동시에 기즈가를 견제하려는 이중적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기즈가는 이 칙령을 거부하고 케더린에게 대항하였다. 이 칙령이 발표된 지 두 달 후에는 프랑스는 겉잡을 수 없는 분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 분쟁과 대립, 그리고 전쟁의 시발이 된 직접적인 사건이 1562년 3월 1일 발생한 ‘바시 학살사건’이 있다. 스페인의 필립 2세와 회담하고 프랑스로 귀환하던 기즈가의 프란소와공과 그 일행은 샹파뉴지방의 바시(Vassy)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위그노들을 발견하였는데, 프란소와의 병사 2백여 명은 예배드리고 있는 이들을 습격하여 닥치는 대로 살육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일제의 제암리교회 학살사건과 유사했다. 이때의 사상자 수ㄴ에 대해서는 일치된 기록이 없다. 어떤 기록은 약 30명 정도가 살해되었고 12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했으나, 루이스 스피트는 3백명 이상이 피살되었다고 했다.1) 루터교도인 진 브렌쯔(Jean Brentz)는 이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프란시스공과 그의 일행은 화승총(火繩銃)을 장착하고 헛간으로 침입하였다. 문은 내동댕이쳐 졌고 프란소와와 그 일행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가득 모여 있는 회중을 향하여 불을 던졌다. 어떤 이는 이를 피해 지붕으로 올라갔고 어떤 이는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어떤 이는 두 병사 사이에 잡혀 꼼작할 수 없게 되었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아이는 칼에 찔려 내동이쳐졌다. 피는 낭자하였다.

어떤 칼빈주의자는 “기즈 공의 사람들은 전쟁 연습을 하는 분노한 야만인 같았다.”고 묘사하였다. 반면에 가톨릭측의 기록에 의하면 “기즈 가의 사람들은 결코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주된 임무는 위그노들의 소란을 진정시키려는 시도뿐이었다.”라는 상반된 기록을 남겼지만, 이것은 사실과는 다른 기록이다.
   진 브렌쯔는 45명이 피살되었고 80~100여 명은 부상을 입었고 나머지 사람은 죽음의 위험 하에 있었다고 했다.2) 이 바시학살사건이 프랑스를 전화로 이끌어 간 30여 년간의 긴 종교전쟁의 효시가 되었다. 위그노들은 기즈가에 대항하기 위해 몽모랑시가의 꼴리니(Gaspard de Coligny)제독, 나바르의 왕자 앙리(Henry of Navarre) 그리고 꽁데(Conde) 등의 지도 아래 무력항쟁을 개시하였다. 양측은 외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는 위그노들을 지원하였고. 스페인의 필립2세는 가톨릭측을 지원하였다. 첫 종교전쟁은 1562년 4월에 발발하여 이듬해 3월까지 계속되었다. 전세는 대부분 가톨릭측에 유리하였으나 그 지휘관은 암살당했다. 전쟁은 모두에게 고통스런 일이었다. 전쟁이 발발한 지 약 1년 뒤인 1563년 3월 휴전협정이 조인되었으나 휴전은 일시적이었다. 1567년부터는 또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독일, 네델란드, 스위스, 특히 제네바는 이 전쟁을 주목하고 있었다. 이 전쟁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해 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30여년간 무려 여덟 차례의 내전이 계속되었다(1차: 1562~1563, 2차:1567~1568, 3차: 1568~1570, 4차: 1572~1573, 5차: 1574~1576, 6차: 1577, 7차: 1579~1580, 8차: 1585~1598년).


1) 루이스 스피츠, 353.
2) J. G. Gray, The French Huguenots, 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