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낙스의 개혁운동과 장로교

정치적 배경
존 낙스는 1559년 5월 2일, 에딘버러로 돌아왔는데 당시 스코틀랜드는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태에 있었다.
   제임스 5세(James Ⅴ, 1513-1542)의 유일한 자식인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1542년 12월 7일생, 1587년 처형 당함)는 여섯 살 때 어머니의 나라인 프랑스로 보내졌는데, 그곳에서 보호를 받으며 양육되었다. 메리는 명목상 스코틀랜드 여왕이었지 실제로는 그의 어머니인 기즈의 메리(Mary of Guise)가 섭정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성장하던 메리 스튜어트는 16세가 되던 1558년 4월, 프랑스의 황태자와 결혼하였는데, 그는 앙리 2세와 케더린 드 메디치의 장남이었다. 이때로부터 약 1년 후 그는 프란소와 2세(Francis Ⅱ)란 이름으로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겨우 열여섯 살인 메리는 스코틀랜드의 명목상의 여왕인 동시에 프랑스의 왕비가 된 것이다. 그녀는 잉글랜드의 합법적 여왕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었다. 당시 영국(잉글랜드)왕이었던 메리가 1558년 사망하자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가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가톨릭 측에서는 이를 불법으로 보았다. 도리어 합법적 왕권은 헨리 7세의 증손인 메리 스튜어트에게 있다고 보았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메리 스튜어트는 자신이 영국의 합법적인 여왕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런 일 때문에 메리 스튜어트는 그녀의 사촌인 영국의 엘리자베스와 원수지간이 되기도 했다.


왕가의 결혼관계와 프랑스인 기즈(Guise)의 섭정 때문에 스코틀랜드는 친불파가 득세하였고 따라서 친 로마가톨릭 정책이 고수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흔히 종교개혁 추진동맹이라고 불리우는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의 모임인 ‘회중의 지도자들’(Lords of the Congregation)은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회중의 지도자들’이란 스코틀랜드의 개신교도인 ‘여호와의 회중’(Congregation of the Lord)의 지도자들의 모임이었다.
   1557년 12월 3일에는 5명의 대표가 모여 Common Bond, 혹은 Covenant라고 불리는 ‘제1차 공동규약’에 서명하였는데, 이 규약에는 “하나님의 가장 축복된 말씀과 그의 회중을 확립, 유지, 계승시키며, 로마 가톨릭 교회의 모든 미신과 혐오스러운 것들과 우상숭배를 거부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교구에서 개신교 예배가 드려질 때까지 하나님이 군주들을 감동시켜 신실 되고 참된 목사들에 의해 공적인 설교가 허락되도록 싸운다는 신앙적 결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종교개혁 추진동맹, 곧 회중의 지도자들의 세력이 점차 증가해 가자 섭정 기즈의 메리는 무력으로 이들을 누르려고 군대를 동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가당치 않는 시도였다. 영주들도 섭정 기즈의 메리에 반대하고 회중의 지도자들과 합세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이 모레이(Moray)의 백작(1562년 이후)인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wart, C. 1513~1570)와 아질(Argyll)의 제5대 백작인 아치볼드 켐벨(Archibald Campbell, 1530~1573) 등이었다. 이들은 1559년 7월 말까지는 던디와 퍼스, 세인트 앤드류스, 그리고 에딘버러 등지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기즈의 메리는 프랑스 원군을 요청하였다. 프랑스 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앞바다를 상륙하였다. 존 낙스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을 때는 바로 이런 내전상태였다. 이제 다급해 진 것은 프로테스탄트 측이었다. 비록 프로테스탄트들, 곧 회중의 지도자들은 1559년 10월 21일, 톨부스(Tolbooth)에 회집하여 부재국왕(不在國王)인 메리 스튜어트의 이름으로 기즈의 메리를 섭정직에서 파면한다고 선언하고 프랑스 원군에 대항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프로테스탄트 측은 영국에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기로 하였다. 이 일을 위해 낙스를 영국에 파견하는 것이 적격인 것처럼 보였으나 그가 망명기간 중에 썼던 소책자 때문에 당시 영국 왕 엘리자베스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낙스는 당시 유럽을 통치하던 여성들을 맹렬히 공격하는 작품을 썼는데, 이것이 「여성들의 괴물 같은 통치에 대한 첫 번째 나팔소리」(The First Blast of the Trumpet against the Monstrous Regiment of Women)였다. 이 책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섭정 기즈의 메리, 영국의 메리 튜더, 그리고 프랑스의 케더린 드 메디치를 비판했으나 이 책이 출판되고 영국에 알려졌을 때는 메리 튜더는 사망하고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되어 있었다. 비록 이 책은 죽은 메리를 겨냥한 비판이었으나 역시 여왕이 된 엘리자베스로서도 이 책을 적대시 할 수밖에 없었다. 낙스의 이 책은 근본적으로 반(反)여성적이었으므로 엘리자베스 자신에게도 적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낙스는 이 문제를 여러 차례 해명했으나 엘리자베스의 호의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 프로테스탄트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윌리암 메이트란드(William Maitland, 1528~73)를 영국에 파견하였다. 그는 원래 섭정 기즈의 지지자였으나 1559년 10월, 섭정 여왕을 등지고 프로테스탄트 편에 가담한 자로서 외교적 수완이 탁월한 자였다.
   그는 만일 프랑스 군대(로마 가톨릭)가 스코틀랜드를 공격하여 프로테스탄트를 분쇄해 버린다면 영국 또한 머지않아 로마 가톨릭 수중에 놓이게 될 것을 말하고, 이렇게 될 경우 ‘중도정책’(via media)이라고 하지만 사실 친 프로테스탄트쪽인 엘리자베스 왕위조차 위험하게 된다는 점을 들어 스코틀랜드에 대한 영국의 군사 원조, 곧 원군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스코틀랜드가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인다면 인접한 영국도 어쩔 수 없이 프랑스의 수중에서 가톨릭의 지배하에 처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인식한 영국은 1560년 초에 원군을 파병하였다. 이렇게 되어 영국과 스코틀랜드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연합군이 결성되었고 프랑스 군과 대치하게 된 것이다. 스코틀랜드 프로테스탄트가 프랑스 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만큼 낙스의 간장을 태운 때가 없었다. 낙스는 영국의 원군파견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주여! 나에게 조국 스코틀랜드를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주시옵소서.” 이 기도는 응답되었고 1560년 1월 27일, 버윅(Berwick)에서 영국군과 스코틀랜드 프로테스탄트군 사이에는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 내전은 장기화될 전망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1560년 6월 10일, 섭정 기즈의 메리는 사망하였고 프랑스 군은 화평을 원했다. 사실 프랑스 군은 스코틀랜드의 지원도 받지 못했고 군대의 증강 가능성도 없었으므로 항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종교개혁추진동맹, 곧 회중의 지도자들이 승리하였다. 그 결과 1560년 7월 6일에는 ‘에딘버러 조약’(Treaty of Edinburgh)이 체결되었고, 이 조약에 따라 프랑스와 영국 양 원군의 철수를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1560년 7월 15일, 프랑스 군은 선편으로, 영국군은 육로로 스코틀랜드를 떠났다.
   낙스는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과 함께 1560년 7월 19일 에딘버러시에 있는 성 가일(St. Giles) 교회당에 모여 감사예배를 드렸다. 그는 이 날의 기도에서 “영국 동맹자들이 도구가 되어 오늘 우리가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에딘버러조약’에서 교회개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그 장애물이 제거되고 만 것이다.


