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영국에서의 개혁운동


지금까지 우리는 루터를 중심으로 한 독일에서의 교회개혁, 곧 교회개혁운동과 쯔빙글리와 칼빈을 중심으로 한 스위스에서의 개혁운동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루터의 개혁운동은 후일 루터란(Lutheran), 곧 루터파를 형성하였고, 취리히를 중심으로 한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은 제네바를 중심으로 전개된 칼빈의 개혁운동과 더불어 개혁파(Reformed)교회를 형성하였음을 이미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도버해협을 건너가 영국에서의 개혁운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영국’이라고 말할 때 지금의 대영제국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16세기 당시는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별개의 국가였고 상호 심각한 대립과 갈등을 겪기도 했으므로 많은 점에서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영국이란 이름 그대로 잉글랜드를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영국에서의 개혁은 독일과 스위스, 혹은 스코틀랜드에서의 개혁운동과는 판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루터나 쯔빙글리 혹은 칼빈은 순수한 신앙적, 신학적 동기에서 출발하여 복음에 대한 열정과 확신에서 반(反)교황적, 반교권적 복음주의 신학운동을 전개하여 고난과 탄압의 여정을 겪었으나 영국에서의 개혁은 그 기원과 동기에 있어서 종교적(宗敎的)이거나 신학적(神學的)이지 못했다. 오히려 정치적(政治的)이었고 교회 정책적이고 행정적이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영국에서의 개혁운동은 영국 왕 헨리 8세(Henry Ⅷ, 1509-1547)의 이혼문제로 시작되었고 결국에는 영국의 교회를 가톨릭교회와 행정적으로 단절시킴으로써 소위 개혁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펴 본 대륙의 교회개혁과 스코틀랜드에서의 개혁운동은 교회의 인물들, 곧 개혁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영국에서의 개혁은 국왕에 의해 주도되었고 국가의 보호 하에 이루어졌다. 헨리 8세의 이혼문제로 야기된 영국교회의 로마와의 결별은 영국인들의 교회로서의 ‘영국교회(Church of England)’ 곧 ‘성공회’(聖公會)라는 국가적 혹은 민족적 기독교회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발전된 배경이 된 것은 영국의 영방교회적(領邦敎會的) 성격이다. 크게 발전된 영방교회는 로마와의 단절을 용이하게 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영국교회를 민족적 교회로 발전하도록 민족주의적 성격을 더하여 주었다. ‘영국교회’(Church of England)란 이름 자체가 민족주의적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헨리 8세가 영국의 교회들을 로마와 분리하여 소위 개혁을 단행하게 된 배경에는 영국 고유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지닌 영방교회 외에도 보다 복합적인 요인들이 있었다.
   즉 대륙의 교회개혁의 영향, 미미하게나마 꾸준히 이어져왔던 위클리프파의 영향도 그 중의 하나이다. 또 종교적인 인문주의자들의 영향과 교회활동에 대한 교황의 지나친 간섭에 대한 불만, 국왕의 결단력 있는 행동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요인들이 있었으나 영국에서의 개혁은 순수한 종교적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으므로 사실 ‘개혁’이라고 부르기에는 미흡한 점이 없지 않다. 단지 교황의 행정적 지배와 간섭 단절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영국교회’(성공회)의 위계제도, 전례와 의식, 신앙과 삶은 전통적 가톨릭회의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영국교회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중간적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영국에서의 개혁은 중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톨릭으로부터 떠났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가톨릭적 전통을 지니고 있고 개혁을 단행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루터나 쯔빙글리, 그리고 칼빈의 개혁이념과는 먼 거리에 있다는 점에서 중도적 개혁(中道 moderation)에 머물고 있다.
   혹자는 이 중도성 혹은 중용적인 성격을 영국의 개혁의 특유성이며 독자성이라고 말한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영국의 개혁은 교황제와 극단주의 사이의 ‘중용의 길’(via media)을 걸었다고 평하였는데, 이 표현은 영국에서의 개혁의 근본적 미흡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1. 헨리 8세의 이혼문제로 시작된 개혁


