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 존 낙스와 스코틀랜드에서의 개혁운동

지금까지 우리는 독일, 스위스, 영국(잉글랜드) 등지에서 일어난 교회개혁운동에 대해 설명했으나 이제부터는 잉글랜드 북쪽에 있는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교회개혁운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스코틀랜드에서의 개혁운동은 후일 장로교로 발전하였고 그 개혁운동이 세계 장로교회의 원류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널리 알려진 바이지만 스코틀랜드 개혁운동, 곧 장로교 신앙운동은 후일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지로 전파되어 그 곳에 장로교회가 세워졌고 또 미국, 호주, 캐나다 장로교회는 1880년대 이후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함으로써 한국에 장로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런 점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한국 장로교회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스코틀랜드 교회개혁사는 한국의 장로교인들에게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장로교인들에게 스코틀랜드에서의 개혁과 장로교회의 선조인 존 낙스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이 장은 한국의 장로교인들에게 많은 유익이 있을 것이다.

1. 스코틀랜드의 정치, 종교적 배경
스코틀랜드에서의 종교개혁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 이를테면 독일이나 스위스, 영구에 비해 시기적으로 후기에 일어났다. 그것은 스코틀랜드의 지리적 위치와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리적으로 잉글랜드인들의 빈번한 침입을 받았고 이들로부터 대항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나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는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선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스코틀랜드인들의 자기 보위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유럽의 강력한 국가이자 종교적으로 강력한 가톨릭 국가였으므로 스코틀랜드는 오랫동안 가톨릭의 우산 아래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인 배경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스코틀랜드 교회가 처음부터 로마 가톨릭 교회에 속했던 것은 아니었다. 옛날 아일랜드로부터 스코틀랜드 서해안에 있는 작은 섬 아이오나(Iona)에 건너와(563년) 복음을 전한 사람은 성 콜롬바(St. Columba, 521-597)였다. 주후 5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선교활동은 드디어 전 스코틀랜드에 복음의 씨를 뿌리게 된 것이다. 이때로부터 13세기 초엽까지 스코틀랜드는 자유로운 독립교회로서 로마 교황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독자적인 교회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노르만디 지방의 봉건 영주였던 노르만공이 1096년 바다를 건너 영국으로 진격하여 승리하게 되자 스코틀랜드는 국경선에서 영국과 대치하게 되었고 영국군의 빈번한 침입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코틀랜드 교회 지도자들은 로마 교황을 알현하여 영국에 있는 켄터버리 주교로 하여금 영국 왕에게 스코틀랜드를 침략하지 않도록 협력해 줄 것을 요청키로 하였다. 이런 요청을 받은 교황은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스코틀랜드교회를 로마 교황 지배하에 두라는 것이다. 만약 스코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교회의 한 교구로 한다면 켄터버리 주교를 통해 영국이 더 이상 침범하지 않도록 주선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교섭이 이루어진 때가 1200년경이었다. 이런 정치적 이유 때문에 자유로운 독자적인 교회였던 스코틀랜드 교회는 프랑스와 선린관계를 유지하면서 로마 가톨릭 산하의 한 교구가 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와서는 약간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일부는 전통적인 우호국이었던 프랑스와의 관계를 고수하려고 한 반면에 또 다른 이들은 잉글랜드와 보다 밀접한 선린관계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스코틀랜드 왕실의 혼인문제와 결부되어 소위 친불파(Francophiles)와 친영파(Anglophiles)로 양분되기도 했다.
   스코틀랜드왕 제임스 4세가 영국와 헨리 7세의 딸 마가렛과 결혼했을 때는 친영파가 우세하였고, 또 영국에서 헨리 8세가 왕이 되었을 때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평화롭게 공존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으나 스코틀랜드에서는 친불파가 득세하여 제임스 4세의 아들 제임스 5세는 프랑스 기즈의 메리(Mary of Guise)와 결혼함으로써 스코틀랜드는 종교적으로 영국과 반대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이 당시 영국은 로마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소위 ‘영국교회’(성공회)를 지향하고 있었으나 프랑스는 여전히 강력한 로마 가톨릭 국가였기 때문이다. 어떻든 16세기 중엽, 곧 존 낙스가 개혁을 시작했던 1560년까지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선린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로 있었다.
   이러한 스코틀랜드에서도 점차 프로테스탄트 사상이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 이전부터 있어 왔던 롤라드파(Lollards)와 후스파의 영향도 없지 않았지만 간간히 스며드는 프로테스탄트 사상은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었다. 독일 등지에 유학 갔던 스코틀랜드인에 의해서 루터 및 다른 개혁자들의 저서들이 유입되어 점차 그 세력을 확대해 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자 스코틀랜드 의회는 1525년 7월 대륙으로부터의 프로테스탄트 서적 반입을 금지하는 법령을 통과시키고 이를 제재하려 했으나 사람의 마음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1526년 이후에는 틴데일(Tyndale)이 영역한 신약성경이 글라스고 지방에 유포되기도 했다.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교리를 신봉하는 자들의 숫자는 증가해 갔고 왕실권력의 팽창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기득권을 상실하고 있는 귀족틍 사이에서도 프로테스탄트 사상은 거세게 번져갔다.