교회개혁활동
존 낙스는 열정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독려, 격려하였고 개혁운동을 위해 진력하였다. 그의 재능과 목소리, 용모, 그리고 그의 강직한 성품과 신앙적 인격은 그의 설교를 능력 있게 만들어 그의 강직한 성품과 신앙적 인격은 그의 설교를 능력 있게 만들어 주었고, 로마 가톨릭에 대한 그의 효과적인 공격은 청중들을 압도하였다. 영국여왕 엘리자베스의 사신인 토마스 랜돌프(Thomas Randolph)는 낙스의 음성이 “5백 개의 나팔보다 더 효과저가으로 그들 속에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다.”고 보고했을 정도였다. 낙스에 대한 불만도 없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낙스를 “지나치게 극단적”이라고 비난하기도 했고 “뿌지째 뽑아 버리려는 사람”이라고 하기도 했다. 사실 낙스는 타협을 모르는 철저한 개혁자였다. 낙스의 개인적인 한 친구는 낙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스코틀랜드의 빛이며 교회의 위로이고, 신실함의 거울이며 경건한 생활과 건전한 교리 그리고 사악함을 반대하는 일에서 모든 진실한 목회자들에 대한 전형이자 모델이다.”1)


이제 스코틀랜드에서의 교회개혁은 신속히 추진될 전망이었다. 섭정 기즈의 메리가 사망한 후에도 여왕 메리 스튜어트는 여전히 프랑스에 있었으므로 왕이 없는 얼마 동안 의회가 중심이 되어 많은 변화와 개혁을 이루어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교회 개혁도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교회가 진정으로 개혁교회(Reformed church)로 불려 질 수 있기 위해서는 로마 천주교적 예배와 의식을 폐지하는 동시에 개혁교회를 조직화하고 개신교적 예배와 생활, 의식과 고백을 정비하지 않으며 안 되었다. 
   존 낙스는 1560년 4월 이래로 에딘버러의 성 가일교회의 설교자로 봉사하였는데 그는 학개서를 강해하였다. 이 책은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후 성전재건에 관한 예언서인데 낙스는 이 책을 통해 스코틀랜드 교회 재건의 정신을 고취하고 교회개혁운동을 격려하였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의 채택
1560년 8월, 스코틀랜드 의회는 공식적으로 라틴어 미사를 금하고, 감독제를 거부하으며 가톨릭교회의 모든 집회를 불법화하고 프랑스와의 단절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여섯 명의 존(John)으로 구성된 신앙고백 준비위원회가 4일 만에 작성한 신앙고백서를 8월 17일 채택하였는데, 이것이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The Scot Confession)이다. 이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여섯 명의 존이란 존 낙스를 비롯한 존 위록(John Willock), 존 스포티스우드(John Sopttiswood), 존 윈람(John Winram), 존 더글라스(John Douglas) 그리고 존 로우(John Row)였다. 이 신앙고백서는 1647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채택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가 되었다.
   이 신앙고백서는 전 25조로 된 고백서로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건전하고도 유익한 교리”로 채택되었다. 이 고백서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의 신앙고백서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위배되는 어떤 항목이나 문장을 발견한다면 … 그가 오류라고 밝힌 것을 개정할 것을 약속한다.

