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프란소와 치하의 박해

개혁 운동이 일어났을 때 프란소와 1세는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항상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차라리 그의 종교 정책은 모호한 것이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종교 그 자체의 문제 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처신했으므로 종교적인 문제에 대해 일관성이 없었다. 그는 자기 영역 내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을 용납하여 국론이 분열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동시에 그의 적수였던 찰스 5세를 괴롭히기 위하여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런 이해관계 때문에 프랑스 내의 프로테스탄트들을 지원하지는 않았으나 처음부터 무자비하게 탄압하지도 않았다. 후일 그는 프로테스탄트의 수가 급증하는 것을 보고는 종래의 온건한 입장이 강경 정책으로 바뀌면서 개혁 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위치하고 있던 나바르 왕국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나바르 왕 앙리(King Henry of Navarre)와 결혼했던 프란소와 1세의 누이 앙굴렘의 마가렛(Margaret of Angouleme)은 개혁운동을 지원하였다. 자신이 프로테스탄트이기도 했던 마가렛은 프랑스에 있을 때부터 인문주의자들을 지원했던 학식 있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자기 오빠의 영토로부터 탈출해온 프로테스탄트 망명객들을 받아들이고 보호해 주기까지 하였다.

그 동안은 개혁운동에 대해서 비교적 관대했으나 1525년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해에 프랑스의 프란소와 1세가 파비아(Pavia)전투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찰스 5세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가게 되자 미드리드 감옥에 유폐되었다. 이렇게 되자 소위 이단을 척결할 수 있는 호기가 왔다고 본 교회와 의회 그리고 소르본느 대학은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해 탄압을 가했다. 의회는 섭정 왕이었던 왕의 누이 마가렛에게 서한을 보내어, 지금 국가와 왕실에 들이닥친 재난의 진정한 이유는 이단을 처벌하는데 국왕이 소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교회의 재가를 받아 4인 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이 기구가 개혁운동을 탄압하는 종교재판을 주도하였다. 
   탄압의 첫 대상자는 모의 주교였던 브리소네였다. 그는 탄압과 처형의 위협 앞에서 내적인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가톨릭교회에 완전히 굴복하였고, 가톨릭교회의 명령에 따라 참회와 화해의 예식을 치르기도 했다. 그 다음 목표는 르페브르였다. 그러나 그는 미리 정보를 얻어 스트라스부르크로 도망하였고 그 곳에서 카피토(Capito)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리브리의 은자’ 또한 투옥되었고 파리의 노틀담성당 앞에서 화형을 당했다. 베르깽은 체포당하여 사형 언도를 받은 상태였으나 국왕이 프랑스로 돌아옴으로 간신히 방면되었다. 파렐은 도피네로 갔다가 후에 바젤로 도피하였다. 르페브르의 신약 성경본은 불태워졌고, 다른 많은 사람들은 탄압을 받고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1525년 모를 중심으로 한 개혁운동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마드리드에 감금되었던 프랑스 왕이 1526년 3월, 프랑스로 돌아왔으나 그의 통치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는 재산이 많은 고위 성직자들을 배제할 수 없었고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복음주의자들을 탄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때에 니콜라스 콥(Nicholas Cop)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파리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게 된 콥은 1533년 11월 1일 행한 그의 취임 연설에서 가톨릭의 신학을 대변하는 소르본느 교수들의 입장을 분쇄하기 위하여 에라스무스의 자료를 인용했으며 복음과 율법을 대조시키고,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강조한 루터의 설교(1522년)를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인용했던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한 소르본느 교수들의 지나친 반발에 대해 왕은 분노했으나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즉 프란소와 1세는 이들과 제휴하여 자기 아들 앙리와 교황 클레멘트 7세의 질녀 케더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와의 결혼을 요구하였다. 