Ⅶ. 프랑스에서의 개혁운동

지금까지 독일, 스위스, 영국, 스코틀랜드 등지에서 일어난 교회 개혁운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의 관심을 프랑스로 옮겨 그곳에서의 교회 개혁운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6세기 당시,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루이 11세(1461~1483), 루이 12세(1498~1515)를 거쳐 프란소와 1세(Francois, 1515~1547)에 이르러 프랑스는 절대 왕권을 확립하였고,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를 형성하였다. 특히 프란소와 1세는 이탈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당시의 교황 레오 10세와 볼로냐조약(Concordat of Bologna)을 체결했는데(1516) 교황과의 화약(和約)은 왕의 교회 지배권을 강화시켜 주었다. 이 조약에 따라 프랑스에서의 교황의 지배권은 상대적으로 축소되었고 왕은 감독 지명권을 차지하였으므로 교회법에 따른 감독선출은 폐지되었다. 즉 프란소와 1세는 당시 프랑스에 있던 10명의 대주교, 83명의 감독들, 그리고 527명의 주임 신부들을 임명했고 620개의 성직(聖職)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제 교회회의의 권위는 더 이상 인정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어떤 역사가는 “영적 권력이 세속적 이익을 얻었고, 세속적 권력은 영적 지배를 찬탈하였다.”(the spiritual power secured a temporal advantage and the temporal power usurped the spiritual sway)고 평하기도 했다.1) 이렇게 되자 교직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살피기보다는 왕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더 열심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당시 프랑스의 교회는 다른 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혁되지 않으면 안 될 운명 하에 있었다. 고위 성직자들은 사치하였고, 하급 성직자들은 무지하였으며, 전반적으로 교회는 영적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었다. 교회개혁의 필요성은 절박했으나 교회에 대한 왕의 지배는 그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교회를 절대 왕권의 수단으로 여기는 프란시스는 자기의 통치에 위협이 될 어떠한 변화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 교회개혁의 선구자들

프랑스에서 교회 개혁운동은 보통 네 시기로 구분되고 있는데, 칼빈 이전의 시대, 칼빈의 시대, 그리고 종교적인 갈등의 시대, 평화의 시대가 그것이다. 칼빈 이전 시대란, 1516년의 볼로냐죠약의 체결로부터 칼빈의 제네바 개혁이 시작된 1536년까지를 말하는데 이 시기에는 르네상스의 영향이 강하였다. 16세기 당시는 어떤 지역에서든지 유럽대륙에 촉촉이 스며드는 시대정신과 무관할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도 유럽대륙에서 일고 있는 교회개혁의 영향으로부터 자유 할 수 없었다. 르네상스의 영향과 함께 교회개혁의 기운은 굳게 닫힌 프랑스의 국경을 넘어 파리로 스며들었다.
   결국, 프랑스에서도 교회개혁을 열망하는 무리들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르페브로(Jacques Lefevre of d'Etaples, 1455~1536)였다.
   피칼디현의 에따쁠이라는 소읍에서 태어난 그는 후일 파리와 이탈리아에서 수학하였고, 1492년에는 파리대학의 교수가 되었는데 동료 사이에서 학문적인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파리의 학자 중 가장 독창적이며 진보적인 학자로 프랑스 교회 개혁운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512년에 출판했던 「바울서신 주석」(Commentary on the Epistles of Saint Paul)에서 행위보다는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루터의 칭의 교리를 지지하고 개혁을 소망하고 있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방문하셔서 그것을 타락으로부터 일으키시기를 소망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르페브르는 실로 프랑스 교회개혁의 선구적 인물이었다.
   루터의 개혁이 시작된 지 2년 후인 1519년, 루터의 저작들은 프랑스로 유입되었고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암암리에 확산되고 있었다. 루터가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정죄되던 바로 그 해에 르페브르 또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자기의 친구인 모(Meaux)의 감독 브리소네(Briconnet)의 관할 지역에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르페브르는 1523년 신약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 출판했는데 사람들은 이 번역된 성경이 낭독되는 것을 듣기 위해 모여 들었다. 이것이 최초의 비밀 집회였다. 1526년에는 그가 번역한 구약성경이 출판되었다. 그의 성경번역은 프랑스에서의 교회 개혁운동에 실로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의 활동의 결과로 기욤 파렐과 요한 칼빈이 배출되었다는 링글리(Lingle)의 주장은 과장이 아니다. 
   이 당시 르페브르와 함께 개혁운동에 가담했던 인물은 제라드 루셀(Gerard Roussel, 1480~1550), 프란시스 바따블(Francis Vatable, d. 1547),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 등이었다. 바따블은 파리대학(Collége de France)의 유명한 히브리어 교수였고 벨르잔느(Bellesane)의 수도원 원장이었다. 파렐은 도피네(Dquphine)의 갑(Gap)출신으로서 르페브르의 가장 열정적인 제자로서 뜨거운 복음주의자였다. 그는 1523년 프랑스를 탈출하여 바젤로 갔고, 다시 베른 등을 거쳐 1532년 10월 4일에는 제네바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개혁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특히, 이 당시 개혁운동을 지지, 후원했던 인물은 모의 감독이었던 브리소네였는데, 그의 후원과 배려 아래 개혁운동이 전개되었으므로 그는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의 서식처를 제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점차 개심자들이 늘어났고 개혁운동은 타 지역으로도 확산되었다. 심지어 국왕인 프란소와 1세의 궁정 내에서도 복음을 믿는 자들이 있었다. 귀족이며 학식이 깊었던 아르뜨와의 루이 드 베르깽(Louis de Berquin)은 복음주의 신앙을 가지게 되자 프랑스 전역에 성경을 보급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권유하는 소책자를 번역 혹은 저술하기도 했다. 모지방에서는 양모직공에서부터 학생, 그리고 한 때는 구도자로서 파리 근처의 리브리 숲속의 오두막집에서 걸식을 하던 ‘리브리의 은자’(Hermit of Livry)도 복음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다. 복음주의 신앙은 파리, 모 뿐만 아니라 아비뇽, 투르, 리용 등지로 확산되었다. 1524년 9월, 국왕 프란스와 1세는 “근 5년간 루터파가 리용시와 그 인접 지역에 창궐하고 있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1) 존 맥닐, 「칼빈주의 역사와 성격」, 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