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교회개혁운동과 메리 여왕의 도전
낙스가 1559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이후 종교개혁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으나 1561년 8월 19일 스코틀랜드여왕 메리 스튜어트의 프랑스로부터의 귀국은 달갑지 않는 문제를 야기시켰다.

여왕 메리와의 대결
영국이나 스코틀랜드 역사에는 메리라는 이름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혼돈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여기서 다시한번 메리가 누구인지 정리해 두고자 한다.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5세의 딸인 메리는 1542년 12월 7일에 태어났는데, 그녀가 출생한 후, 꼭 일주일 후인 12월 14일 그의 아버지는 사망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어린 나이에 여왕이 되었으나 그의 어머니 기즈가(家)의 메리(Mary of Guise)가 섭정을 하였다. 명목상의 여왕에 지나지 않았던 어린 메리는 여섯 살 때 어머니의 나라인 프랑스로 가서 살게 되었다. 1558년에는 그곳에서 프랑스의 황태자인 프란소와와 결혼하였다. 그는 앙리 2세에 이어 프란소와 2세란 이름으로 왕이 되었으나 1560년 12월 5일 사망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스코틀랜드에도 변화가 되었는데 섭정이던 기즈의 메리가 1560년 6월 10일 사망하였다. 이렇게 되자 스코틀랜드에서는 부재(不在) 국왕인 메리의 귀국을 요청하게 되었다. 메리는 여왕으로서 프랑스에 남아 있기를 원했으나 남편이 사망함으로써 프랑스에 계속 남아 있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메리는 13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청산하고 스코틀랜드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때가 1561년 8월 19일, 그녀의 나이 18세 때였다. 그녀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오는 날은 억수같은 비가 내렸다고 한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이것을 보고 “그녀가 슬픔과 비애와 암흑과 부덕을 이 나라에 몰고 온다는 점을 하나님께서는 징조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1)는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 신자인 여왕 메리는 귀국 후 첫 일요일에 국법으로 금지한 미사를 드렸고 계속해서 미사를 드리겠다고 고집하였다. 이것은 갓 이루어진 교회개혁을 부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교회개혁을 반대하는 천주교 귀족들의 저항을 대변하는 것이었으므로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메리는 프랑스에 그의 숙부들인 기즈가(家)가 위그노들을 탄압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그녀 또한 스코틀랜드에서 교회개혁을 뒤엎어 버릴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여왕 메리와 개혁자들, 특히 낙스와의 대결은 불가피하였다. 
   낙스는 성 가일교회 강단에서 메리의 미사를 비난하는 우레와 같은 설교를 하였고 메리의 미사를 ‘새 이세벨’(New Iezebel)의 ‘우상숭배’라고 공격하였다. 여왕 메리는 낙스를 소환하여, 경고하였는데, 그해 9월 4일에는 양자 간의 장시간의 토론이 있었다. 놀랍게도 낙스는 이 날의 대화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토마스 랜돌트(Thomas Randolph)는 이 기록이 사실임을 확인하였다. 
   낙스는 자신의 입장을 명백하게 진술하고 자신은 여왕에게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의사가 추호도 없음을 밝혔다. 그러나 신앙문제에 있어서는 자기의 주장이 천주교의 그것보다 진실로 성경에 부합되는 만큼 그녀가 승복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낙스는 또한 존 메이저(John Major)같은 이의 이론을 쫓아, 만약 국왕이 박해할 경우 국민들에게는 무력항쟁을 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2) 그리고 낙스는 그녀의 왕위에 평안을 비는 것으로 토론을 끝냈다. 이 회담 후 메리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는데, 그녀를 더욱 분노케 했던 것은 절대주의를 신봉하는 프랑스 궁정에서 자라면서 보아 왔던 그 절대권을 가지고 이 반항자를 처단할 수 없는 자신의 위치였다.
