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엘리자베스 치하의 ‘영국교회’

메리가 사망하자 그녀의 이복동생이었던 엘리자베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그녀는 25세의 처녀였다. 엘리자베스는 이때로부터 1603년까지 45년간 재임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
엘리자베스의 즉위는 영국 국민들로부터 거국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때는 스페인의 전제 정치를 경험한 후였으므로 외국과의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여왕을 맞이한다는 것은 일종의 구원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왕 메리는 당시 스페인의 왕위 계승자 필립과 결혼하였는데, 필립은 결혼협정문에서 프랑스와의 전쟁에 영국을 끌어넣지 않겠다고 약속했었으나 후일 이 약속을 어기고 프랑스와의 전쟁에 영국을 끌어들임으로 영국이 이유 없는(?) 전화를 경험하였기 때문에 외국과의 혈연관계가 없는 점만으로도 엘리자베스는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순수한 영국 혈통을 지닌 여왕이었다. 치세를 통하여 그녀는 국민들의 비위를 잘 맞추어 나갔고 지혜롭게 통치하였다. 그녀는 검소한 성품을 지닌 여왕이었는데 이점도 국민에게 환영을 받았다. 인색함은 일반 국민들에게 악덕일 수 있지만 왕후에게는 미덕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전쟁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가끔 전쟁도 했으나 승리하였고 위험한 경우는 될 수 있는 대로 회피하였다.
   엘리자베스는 한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백성들의 의사를 거역하였는데, 그것은 그녀의 결혼 문제였다. 후계자를 확보하는 일이 시급한 문제였으므로 하윈은 그녀에게 결혼하도록 요구하였다. 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는 일은 그녀 개인의 생명에도 위험하게 보였지만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왕은 끝내 이를 거부하였다.
   어떤 역사가는 엘리자베스는 ‘요정의 여왕’(Faery Queen) 혹은 ‘글로리아나’(Gloriana)라는 별명을 좋아하였고 결혼에 대해서는 생리적인 공포감을 갖고 있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또 그녀는 모친이 될 자격이 없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녀로 늙기를 결심하였다고 한다. 어쨌든 그녀는 결혼하지 않은 채 처녀로 지냈고 자녀를 남기지 못한 채 1603년 사망하였다.


엘리자베스의 종교정책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그녀의 종교정책이다. 후일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의 교회개혁을 마무리하고 영국 국교를 확립한 여왕이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지만 그녀가 왕위에 오를 당시에는 종교적 성향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프로테스탄트에 동조적이라는 사실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메리가 정치적 필요성에 따라 가톨릭교도였듯이 엘리자베스는 이와 비슷한 이유로 프로테스탄트일 수밖에 없었다.
   메리는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녀의 어머니 케더린과 헨리 8세의 결혼이 유효해야 했고 따라서 헨리 8세의 수장령 발표(1534) 이전의 상태, 곧 영국 교회의 수장이 왕이 아니라 교황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녀의 종교적 신념과 관계없이 정치적으로 가톨릭교도이어야만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는 프로테스탄트일 수밖에 없었다. 만일 케더린과 헨리 8세의 결혼이 유효하다면 앤 볼렌과 헨리 8세 사이의 소생인 엘리자베스 자신은 사생아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일 수 없다. 엘리자베스가 합법적인 왕위 계승자이기 위해서는 그녀의 어머니 앤 볼렌과 헨리 8세의 결혼이 합법적이어야 했다. 즉 이 점은 케더린과 헨리 8세의 결혼은 무효라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엘리자베스는 영국교회의 수장이 교황이 아니라 국왕이라는 영국교회적인 입장을 따랐다. 