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헨리 치하의 ‘영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영국의 로마가톨릭’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개혁  
영국에서 헨리 8세가 소위 ‘수장령’을 발표하고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였을 때, 이것은 영국 교회의 분립이었지 엄밀한 의미에서의 교회개혁으로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영국교회는 로마 가톨릭의 전통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헨리 8세는 행정적으로 로마와 단절했을 뿐 종교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로마 가톨릭적이었다.
   헨리 8세가 로마 가톨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교회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수장권을 주장하는 법적 조치들을 취했을 때 모든 공무원과 성직자들은 앤과의 결혼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헨리는 국왕으로서 영국교회의 유일한 지상의 우두머리라는 수장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대역죄로 처벌되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이 당시 제정, 입법된 반가톨릭적 법령들로는 ‘초수입세법’(Annates Bill, 1532년 3월), ‘성직자 복종법’(Act for the Submission of the Clergy, 1532년 5월 15일), ‘로마에 대한 청원 제한법’(Act in Restraint of Appeals to Rome,1533년 3월) 등인데 이러한 법률들은 교황의 영국지배권을 단절하고 종교 문제에 대한 국왕의 권위를 강화할 목적으로 입안된 것들이었다.
   ‘초수입세법’이란 성직 수임시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을 막고 왕이 주교로 임명한 사람에 대한 교황의 반대를 사전에 무효화하기 위한 법안이었다. ‘성직자 복종법’이란 교회의 모든 법들이 왕실 위원회의 심사를 받도록 하고 왕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교회법도 입법될 수 없도록 규정한 법이었다. ‘로마에 대한 청원 제한법’은 교회문제에 있어서 교황청과의 단절을 위한 것으로서 영국 영토는 교황의 사법권에서 독립하였음을 선언한 문서였다. 이 문서에 기초하여 토마스 크랜머는 1533년 5월 23일 헨리 8세와 케더린과의 결혼은 무효이며 앤 볼렌과의 결혼은 합법적임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이때 교황은 헨리가 9월까지 앤을 내보내고 케더린을 다시 받아들이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하고(1533년 7월 11일), 헨리와 케더린의 결혼은 유효함을 확인하였다(1534년 5월 23일). 그러나 헨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1534년 7월 교황 바오로 3세는 헨리와 앤, 그리고 크랜머를 파문하였다. 이때 교황이 헨리를 이단이 아니라 이교(離敎)문제로 파문한 것은 헨리의 종교정책이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이상의 법령 외에도 ‘시여법’(Act of Dispensation)을 통해 로마에 돈을 내는 모든 행위는 금지되었고, ‘계승법’(Act of Succession)을 통해 모든 사람들을 헨리와 앤과의 결혼을 합법성과 그 결혼을 통해 태어날 자녀의 왕위계승권에 서명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러한 반 가톨릭적 법령들을 거부하는 자들은 처형되었는데 그 첫 희생자는 카르투지오회(Carthusian) 수도사들로 이들은 1535년 5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당시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계승법’에 대한 순종을 서약했지만 이를 거부했던 엄수파 프란시스코교단 수도원들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이 수도원의 몰수는 앞으로 있을 수도원 해산의 전조였다. 헨리 8세의 반 가톨릭적 정책 수행을 심의, 자문, 수행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 1485-1540)과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였는데, 특히 크롬웰은 유능한 행정가로서 영국의 변화를 주도하였다. 그는 당시 1,200여 개로 알려진 수도원 재산을 조사하고 이를 기초로 하여 수도원 해산법안을 의회에 상정, 통과시키므로 1540년 이전까지 거의 모든 수도원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모든 수도원 재산은 환수재산처리법원(Court of Augmentation)에 귀속되었는데, 이 법원은 재산을 처분할 권리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불만을 가중시켜 소위 ‘은총의 순례’(Pilgrimage of Grace)라는 이름의 반란으로 표출되었고 결국 무장봉기로 발전하였다. 봉기는 진압되었고 이 일로 180여 명이 처형되기도 했다.