   여왕 메리는 미사와 가톨릭적인 의식을 고집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전국 방방곡곡을 다닐 때마다 그곳에서 미사를 행하며 가톨릭교도들을 격려하였다. 그리하여 여왕과 개혁자 사이에는 영적 전쟁이 시작되었다. 여왕은 매혹적인 여성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낙스의 환심을 사기에는 종교적으로 너무 먼 거리에 있었다. 메리의 미사는 낙스에게는 침공해오는 군대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다. 메리의 귀국으로 개혁을 반대하는 이들이 다시 세력을 규합하려는 조짐이 나타나기도 했다. 낙스는 10월 2일자로 쓴 편지에서 “아직도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남아 있는 국민들의 손을 무장시키지 않는 한 이러한 행위를 멈출 길이 없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다섯 차례의 면담이 있었다. 프랑스의 기즈가가 위그노들에 대해 대학살을 자행한 직후(1562)에 있었던 두 번째 면담에서 낙스는 메리의 숙부들은 무죄한 피를 흘린 하나님의 원수들이라고 비난하였다. 확신에 찬 낙스는 메리를 비난하였으나 존 맥닐은 낙스가 아직 소녀에 지나지 않는 여왕의 연소함을 참작하지 않고 비난함으로써 그녀를 설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해 버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낙스에게 있어서 여왕의 미사와 천주교에로의 복귀를 위한 시도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낙스의 확신과 용기, 그리고 그의 투쟁은 대단한 것이었다. 랜돌프는 9월 24일자로 쓴 편지에서 낙스의 영향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두고 있다. “저는 계속 불어제치는 5백 개의 나팔들보다도 오히려 한 개인의 한 시간 동안 외치는 목소리가 더욱 힘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메리의 폐위
이러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결국 자승자박(自繩自縛)격이 되어 메리의 파멸을 초래하고 있었다. 과부였던 여왕 메리는 1565년 7월 29일 그녀의 사촌인 단리경(Earl of Darnley) 헨리 스튜어트(Henry Stuart, 1545~67)와 재혼하였다. 단리경인 헨리 스튜어트는 평판이 좋지 못한 인물이었다. 다시 메리여왕의 서기관은 데이비드 리찌오(David Rizzio, c. 1533~1566)였는데 그는 이름 있는 이태리출신 음악가로서 교황의 첩자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여왕의 충신이 되어 여왕과 매우 친근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궁정의 귀족들은 리찌오의 벼락출세에 격분하였고 그를 제거하려고 하던 중 단리와 귀족들은 여왕이 보는 앞에서 리찌오를 살해하였다.
   메리는 쉡게 사랑에 빠지기도 했지만 싫증도 빨랐다. 그녀는 남편인 단리보다는 귀족인 보스웰(Bothwell)백작을 열렬히 사람하게 되었다. 보스웰은 여왕을 겁탈하고 다음에는 정복했는데 이 일로 전국이 소란해졌다. 이런 와중에 단리도 의문의 피살을 당했는데(1567. 2. 10) 보스웰경이 주모자로 지목되었다. 보스웰경은 여왕의 측근으로서 유능한 전략가이자 책략가였다. 이 의혹으로 보스웰이 기소되었으나 검사특에는 일체의 증인이 허용되지 않는 상태의 재판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것은 단리 살해에 있어서 보스웰의 가담설을 더욱 증폭시켜 두었다. 이로부터 3개월 후인 1567년 5월 15일, 메리는 다시 보스웰과 결혼하였는데, 이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이 결혼은 이 의심을 더욱 확대시켜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살인자와의 결혼이라는 비난의 소리가 높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메리와 개혁자들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메리가 가톨릭 옹호자라는 점 외에도 그녀의 거듭된 결혼과 방종한 성생활은 개신교도들의 불신을 받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메리의 새 남편 보스웰은 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국민적 여론은 왕으로부터 멀어져갔고 드디어 귀족들은 여왕의 통치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군부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했던 메리는 반란 진압에 실패하고 도리어 체포되어 에딘버러에 유폐되었다. 병사들은 이런 창녀는 불에 태워 죽여야 한다고 외쳤다. 귀족들은 단리 살해에 메리도 가담되어 있다는 증거를 갖고 있음을 통지하고 그녀에게 양위(讓位)와 살인 혐의에 의한 기소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요구하였다. 결국 수세에 몰린 여왕 메리는 단리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겨우 한 살 밖에 되지 않은 아들에게 왕위를 이양하였는데 그가 제임스(James) 6세였다.