이 신앙고백서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가르침을 많이 따랐다. 따라서 칼빈주의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이 고백서에서 참된 교회의 표지로 세 가지를 언급하였는데,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한 선포, 성례전의 올바른 시행, 정당하게 시행되는 권징이 그것이다('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제18장).


장로교총회의 조직과 제1치리서의 작성
1561년 12월에 낙스는 5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총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세계장로교회의 연원이 되었다. 이때 스코틀랜드 교회는 교회정치제도로 장로(교회)제도를 채택하였고, 교회 직원은 목사, 장로, 집사로 구성하였다. 또 장로와 집사는 일 년에 한 번씩 선거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제도는 신학적으로는 개혁신학을 고수했으나 장로제도를 교회정치형태로 취한 최초의 교회가 된 것이다. 또 이때 ‘치리서’(The Book of Discipline)를 작성, 채택하였다. 이 문서를 보통 후일의 개변된 처리서와 구별하기 위해 ‘제1치리서’(The First Book of Discipline)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치리서’는 신앙고백을 작성한 동일한 위원회가 작성한 것이지만 스코틀랜드의회의 인준은 받지 못했다. 이 치리서는 성도들의 도덕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 목적과 기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죄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며, 폭정을 억제하며, 억눌린 사람을 변호하여 우리 몸을 정결하고 거룩하게 보존하며 절제하는 생활을 하며 모든 사람을 말과 행동에서 정의롭게 대하며, 우리의 이웃을 해하려는 성향을 억누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쁘게 받으실만한 십계명의 둘째 판이 요구하는 선행들이다.

이 ‘치리서’에서는 세례와 성찬식의 단순한 시행과 주일 및 주중 예배 규정을 두었고, 충분히 훈련된 목사들이 배출될 대까지 교구를 돌볼 임시직으로서 ‘독경사’(讀經師, Reader)의 임명, 그리고 목사의 선택과 목사와 독경사들의 활동을 감독하는 임시직 ‘감독’(Superintendent)의 임명에 관해 언급하였다. 그리고 장로와 집사를 선택하는 일들을 규정하고 있다. 아마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독경사’나 ‘감독’직은 낯선 직분일 것이다. 독경사란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평신도 가운데서 신앙과 행실이 모범적인 사람을 선출하여 예배시간에 성경을 읽도록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이 당시 많은 교회에 충분히 훈련된 목사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임시적인 조처로 독경사를 임명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독경사는 잠정적 조처였고 임시직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감독’은 교회개혁이 이루어진 후 아직 교회들이 안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교회를 살피고 지도하는 자가 필요하였다. 그ㅐ서 이 ‘치리서’에서는 임시직으로 ‘감독’을 두도록 했던 것이다. ‘감독’은 다섯 명 밖에 없었고 그들이 죽거나 은퇴하면 그 직이 자연스럽게 소명되었다. 이 ‘감독’이란 직이 영국교회의 ‘주교’와 비슷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으나 사실은 달랐다. 주교직과는 달리 감독은 자기 교회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설교를 주로 하였으며, 동료 목사들에 의해 선출되는 임시직이었을 뿐이다. 감독은 주교와는 달리 특별한 교권을 소유한 자가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감독은 감독제 교회의 주교와는 다른 것이었다.
   이 치리서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기독교적인 교육을 위한 제안이 있었는데 모든 교회는 라틴어 문법과 교리공부를 가르칠 교사를 두고 각 마을마다 고등교육 기관을 세우도록 하였다. 이러한 교육정책의 결과 스코틀랜드에는 고등학교와 대학들이 세워졌고 결과적으로 유럽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국가가 되었다.


일반예식서의 작성
1564년에는 「일반예식서」(The Book of Common Order)가 작성되었다. 낙스가 초안한 이 예식서는 1645년 ‘예배지침서’(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가 발간될 때까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표준적인 예식서로 사용되었다. 이 책은 거룩한 예배를 위한 안내서로의 의미를 지니는데, 예배순서와 내용은 물론 성례식, 결혼예식 등에 대한 예식규정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문서에도 제네바 교회의 영향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은 신앙고백서, 치리서와 예식서의 작성은 스코틀랜드 교회를 개혁하고 교회를 정비, 조직화 하는 데 필수적인 작업이었다.



1) G. D. Henderson, 스코틀랜드 교회사, 1991, 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