스코틀랜드 교회개혁운동의 선구자들
이런 가운데 1528년 최초의 순교자가 생겨났는데 그는 스코틀랜드 교회개혁운동의 선구자였던 패트릭 해밀톤(Patrick Hamilton, 1504?~1528)이었다. 그는 유명한 가문 출신으로서 재능 있는 젊은이였는데, 파리와 루뺑대학에서 공부하고 귀국하여 1524년 10월 성 앤드류스(St. Andrews)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대학에서 신약성경을 강의하다가 당시 악명 높았던 세인트 앤드류스의 대주교 제임스 비튼(James Beaton, d. 1539)에게 소환 당하자 곧 독일로 망명하였다. 그는 마부르그대학에서 공부하였고 프로테스탄트신앙을 표방하는 최초의 교리서를 간행하기도 했다. 1527년 해밀턴은 상당한 위험이 있었으나 비장한 각오로 조국 스코틀랜드로 돌아갔고 그가 깨달은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후일 존 낙스는 그의 활동을 가리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그의 마음에 심기운 참된 빛의 광채는 그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공적으로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해밀턴의 사역은 단지 몇 개월에 지나지 않은 짧은 기간에 불과했다. 
  비튼 대주교는 해밀톤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처럼 위장하고는 1528년 2월 27일 그를 체포하였고 이틀 후인 2월 29일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화형에 처하였다. 그를 성 샐베이터 대학(St. Salvator's College) 앞에서 공개적으로 처형했을 때 그는 6시간 동안 불과 연기 가운데서 고통당하며 죽어갔으나 프로테스탄트 사상은 쇠하여지지 않고 도리어 새로운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후일 낙스는 「스코틀랜드 교회개혁사」(History of the Reformation of Religion within the Realm of Scotland)에서 “그를 태우는 연기가 바람에 나려가면 날려가는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전염될 것이다.”고 하였다.

해밀턴의 순교에서부터 종교개혁이 성취되기까지 30여 년 간 약 20여 명의 개신교도들이 화형을 당했는데 이들이 스코틀랜드 교회개혁운동의 선구자들인 셈이다. 이들 중에 몇 사람에 대해 간단히 기록해 두고자 한다.
   죠지 위샤트(George Wishart, 1512~1546)는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후일 스코틀랜드 개혁운동의 중심인물이 될 존 낙스를 회개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를 교회개혁운동의 지도자로 만든 사람이다. 위샤트는 아버딘대학교에서 고전어를 배운 뒤 스코틀랜드 최초의 학교인 몬트로즈의 교사가 되었는데, 이곳에서 헬라어를 가르친다는 이유로 고발되자 영국으로 도망하였다. 이곳에서 개혁자 라티머를 만나 교제하였고(1538년) 후에는 스위스로 갔다. 이곳에서 스위스의 첫 신앙고백서인 「제일 헬베틱 신앙고백서」(The First Helvetic Confession)를 영역하기도 했다. 위샤트는 한동안 영국 켐브리지에 있는 코르푸스 크리스티대학(Corpus Christi College)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조국 스코틀랜드로 돌아왔고 관헌의 눈을 피해 이동하면서 몬트로즈, 던디(Dundee), 아이셔(Ayrshire) 지방을 다니며 설교하며 성경을 강해하였다. 그러나 그는 추기경 데이비드 비튼(David Beaton, 1492~1546)의 명령에 의해 체포되어 성 앤드류스 성으로 압송되었고 1546년 3월 1일 화형을 당했다. 데이비드 비튼은 제임스 비튼의 조카로서 프로테스탄트를 박멸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꼭 4개월 후에 비튼은 세인트 앤드류스성에서 살해되었다. 
   또 한 사람의 순교자는 토마스 포렛트(Thomas Forret)였다. 그는 학식있는 사제였는데 복음적인 설교자가 되었고 체포된 그는 1638년 화형을 당했다. 월터 밀른(Water Milne) 또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위하여 희생된 인물이었는데 그는 나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스코틀랜드를 떠나기도 했는데, 알레시우스(Alesius, 1500~1565), 마카배우스(Macchabaeus, d. 1557)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알레시우스는 독일에서 교수로 활동하였고 마카배우스는 덴마크에서 교회개혁운동에 헌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