   스코틀랜드(장로)교회 총회는 1567년 6월 25일 메리의 왕위 상실을 선언하고 그녀의 아들을 제임스 6세로 공식 옹위하였다. 제임스 6게의 대관식 때 설교를 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낙스였다. 낙스는 어린 요시야 왕에 대한 설교를 통해 개혁운동을 국가적 과제로 확고히 했다. 
   이리하여 종교개혁 운동은 메리 여왕의 저항이 있었으나 소멸되지 않고 승리를 얻게 되었다. 1567년 12월에 소집된 스코틀랜드 의회는 1560년의 정책을 재확인 하였고, 앞으로 모든 왕들은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유지하겠다고 서약하는 것을 의무화 하였다. 또 교회회의 소집의 자유와 그 권한을 인정하였다. 그래서 스코틀랜드는 강력한 장로교 국가가 된 것이다. 
   한편 폐위된 메리는 1568년 5월 영국으로 피신하였으나 그 곳에서 유폐되었다. 이곳에서도 권력에의 복귀를 위해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이 일 때문에 하원은 그녀의 참수를 요구했고 월싱햄은 그녀를 ‘가슴 속의 뱀’이라고 불렀다. 마음속에 영국 왕위까지 차지하려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 채, 재판에 회부되어 전원 일치의 유죄 선고를 받은 메리는 19년간(1568~1587)이라는 긴 유폐생활을 끝내고 1587년 2월 8일 아침 런던 탑(London Tower)에서 처형되었다. 결국 메리는 자기 스스로 자신의 목을 졸랐던 셈이다.

존 낙스의 죽음
이제 우리는 스코틀랜드에서의 종교개혁의 역사를 마감하면서 낙스의 죽음에 대해 기록해 두고자 한다. 낙스는 1559년 5월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이후 13년간 교회개혁을 위한 나팔수(Trumpeter)의 사명을 감당하고 1572년 11월 24일 사망하였다. 낙스는 전 생애를 살명서 자기의 설교를 ‘주인(주님)의 나팔을 부는 것’(blowing the Master's trumpet)으로 묘사하였다.
   예레미야 등 구약의 선지자들로부터 도출해 낸 이 사상은 자신의 사명에 대한 자기의 관점을 요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던 군사적 기질(the martial spirit)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실로 그는 당대의 뛰어난 설교가였으며 애국자였고 개혁자였다. 엔드류 멜빌은 낙스를 가리켜 “우리 민족의 가장 고귀한 예언자이자 사도”라고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 낙스의 장례식에서 섭정이었던 몰톤(Mort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여기 이 자리에는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인간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한 사람이 누워 있다.(Here lies a man who never feared faces of human fleash in all his life.) 너무나도 많은 날 동안 단도와 검의 위협에 시달렸으나 그는 평화와 영예 속에 이 세상을 떠났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특별히 보호하였기 때문이다.”3)

존 낙스가 세상을 떠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제임스 6세의 섭정이었던 몰톤은 장로(교회)제를 폐지하고 감독(주의)제를 스코틀랜드에 소개하였다. 이와 같이 교회개혁이 다시 위기를 맞게 되었을 때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이 제네바에서 귀국하였다. 이제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회)제도를 지켜가며 개혁교회를 확고히 다져 가는 일은 멜빌에게 주어진 몫이었다.



1) S. Reid, The Trunpter of God, 265
2) 존 메이저에 대해서는 “On the road from Constance to 1688: The political thought of John Major and George Buchanan", The Journal of British Studies. Ⅰ, 1963. 참고할 것.
3) S. Reid, 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