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앙리2세 치하의 개혁운동1)

박해
프란소와 1세는 1547년 3월 31일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 앙리 2세(Henry Ⅱ, 1519~1559, 재위기간은 1547~1559)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하여 프로테스탄트에 대하여 보다 적극적이고 잔인한 박멸정책을 폈다. 그는 파리의회에 특별법정, 곧 종교재판소를 설치했는데 이 법정은 흔히 ‘불타는 법정’(샹브르 아르당뜨, chambre ardente, burning courts, 1547)이라고 불릴 만큼 잔인한 것이었다. 그의 잔인한 탄압을 보여주는 한 가지 단적인 예가 1551년에 발표된 샤또브리앙(Chateaubriand) 칙령(1551년 6월 27일)과 꼼삐뉴(Compiegne) 칙령(1557년 7월 27일)이다. 앞의 칙령은 종교재판은 신속한 집행과 종교적 탄원이나 관용을 배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표된 것이었고, 뒤의 것은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관대한 재판을 엄격히 금지하고, 이단으로 선고받은 자의 재심청원권을 부인하기 위한 칙령이었다. 앙리 2세 치하에서 많은 사람이 투옥되었고 화형을 당하기도 했다. 때로는 화형 당할 이들의 혀를 절단하여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또 제네바로부터 유입된 모든 책들은 금서로 지정되었다. 비록 카빈은 제네바에 망명 중이었으나, 동족인 프랑스인과 프랑스의 개혁신앙을 위한 그 피나는 투쟁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이미 「기독교 강요」를 집필하여 프란소와 1세에게 헌정하면서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들에게 관용을 베풀도록 요구하였던 칼빈은 프랑스에 각종의 문서를 보내며 그들을 지원하였다. 칼빈은 많은 사역자들을 프랑스로 보냈고 또 이들은 올리베탄(Peter Roberts Olivetan)의 프랑스 성경, 칼빈의 글들, 그리고 제네바교회의 여러 문서들을 가지고 갔다. 그러나 이런 글들이 금서로 지정되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성립
이런 박해 속에서도 프랑스 최초의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앙리의 재위 중에 설립되었는데, 이 때가 1555년이었다. 이 해는 프랑스 개신교도들에게 있어서 의미있는 해였다. 프랑스 최초의 개신교회는 라 페리에(La Ferriere)라는 개신교인의 가정에 아이가 출생하는 일로 시작되었다. 당시 개신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은밀히 가정에서 회집하였고, 목사가 없는 가운데서 성경공부와 예배를 위해 회집하였다. 말하자면 신앙운동은 가정 중심의 모임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라 페리에라는 신자가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는 그 아이가 가톨릭 신부에게로 부터가 아니라, 개신교 목사에게 세례 받게 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 지역에는 목사가 없었다. 목사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서는 파리에서 3백 마일이나 떨어진 제네바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성례를 위해 개혁교회의 설립은 긴급한 요청이었다. 
   그래서 쟝 르 마송(Jean le Macon)이 라 페리에(Sieur de la Ferriere) 공(公)의 지원을 받아 파리에 조직한 교회가 프랑스 최초의 개신교회가 된 것이다. 그들은 쟝 르 마송을 목사로 선출하고 장로와 집사를 선출하여 교회를 조직한 후, 라페리에의 아이에게 유아 세례를 베풀었다. 이들은 상당한 위험 가운데서도 사제들에 의한 미사를 거부하고 목사에 의한 말씀과 세례와 성찬을 시행하였다. 물론 그 이전에 모 지방에 교회가 설립된 일이 있었으나 곧 폐쇄되었다. 그러나 이 교회는 핍박 중에서도 존속하였다. 같은 해에 모, 앙제르(Angers), 루롱(Loudon), 쁘와띠에(Poitiers), 그리고 아르베르(Arvert) 지역 등 4개 처에도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 후에는 디에프(Dieppe), 뚜르즈(Tours) 등에도 교회가 설립되어 1559년경까지 개혁 교회 수는 72개 처에 이르렀다. 또 1561년 말에는 프랑스 전역에 670여 개의 개혁교회가 설립되었다.2)