따라서 그녀는 프로테스탄트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즉위 사실조차 교황에게 통보하지 않았고, 왕이 되자 곧장 로마에 주재하고 있던 영국 대사를 소환하였다. 이것은 그녀의 종교적 성향을 보여주는 표현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즉위하자 메리 치하에서 영국을 떠났던 많은 종교적 망명객들이 귀국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대륙의 개혁사상 특히 칼빈주의의 사상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엘리자베스는 즉위한지 3일 후, 윌리암 세실(William Cecil, 1520~1598)을 국무대신으로 임명했는데, 그는 후일 버글리 경(Lord Burghley)이라고 불린 인물로서 확고하고도 온건한 프로테스탄트였다. 세실은 이때로부터 40년간 여왕을 보필하였다. 이와 같은 점들은 엘리자베스의 종교적 성향과 그의 종교정책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일들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진정한 의미의 프로테스탄트는 아니었다. 그녀는 영국에 우선 평화와 안정이 필요하다고 보고 교회와 국가를 위해 ‘중도의 길’(Via media)을 추구하였을 뿐이다. 이복동생이었던 에드워드가 지나치게 프로테스탄트였던 점, 이복언니였던 메리가 지나치게 가톨릭적이었던 것으로 인한 극단적인 대립과 종교적 적대감을 보아왔던 그녀는 중용의 길을 추구함으로써 가톨릭이나 극단적인 프로테스탄트 양측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지지를 획득할 수 있다는 정략적인 목표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종교정책이 단순히 정략적인 것에 의해 좌우되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미 윌리암 호가드(William P. Haugard)가 1768년에 출판한 「엘리자베스 여왕과 영국교회개혁」(Elizabeth and English Reformation)에서 표명했던 바처럼 엘리자베스는 정치적 동기에서 보다 자신의 종교적 확신으로 영국교회를 이끌어 갔다. 다시 말하면 그녀는 국가 정책으로써 뿐만 아니라 개인적 확신에 의해서도 영국교회의 신조에 치리를 수행하여 가톨릭과 극단적인 프로테스탄트 양쪽 모두를 억제시키고자 하였다. 확실히 그녀는 중도노선을 걸어갔다. 그래서 존 낙스(John Knox)는 엘리자베스를 가리켜 “훌륭한 프로테스탄트도 아니고 확실한 교황주의자도 아니다.”라고 평가하였다. 비록 중도노선이라고는 하지만 그녀가 가톨릭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녀는 프로테트탄트적이었고 영국교회의 공예배에 참석하는 한 일체의 프로테스탄트들을 기꺼이 수용하였다.


국교회 제도의 확립
엘리자베스의 종교정책, 곧 그녀의 영국교회 신앙 확립을 위한 노력은 1559년 구체화되었다. 그해 4월, 의회는 로마 교황의 재판권을 배격하고 영국 왕 엘리자베스의 수장을 인정하는 ‘수장령’을 재확인하고 메리 치하에서 제정된 법령들을 철폐하였다. 이것은 영국교회를 교황의 치하에 두도록 하였던 메리의 종교정책, 곧 가톨릭에로의 복귀를 철폐하고 영국 국교회 제도를 공고히 하려는 시도였다. 이 당시 가톨릭측은 여왕이 ‘영국교회의 최고 우두머리’(Suprreme head)라는 칭호에 반대하였으므로 이전의 수장령에서 약간 수정하여 영국 왕은 “영국 교회의 최고 통치자”(Supreme governor)라고 규정하였다. 이 수령장의 발표에 의해 영국 국왕 하의 모든 관리와 법관, 성직자들은 ‘수장에 대한 맹세’(Oath of supremacy)에 서명하도록 요구되었고 이를 거부하는 이들은 공직에서 해임되었다. 이 당시 주교들은 대부분 이 메리에 의해 지명된 자들이었으므로 웨일즈지역 랜다프(Landaff)지역 주교인 안토니 키친(Anthony Kitichin)을 제외한 많은 주교들이 이 서약에 반대하였고 결국 파면당했다. 따라서 새로운 주교단을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일은 주로 캠브리지의 저명한 학자였던 매튜 파아커(Matthew Parker, 1504~1575)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는 후일 켄터버리 대주교가 되었다. 파아커는 마르틴 부쩌(Martin Bucer)의 제자였는데 메리 치하에서 망명하였던 인물들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었다. 따라서 망명에서 돌아오는 인물들 가운데서 주교로 임명된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보다 철저한 프로테스탄트였다. 새로 임명된 주교들 중에 잘 알려진 인물들로는 쥬엘(Jewel), 스코리(Scory), 필킹톤(Pilkington), 그리고 리차드 데이비스(Richard Davies) 등이었다.