이와 같은 정략적인 이유 때문에 왕의 입장은 점차 강경해졌고 복음주의자들을 적대힉 시작하였다. 그는 파렐의 사면을 요청하는 베른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 이단의 박멸에 더 관심이 많다.”고 선언하였다. 결국 1533년의 니콜라스 콥 사건은 온건한 교회 개혁자들과 프란소와를 단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콥의 사건 이후 체포와 화형 등 탄압이 계속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534년에는 또 다른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소위 ‘벽보사건’ 혹은 ‘플래카드 사건’ 이라고 불리우는 이 사건은 1534년 10월 18일에 발생하였는데, 파리시 전역과 공공건물, 그리고 교회에 미사를 비난하는 벽보가 부착되었다. 이 전단에서는 “교황과 그의 모든 기생충들”을 신랄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이 전단은 왕의 침실과 식탁에까지 뿌려졌다. 이에 분노한 프란소와 1세는 뚜르농(Tournon)의 추기경 및 다른 성직자와 협의한 후 가혹한 조치를 취했다. 박해는 무차별적이었다. 교묘하고도 야비한 고문이 개발되었고 투옥과 화형이 뒤따랐다. 약 4백여 명이 혐의자로 체포되었고 그 중 23명이 화형을 당했다. 칼빈의 친구였던 에띠엔 드 라 포르즈(Etienne de la Forge)도 그 중의 하나였다.
   1535년 왕은 루터파 제후들과 영국 왕 헨리 8세의 지지가 필요하게 되자 7월 16일, ‘꾸시칙령(Edict of Coucy)’을 발표하고 이단자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고 피난자들의 귀환을 허용하는 관용 정책을 폈다. 그래서 프란소와 1세가 황제 칼 5세와 전쟁을 벌였던 1536년부터 1538년 사이에는 박해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마자 다시 개신교도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점 때문에 왕의 종교정책은 일관성이 없었고 애매모호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1538년 12월과 1539년 6월 사이에는 프로테스탄트를 박해하는 일련의 칙령들이 다시 선포되었다. 1540년 6월 1일에는 그 중 가혹한 것으로 알려진 퐁텐느블로 칙령(Edict of Fontainebleau)이 발표되었는데 이 칙령에서는 이단에 대한 탄압을 세속법적에서 다루도록 허용하였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배포 및 독서가 금지되었고 1544년 소르본느대학은 개신교 사상의 확산을 막기 위해 금서(禁書) 목록을 작성하였다. 교회개혁의 역사는 어디에서나 순탄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희생이었던 것이다.
   1545년 4월에는 메린돌(Merindol)과 인근 촌락에서 왈도파교도 3천여 명이 학살당하기도 했다. 그 중 일부는 스위스로 탈출하였다. 1546년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모(Meaux)에 세워졌으나 곧 폐쇄당하고 말았다. 열네 명의 지도적 인사는 고문을 당하고, 사형을 당하기까지 했다. 멕닐은 프란소와가 살아있는 동안 프로테스탄트가 존속했다는 증거가 없다1)고 하였으나 이미 많은 순교자가 있었고 1547년경에는 프랑스 전역에서 상호 독립적인 개혁신앙집단들이 생성되었다. 단지 이들은 안전을 위해 참 믿음은 마음속에 은밀히 감추어 둔 채 기존의 교구교회(가톨릭교회)에 출석하는 익명성(匿名性)을 유지했을 뿐이다. 이런 경우를 흔히 니고데미즘(Nichodemism)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니고데모의 예(요3:1-22)와 같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복음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사에 참석하며 사제들의 직무수행과 성례시행을 거부하지 않았던 이들을 ‘니고데모파’ 라고 불렀던 첫 사람은 칼빈이었다. 그는 1544년부터 이 용어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칼빈은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않는 니고데미즘에 대해 매우 우려하였다. 특히 그는 이것은 교회의 악습들을 결정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하며, 교회개혁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칼빈은 1537년부터 서신을 통해 니고데미즘의 ‘타협’을 경고하였다. 1543년에는 ‘교황주의자들 가운데 있을 때 복음진리를 아는 신자가 행해야 할 것’이라는 소논문을 통해서, 1544년에는 ‘니고데모파에게 주는 글’(Excuse a Messieurs les Nicodemites)을 통해서 거듭 거듭 니고데미즘을 경계하였다. 
   이와 같은 일들은 박해의 시대에 신앙을 지키고, 거짓된 가르침의 현장에서 진리를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한 역사적 실례이기도 하다. 교회개혁의 역사는 어떤 시대에서나 순탄하지는 않았다.



1) 존 맥닐, 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