   그 당시 로체스터(Rochester)의 주교인 죤 피셔(John Fischer, 1469-1535)와 「유토피아」(
Utopia)의 작자이자 수상을 지낸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의 처형은 보다 상징적이었다. 죤 피셔는 가톨릭 신앙을 부인하기를 거부하고 ‘계승법’에 서명하지 않았으므로 체포되었고 1535년 6월 22일 처형되었다. 그의 머리는 런던교에 효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법관을 역임한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의 개인적 친구였지만 그 역시 ‘계승법’을 인정하지 않아 체포되었고 1535년 7월 6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그는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던 당대의 특출한 학자였는데 투옥기간 중 ‘계승법’에 서명하라는 딸의 간청을 받고 “나는 이제까지 타인의 등에 나의 양심을 짐 지운 일이 없었다.”는 말로 거절하였고, 재판정에서는 자신은 “국왕이 교회의 수장임을 부인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단지 이를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는데, 누군가가 무엇을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없다.”고 스스로 변호하였다고 한다. 그는 피셔가 처형된 후 꼭 2주일 만에 “국왕의 충실한 종복, 그러나 그보다도 신에게 충실한 종복”이라고 외치고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들이 처형된 후 400년이 지난 1935년 가톨릭교회는 피셔와 토마스 모어를 공식적으로 성자로 축성하였다.


영국교회의 형성
여기서 헨리 시대의 종교개혁, 아니 종교적 입장에 대해 정리해 두고자 한다.
   ‘수장령’을 발표하고 로마 가톨릭과 분립한지 약 2년이 지난 1536년 7월에 성직자 회의를 통해 채택, 반포된 ‘10개조’(Ten Articles)에서는 루터주의 쪽으로 약간 기운 듯했다. 일례로 성례에 대한 조항을 보면 오직 세례, 성찬, 고해성사만을 언급하면서도 가톨릭이 인정하는 다른 4성례의 합법성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또 성찬관에 있어서도 루터의 공재설(共在說)로도 해석할 수 있고, 화체설(化體說)로도 해석할 수 있는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교회 내부에 있던 미신적 관습의 남용에 대한 경고는 있지만 성상이나 성골 숭배는 폐지되지 않고 있었다. 파커(T. M. Parker)의 지적처럼 ‘10개 조항’은 “교묘하고도 모호한 최초의 문서”였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문서는 정치적 배려의 결과였다. 당시 황제 칼 5세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동맹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루터측의 개신교 군주들의 협조가 필요했으므로 루터파와 가까워진 것처럼 모호한 입장을 취했을 따름이다.


1539년에는 ‘6개 조항법’(Act of Six articles)을 가결하였다. ‘6개 조항법’에서 화체설을 지지하고, 성찬에서는 떡만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성직자의 독신생활, 개인미사, 고해성사 등을 강조하였다. 즉 이전의 가톨릭 교리가 그대로 적법한 것으로 강조되었고 교황의 최고 우위성만이 제외되었을 뿐이다. 즉 이 문서는 헨리와 영국교회가 친가톨릭적으로 변화된 신학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문서 또한 정략적 목적이 있었지만 영국내의 루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 법은 가혹하리만큼 엄격하였는데 화체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화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정치적 상황의 변화로 독일 개신교의 도움이나 지원이 필요 없게 되자 가톨릭 교의를 더욱 확고히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친 독일(루터파) 정책을 주도하며 헨리를 보좌하였던 크롬웰은 반역죄로 고발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1540년 7월 28일 처형되었다. 1543년에는 「필요한 교리와 기독교인의 박식함」(
The Necessary Doctrine and Erudition of a Christian man)이란 책을 출판토록 하였는데, ‘왕의 책’이라고도 불린 이 책에서는 명백하게 반(反)개신교적 입장을 보여 주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헨리 8세의 교회분립은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 개혁이나 복음주의 운동으로 볼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헨리 치하에서는 영국 교회가 가톨릭회로부터 분립했을 따름이지 교회는 개혁되지 못했다. 다소 모순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헨리는 영국의 로마 가톨릭교회를 원했던 것이다.
