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사도신경의 중요성
극단적인 개신교도 가운데는 사도신경이 로마 가톨릭의 유산이라고 여겨 아예 그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교회가 유구한 역사 속에서 수많은 분열을 거듭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핵분열 가운데서도 사도신경은 거의 모든 교파와 교단과 교회들이 별 거부감 없이 공통으로 수용한 신앙고백이라는 점을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사도신경을 성경의 위치에 올려놓자는 뜻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성경에 벗어나지 않는 한 전통을 소중하게 여기는 정신도 필요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불필요한 교리적 혼란과 성경 해석의 혼란만 가중되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이 지금의 형식과 내용으로 완성되고 공인된 것은 중세시대일지 모르지만 이 신앙고백의 기본 형식과 핵심 내용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인 초대교회 시절부터 통용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사도신경과 지옥강하 문구의 역사 현재 통용되는 사도신경과 동일한 내용의 본문이 공인 본문으로써는 12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세례식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지만 그 내용이 확증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이다. 이 사도신경의 내용의 대부분은 650년 경의 것으로 보이는 고대 갈리아 예배문에 1인칭 신앙고백의 형태로 나타나고, 또한 8세기 수도사 피르미니우스(St. Pirminius = Pirmin 삐르맹)의 책 속에서는 1인칭의 고백 형식이 아닌 2인칭의 질문 형식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사도신경이 최소한 5세기 후반에 이미 오늘날과 같은 최종 형태가 통용되었으리라고 본다. 왜냐하면 341년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로마의 신앙고백이 라틴어 판뿐만 아니라 헬라어 판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것을 고대 로마 신경(Symbolum Romana)이라 부른다. 고대 로마 신경의 라틴어 판은 티라니우스 루피누스(Tyrannius Rufinus)의 신경 해설서에서, 그리고 이것의 번역으로 보이는 헬라어 판은 로마 감독 율리우스(Julius)에게 보낸 안키라(Ancyra)의 마르켈리우스(Marcellius)의 편지 속에서 각각 발견된다. 이 두 문서의 차이라면 헬라어 판이 “영원한 생명을”이라는 문구로 끝나지만, 이 두 단어가 라틴어 판에서는 없다는 것이다. 이 두 신경과 유사한 내용의 신앙고백이 3세기 초중반에 활동한 교부들인 이레네우스와 터툴리아누스의 글들에게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고대 로마 신경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도신경과 내용상 정확하게 동일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의 형성 역사를 최소한 3세기 이전으로 잡아야 한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고대 로마 신경을 소개한 루피누스는 자신의 고향 아퀼레이아(Aquileia)의 교회가 사용하던 신경도 소개하고 있는데 아퀼레이아 신경은 고대 로마 신경에 내용이 좀 더 추가되어 있다. 이 신앙고백은 약 390년, 혹은 약 404년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신경에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문제의 문구가 삽입되어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문서 가운데 이 문구가 삽입되어 있는 신앙고백으로는 이것이 최초이다. 이 문구가 동방교회의 문서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360년경의 아리우스(Arius) 신조이다. 이 문구는 아퀼레이아 신경 속에는 있지만, 이 신경과 비슷한 시기에 로마 교회에서 사용되던 신앙고백에는 빠져 있는데, 이것 역시 루피누스의 책에 들어 있다. 이 문구는 아타나시우스 신경과 650년경의 고대 갈리아 예배문에도 들어 있다. 또한 4세기 중반에 시리아 교회들이 받아들인 공식 문서에도 이 문구가 들어 있다. 이 문구가 들어 있는 공인본문인 사도신경은 모든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수용되었고, 따라서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장로교회 및 영국성공회도 사도신경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그 후에 생성된 개신교 여러 교파들 역시 예외 없이 사도신경을 교회의 공식 문서로 받아들였으나, 웨슬리가 세운 감리교는 이 사도신경에서 그 문구를 삭제하고 받아들였다.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이 작성한 거의 모든 교리교육서인 교리문답서에서 우리는 사도신경이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어졌는가를 잘 알 수 있다.1) 고신교회가 공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17세기의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와 소교리문답서 역시 사도신경을 공적인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는데,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문구에 대해서는 대교리문답 50문과 소교리문답 27문에서 각각 언급되어 있다.