새 ‘수장령’의 공포와 함께 1559년 4월 27일, 의회는 새로운 ‘통일령’(Act of Uniformity)을 통과시켰다. 이 통일령은 1552년의 기도서 곧 메리의 통치 이전의 에드워드 치하에서 작성된 프로테스탄트적인 기도서를 일부 수정하여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다. 1549년 판과 1552년 판의 ‘기도서’(Second Prayer Book)를 일부 수정한 1559년의 기도서는 가톨릭측의 반발을 무마시키면서도 개신교측의 입장을 수용하는 선에서 배려된 포용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성찬에 관한 견해는 가장 첨예한 견해차를 보인 신학적 주제였는데 영적 임재를 주장하는 개신교측의 입장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실제 임재설을 지지하는 이들의 입장을 수용하였다. 새로운 기도서의 성찬에 관한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그대의 육체와 영혼을 영생으로 보존하기위해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니라. 믿음과 감사의 마음으로 이 예식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그대를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이 식사(式辭)의 이중적 구조는 성찬은 단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는 이들과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이들을 다 포용하기 위한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39개조’
1563년 회집한 제2차 의회에서는 1559년에 공포했던 ‘통일령’을 재확인하는 한편 이를 강행할 수 있는 방안들을 강구하였다. 같은 해 켄터버리에서 모인 주교단, 곧 성직자 회의(Convocation of the Clergy)는 에드워드 6세 때인 1553년에 나온 ‘42개조’(Forty two Articles)를 개정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에 보다 적합한 신학적, 교리적 입장을 확립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러한 노력 끝에 ‘39개조’(Thrity-nine Articles)가 작성되었다. 동년 영국 하원은 이를 공식 채택했는데 여왕이 이를 공식 승인한 때는 1571년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이 문서는 영국교회의 신앙 강령으로 공식적으로 공포되었다. 이 ‘39개조’는 영국교회, 곧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기본 강력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국교회의 교리적 지침이 되고 있다.
   이 문서에서는 지나치게 미묘한 사안들이나 극단주의적 입장은 배제하고 보다 원만한 노선을 추구하였다. 가톨릭의 입장은 노골적으로 거부되고 있으나 서로 다른 프로테스탄트 입장 가운데서는 반드시 어느 하나만의 입장을 고수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예컨대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임재(Real Presence of Christ in Eucharist)의 문제는 신학적으로 미묘한 문제였는데 이 ‘39개조’에서는 가톨릭의 화체설은 명확하게 부인하였지만, 다른 한편 쯔빙글리적인 상징설 또한 부인하였다. 그리고 조심스런 문구를 사용하여 어느 한편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았다. 
   또 성경은 신앙의 근본 척도로 선언되었고 예정설도 수납하였으나 칼빈주의적 입장은 아니었다. 그리고 면죄부의 유효성, 연옥 교리, 성상이나 성자숭배도 배격하였다. 가톨릭의 일곱 가지 성례도 부인하고 세례와 성찬만을 성례로 간주하였다. 유아세례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으로 주장되었다. 이렇게 볼 때 ‘39개조’는 확실히 개신교적이었고 칼빈주의적인 측면도 없지 않았지만 좀 더 철저한 개혁자들이 볼 때는 지나치게 중용적이었다. 그래서 이 ‘39개조’에서는 의식적으로 ‘중용의 길’(via media)을 추구하여 가톨릭이나 극단적 프로테스탄트만 제외하면 다 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바로 이때로부터 중용의 길은 영국교회의 뚜렷한 특징이 되었다. 정리해서 말하면 ‘영국교회의 신앙고백서인 39개조’는 루터교와 개혁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뚜렷하다.