제네바에서 파송된 목회자들
교회가 설립된 곳에는 목회자들을 필요로 하였다. 제네바는 프랑스개혁교회 목회자들의 훈련의 중심지였다. 제네바에서 훈련받은 이들이 프랑스로 가서 평신도들을 지도하였고, 또 프랑스에서 제네바로 간 이들이 그곳에서 훈련을 받고 다시 프랑스로 들어가기도 했다. 
   제네바에서 훈련받은 최초의 목사는 필리베르 아믈렝(Philibert Hamelin)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1553년 아르베르 반도의 생뜨뉴(Saintogne)에 부임하였다. 1555년 1562년까지 제네바는 적어도 90여 명의 목회자(선교사)들을 파송하였는데 이들은 65개 처 교회에서 사역하였다.
제네바로부터 파송된 이들은 프랑스 개혁교회 설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교회는 탄압 가운데 있었고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 새로운 신앙운동은 놀랄 정도로 확산되었다. 1561년 꼴리니(Coligny)제독은 프랑스 내에 적어도 2,150개 이상의 개신교 교회가 있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개신교총회의 조직
여러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자 전국적인 교회조직은 불가피하였다. 1557년에는 전국적 교회조직을 위한 ‘교회정치의 조항들’이 작성되었고 1559년 5월 26일부터 28일까지 프랑스 개신교 최초의 교회회의(총회)가 파리에서 비밀히 개최되었다. 50여 개 교회의 대표들이 모인 이 회의에서 신앙고백과 권징조례를 채택하고 장로교 정치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의하였다. 말하자면 프랑스 개혁교회는 제네바의 영향 하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개혁교회(The French Reformed Church)가 조직되었다. 이때 채택한 신앙고백서는 칼빈이 1557년에 작성한 고백서 곧, ‘35개조신조’ 및 ‘제네바 요리문답’과 거의 일치하였다. 또 권징조례는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크 교회의 모형을 따랐지만 근본적으로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그것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개신교 운동을 모질게 탄압하던 앙리 2세는 1559년 프랑스 개혁교회 총회 이후 6주일 후 마상(馬上)무술시합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하였다. 그에게는 네 아들들이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세 아들이 연이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들이 프란소와 2세(Francis Ⅱ, 1559~1560), 샤를르 9세(Charles Ⅸ, 1560~1574), 그리고 앙리 3세(Henry Ⅲ, 1574~1589)이다. 또 세 딸을 남겼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은 마가렛(Marguerite)인데 오빠 앙리 3세를 이어 프랑스의 여왕(1589~1610)이 되었다. 앙리 2세가 사망한 후 미망인이 된 메디치의 캐더린(Catherine de Medici)은 그의 아들들이 통치하는 기간 동안 실제적 권력을 행사하였던 야심에 찬 여인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귀족들 간의 대립과 투쟁, 그리고 그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개신교도들은 또 다른 심각한 고난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위그노라고 불림
언제부터라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이 무렵부터 프로테스탄트들을 ‘위그노’(Huguenot, 혹자는 ‘유그노’라고 호칭하기도 한다.)라고 불렀다. 이 말의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당시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들, 특히 칼빈주의자들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이름이다. 위그노라는 말은, 스피츠(L. W. Spitz)에 의하면, 스위스의 ‘연맹’을 뜻하던 에이게노쎈(Eidgenossen)에서 유래한 이그노스(Aignos)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에이게노쎈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스피츠는 또 “이 명칭은 후에 제네바 신교도들에게도 적용되었는데, 1562년경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하였다.3) 지역적으로 보면 프랑스 남부지역에서는 상당수의 사람이 위그노였으나 그 밖의 지역에서는 통상 인구 중 소수만이 위그노였다.



1) Janet G. Gray, The French Huguenots, 59.
2) R. T. Jones, 「기독교 개혁사」, 209; R. Stauffer, 박건택역, 「종교개혁」, 103.
3) 루이스 스피츠, 230-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