최근 영국교회와 미국의 복음주의 루터교단은 “음부에 내려가사”(descended into hell) 대신에 “죽은 자들에게 내려가사”(descended to the dead)로 번역된 사도신경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현재 한국에서는 천주교가 이 부분을 “저승에 가시어”로 번역했고, 성공회는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시어”로 번역한 반면에, 모든 개신교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감리교처럼 이 부분을 빼고 사도신경을 번역했는데 이것은 한국의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이 선교 연합을 위해 도출된 합의 결과이다. “음부에 내려가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6세기 이래로 천주교의 연옥 개념을 거부한 개신교회는 이 문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음부”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지옥을 의미하는 장소인지, 아니면 죽은 자들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도 아니면 단지 무엇인가를 상징하는 것인지의 문제는 아직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거리이다. 유명한 미국의 교회사가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이 구절에 대한 개신교회의 해석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는 이 문구가 “장사되고”와 동일시되거나 그리스도께서 부활 전까지 죽음의 상태와 죽음의 권세 아래 계셨다는 해석인데,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회의에 참석한 학자들의 견해라는 것이다. 둘째는 칼빈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따른 해석으로써 그 구절이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을 위해 지옥의 고통을 맛보신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해석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에 실제로 모든 죽은 영혼들에게 친히 나타나셨다는 것인데, 이것은 초대교회의 신앙에 따른 역사적 해설이라는 것이다. 샤프는 친절하게 이 세 가지 해석의 단점들도 지적하는데, 첫째 해석의 단점은 압축된 신앙고백이 불필요한 반복을 제공하는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고, 둘째 해석의 단점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 있는 그 구절의 배열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며, 셋째 해석의 단점은 강하의 목적과 효력에 대한 탁상공론이 난무하게 된다는 것이다. 샤프가 구분한 이 세 가지 해석 가운데 첫째 해석과 둘째 해석은 사실상 큰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둘 다 상징적 해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셋째 해석은 첫째와 둘째의 해석과는 구분된다. 왜냐하면 세 번째 해석은 상징적이기 보다는 문자적이며, 따라서 공간과 장소 개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 세 번째 해석과 잘 어울리는 주장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의 승리를 죽은 자들에게까지 알리시기 위해 그들에게로 내려가셨다는 것이다. 전통적 개혁교회 내에도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학자들마다 분분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대체로 이러한 해석의 다양성들은 웨스트민스터 대소교리문답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제시하는 해석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 문구와 관련한 칼빈의 견해가 무엇인지는 다음과 같이 1542년의 제네바 교리문답서 65문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답: 그분이[=그리스도께서] 육으로부터 영의 분리를 뜻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죽음을 감내하셨을 뿐만 아니라, 베드로가 말하는 것처럼(행 2:24) “죽음의 고통”까지도 [감내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끔찍한 괴로움들이라는 것을 명목상으로만 이해할 뿐인데, 그분의 영혼은 저것들에 의해 옥죄어졌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44문 역시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말이 왜 덧붙여졌습니까?’라고 묻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써 이 교리문답서의 저자 우르시누스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그리스도의 지옥강하의 열매를 설명한다.
“음부에 내려가사”라는 문구에 대한 칼빈과 우르시누스의 해석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문자적이 아니라 상징적 해석이라는 것과 이러한 해석을 위한 성경의 강력한 지지 구절로써 사도행전 2장 24절에 호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상징적 해석의 전제는 아마도 이 구절이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의 마지막 지점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즉 칼빈과 우르시누스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지옥, 혹은 음부에 실제로 내려가신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육체가 영혼과 분리된 채 장사되어 3일 동안 무덤에 있었던 것처럼 육체와 분리된 그리스도의 영혼 역시 우리를 위해 지옥과 같은 죽음의 고통을 감내하셨다. 샤프가 둘째 해석을 비판한 것은 바로 이런 점을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도신경의 이 구절은 결코 불필요한 것으로 볼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단순히 죄의 결과인 죽음뿐만 아니라 죽음의 결과인 음부의 권세까지도 완벽하게 제압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웅변적으로 선포하는 문구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에서는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을 부활과 승천과 성부 우편에 앉으심으로 기술하는데, 여기서 마지막 단계인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라는 문구 역시 문자적인 묘사가 아니라 상징적인 묘사이다. 사도신경은 아마도 이 세 단계의 높아지심과 대조되는 구조의 균형을 위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됨에다가 “음부에 내려가사”를 첨가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우리는 이 문구를 종교개혁가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예들까지도 중요하게 여기고 강조했다는 점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문구가 성경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는가 하는 것은 여기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듯하다. 결론적으로, 존경받는 신앙의 선배들은 과연 이 문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으며 역사 속의 교회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충분히 알고 고려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문구가 이 시대에도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 그래서 이것을 뺄 것이지 말 것인지를 보다 바르게 결정할 수 있고, 또한 뺀다면 어떤 정당한 근거 위에서 그것이 가능한지 보다 분명하게 인식하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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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8월 22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