로마 가톨릭교도에 대한 탄압
당시 벤티볼리오(Bentivoglio) 추기경은 영국 국민의 30분의 1이 열렬한 가톨릭교도라고 추정했고, 전체의 5분의 4는 불법이라면 궐기하지 못하지만 합법이라 한다면 가톨릭으로 복귀할 자세를 갖추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메리치하에서 열렬한 개신교도를 2천 명이나 제거했는데도 당시 8천명의 성직자 중에서 7천 명이 엘리자베스의 개혁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되자 가톨릭교도들은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신부들은 비밀리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비교적 관용적이었다. 그녀는 치세 초기 10년간 종교적 이유로 사형에 처한 일은 단 한 건도 없었다. 
   그러나 세 가지 사건이 세실과 월싱햄(Francis Walshingham)으로 하여금 가톨릭교도에 대한 보다 강력한 제재 조치를 강구하게 하였다. 또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이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세 가지 사건이란, 첫째로 파리에서 있었던 성 바돌로매 날의 학살사건(1572년 8월 24일)이다. 다수의 프로테스탄트들이 나바르공의 앙리(Henry of Navarre)와 로마 가톨릭교도 마그리트(Marguerit de Medici)의 결혼식날에 파리로 유인되었고 8월 24일 미명 성 제르마인(St. Germain) 성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개신교도 7만 혹은 10만 명을 학살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두 번째는 여왕을 파문하는 교황 피우스 5세(Pius Ⅴ)의 칙서가 전달된 일이다. 교황은 ‘레그난스 인 엑셀시스’(Regnans in excelsis) 칙령을 내려 1570년 2월 25일 엘리자베스 영왕을 파문하였다.
   세 번째는 프랑스 북부 두에(Douai)라는 곳에 영국에서의 가톨릭교회를 재건할 목적으로 신학교가 설립된 일이다.
   이 세 가지 일은 왕에게는 위협적인 일이었다. 특히 교황이 왕을 파문한다는 것은 신민을 왕에 대한 충성으로부터 해제하는 의미가 있었으므로 교황은 엘리자베스를 암살하는 자를 기꺼이 용서할 것이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이것을 실증이라도 하듯이 1580년 12월 교황청 대신은 영국 예수회(Jesuits)의 명의로 제출된 질문에 대하여 “수백만의 영혼이 신앙을 상실케 되는 원인이 이 여자에게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신에게 봉사한다는 경건한 의도에서 그녀를 세상 밖으로 추방한다는 것은 범법이 아니라 오히려 공적을 세우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답변은 실로 위협적인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여왕은 가톨릭교도들에 대해서 보다 강경한 태도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1570년 이후 영국에서는 가톨릭교도나 그 성직자들이 이단자로서가 아니라 대역죄로 처형되었다. 1571년 의회는 몇 가지 반교황적 법안들을 통과시켜 영국 국토 내에 교황의 칙령 반입을 금지시키고 엘리자베스 여왕을 이단이라고 하든가, 반역자, 종교분열자라고 하는 자들은 대역죄로 다스리겠다고 선포하였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여왕은 재위 10여년이 지난 후부터 재위 기간 동안 147명의 성직자와 47명의 지방귀족을 포함한 221명의 가톨릭교도를 처형하였다.
   엘리자베스 치하에서 가톨릭교도들이 여왕에 대한 무력항쟁을 정당화하여 왔으므로 이들은 대역죄로 다스려졌지만 청교도들도 탄압을 받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청교도란 영국교회 내에 여전히 남아 있는 로마교적 잔재를 제거하기 위해 싸웠던 신앙집단을 의미하는데, 이들은 엘리자베스의 종교정책에 만족하지 못했다. 칼빈주의적인 청교도들은 국교회 안에 남아 있는 가톨릭적 잔재를 청산하고 ‘바벨론의 창녀 냄새를 풍기는’ 모든 성직 계급까지 폐지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들도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