   한 가지 특기할 일은 헨리 시대에 성경이 영역(英譯)되었고 누구든지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1535년 말 커버데일(Coverdale, 1488~1596)에 의해 커버데일판(
Coverdale Version)이 출판되었다. 이 번역본은 성경을 번역한 죄로 처형된 틴델의 틴델역(Tyndale's Version, 1524~1534)의 수정본에 지나지 않았지만, 공식적으로 허용된 최초의 영역 성경이 되었다.
   1537경에는 메튜성경(
Mattew's Bible)이 출간되었는데 캠브리지 출신으로 윌리엄 틴델에 의해 개종한 존 로저스(John Rogers)가 메튜란 필명으로 영역, 출간한 것이었다. 그는 후일 메리 여왕 치하에서 첫 순교자가 되었다.
   1539년 4월에는 커버데일이 메튜성경을 수정, 편집한 ‘대성경’(
Great Bible)이 출간되었는데, 이 성경은 크롬웰의 강력한 후원 아래 이루어졌고, 영국교회의 공식 성경이 되었다. 이제 영국인들은 누구나 성경을 소지하거나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영국에서의 진정한 개혁을 위한 작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헨리 8세의 결혼생활
다시 헨리의 결혼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 이후의 변화에 대해 잠시 언급해 보자. 헨리는 케더린과 이혼하고 1533년 1월 앤과 결혼하였으나 앤은 딸 엘리자베스를 낳았을 뿐 후사가 될 아들을 낳지 못했다. 결국 왕의 애정은 식어져갔고 앤은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간음의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다. 이번에도 크랜머는 침수된 앤의 은밀한 이야기를 이유로 왕과 그녀와의 결혼을 무효로 만들었기 때문에 케더린의 소생 메리(Mary)처럼 엘리자베스도 서자가 되었다.
   며칠 후 왕은 백의를 입은 채 제인시머(Jane Seymour)와 세 번째 결혼을 하였다. 제인 시머는 후일 에드워드 6세란 이름으로 왕위에 오른 아들을 낳았으나 산욕열(産褥熱)로 곧 사망하였다. 왕비가 사망하자 전부터 왕을 루터파와 접근토록 친독일 정책을 옹호하던 크롬웰은 당시 영국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여 독일 클레브가(家)의 앤(Anne of Cleves)과 정략결혼을 하도록 주선하였다. 이것이 왕의 네 번째 결혼이었다. 이 책략가는 중매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하려고 하였으나 그녀가 왕의 총애를 얻는데 실패하자 크롬웰은 생명을 대가로 치르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바처럼 크롬웰은 반역죄로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왕의 다섯 번째 왕비는 케더린 하워드(Catherine Howard)였는데 그녀도 간통죄로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왕의 여섯 번째 왕비는 케더린 파(catherine Parr)였는데 그녀는 비록 처형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왕보다 장수하였다.
   이와 같이 헨리 8세는 결혼생활이 복잡하였다. 그는 여섯 번 결혼하였는데, 이 중 두 명은 이혼을 당했고 두 명은 처형되었고, 한 명은 해산때 사망하였고 나머지 한 사람은 사형령이 내려져 있었으나 왕이 먼저 죽음으로써 왕보다 오래 살게 되었다.
   헨리 8세는 절대 권력을 행사하였고 많은 가톨릭교도를 학살했는가 하면 완전한 개혁을 요구하던 신교도들을 처형하였다. 런던탑의 단두대와 스미스 필드(Smith field)의 화형장은 그의 통치의 속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증거들이다.
   두 왕비가 처형되었고 왕의 정책을 수행했던 크롬웰도 처형되었을 때 왕의 총애를 받고 1533년 3월 30일 켄터버리 대주교로 임명된 크랜머까지도 처형의 위험을 느끼고 있었으나 헨리 8세는 자기처럼 무서운 왕을 순진할 정도로 신뢰하고 있던 이 사람에게만은 진실한 애정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1509년 18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오른 헨리 8세는 38년간의 통치를 끝내고 1547년 크랜머의 품 안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이제 헨리 8세의 시대는 끝나고 그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므로 에드워드 6세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