헨리8세의 결혼
영국에서의 개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헨리 7세로부터 시작되는 가계(家系)와 결혼, 그리고 권력계승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영국에서의 개혁운동은 헨리 8세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는 전임자인 헨리 7세의 아들이다. 헨리 7세(Henry Ⅶ, 1457-1509)는 튜더 왕조(Tudor Dynasty)를 창건한 인물인데 1485년 10월 30일 즉위하였다. 그는 에드워드 6세(Edward Ⅵ)의 장녀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였는데, 여기에는 혼인을 통해 양가의 상징인 붉은 장미와 흰 장미를 연합시킴으로써 후일의 내란 가능성을 소멸하고자 하는 정략적 동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헨리 7세 치하에서 반란과 음모는 계속되었고 평화는 꿈이었을 뿐이다.
   그는 그의 자녀들도 정략적 목적으로 당시 주요 권력자들에게 결혼시키는 소위 혼인외교를 폈다. 즉 그는 장남 아더(Arthur)를 스페인의 훼르디난드 왕(King Ferdinand)과 이사벨라 여왕(Queen Isabella)의 딸인 아라곤의 케더린(Catherine of Aragon)과 결혼시켰다. 당시 스페인은 프랑스와 함께 최대의 강국이었으므로 스페인과의 혼인을 통한 외교관계 수립은 국가 보위에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딸 마가렛(Margaret)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James Ⅳ)에게 출가시켰고, 또 다른 딸 메리(Mary)는 프랑스의 루이 12세(Louis Ⅶ)에게 주었다.
   헨리 7세의 장남이었던 아더가 결혼할 때는 14살이었는데(1501년) 결혼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왕위 계승자였던 그가 사망하자 자연히 그 동생 헨리가 왕의 계승자로 지목되었다. 과부가 된 아더의 아내였던 케더린은 아직 15살의 10대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형편에서 케더린과 헨리와의 결혼이 자연스럽게 거론되었다. 이 논의 역시 정략적, 외교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스페인은 아직도 10대 소녀에 지나지 않는 케더린을 청상과부로 남겨둘 수 없었으므로 그녀의 시동생으로써 이제 왕위 계승자가 된 헨리와 재혼하도록 제안하였다. 영국 쪽에서도 스페인과의 외교관계와 우호관계 유지를 위해 재혼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가톨릭교회는 이 같은 결혼을 반대하였다. 헨리가 형수였던 케더린과 결혼하는 데는 교회법적으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에 파견되어 있던 영국대사는 교황에게 특별사면을 요청하였으므로 당시 교황 쥴리우스 2세(Julius Ⅱ)는 ‘인족장애’(姻族障碍)를 면제해 주었다. 이것은 케더린이 시동생이었던 헨리와 결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특별조치였다. 말할 것도 없이 이것 역시 정치적 배려였다. 그래서 케더린은 아직 12살에 지나지 않았던 7살 연하의 헨리와 약혼하였고 헨리가 즉위한 후인 1509년 결혼식을 올렸다.
   에라스무스는 헨리와 케더린의 결혼을 ‘사랑과 정절의 이상적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미화된 칭송을 보냈으나, 이 결혼이 후일 영국의 정치는 물론 영국교회의 장래에 그토록 커다란 변혁을 가져올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헨리가 아버지 헨리 7세를 이어 헨리 8세(Henry Ⅷ, 1491-1547)란 이름으로 왕위를 계승했을 때는 1509년 4월 22일, 그의 나이 18세 때였다. 헨리 8세는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정치적 감각과 학문적 소양와 신학적 식견을 가진 매우 영특한 사람이었다. 1499년 에라스무스는 영국을 방문하여 아직 소년이었던 헨리를 만나본 후 그의 영민함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헨리는 르네상스 풍의 가정교사들에게 사사를 받았기에 언어적 재질과 학문적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각종 운동에 능했고 사냥, 승마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케더린에게도 문제가 없지 않았으나 헨리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루이스 스피츠에 의하면 헨리는 “소년시절 때부터 사람들에게 우상과 같은 대접을 받고 성장하여 고집이 세고 기회주의적이고 자기본위의 이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이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케더린이 아들을 낳지 못한 것이었다. 사실 케더린은 두 남아를 포함하여 6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딸 메리(Mary)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려서 죽고 말았다. 그래서 케더린이 아들을 낳아 왕위를 계승하는 데 실패한 일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국에서는 여왕이 국가를 통치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딸 메리를 왕위 계승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특히 영국에서는 처참할 정도의 왕위계승 전쟁을 경험한 후였기 때문에 헨리에게는 왕자가 절실히 필요하였다. 이제는 케더린에게서 남아출산을 기대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보였다. 이러한 형편에서 헨리는 자기 가문의 장래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고 그 염려는 궁중의 젊은 미모의 여인 앤 볼렌(Anne Boleyn,1507-136)에게서 새로운 소망으로 대치되고 있었다.


헨리8세의 이혼과 수장령의 발표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케더린과 헨리간의 결혼 자체를 문제시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교황이 과연 형수와 시동생의 결혼 금지 원칙을 유보시킬 권한이 있는지를 의심하고 있었고 헨리와 케더린 사이에 남아를 얻지 못한 것은 불의한 혼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레위기 20장 21절은 이 점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인식되었다. “누구든지 그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더러운 일이라 그가 그 형제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이 무자하리라.”
   이제 해결책은 자명해졌다. 헨리는 케더린과 이혼하고 앤 볼렌과 결혼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헨리는 케더린과 이혼한다기보다는 케더린과의 결혼 그 자체를 무효화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레위기 18장 16절과 20장 21절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케더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해 줄 것을 교황청에 요구하였다. 이때가 케더린과 결혼한 지 18년이 지난 1527년이었다. 헨리는 위의 성경 구절에 기초하여 형수와의 결혼금지 원칙은 교황에 의해서도 면제될 수 없다고 주장하여 교황의 ‘인족장애’에 대한 특별사면에도 불구하고 헨리와 그 형수 사이의 결혼은 불법이었으므로 처음부터 진정한 결혼관계가 성립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결혼 그 자체를 무효화하도록 했던 것이다. 공은 이제 교황에게로 넘겨졌다.
   당시 교황 클레멘트 7세(Clement Ⅶ)는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헨리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도, 거절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황제 찰스 5세는 케더린의 조카였으므로 케더린에게 불리한 결정은 찰스와의 관계를 급속히 냉각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찰스의 영향력이 매우 컸으므로 교황은 황제와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교황이 헨리 8세의 요구를 거절하기도 쉽지 않았다. 헨리는 철저한 가톨릭 신자였을 뿐만 아니라 가톨릭의 옹호자였기 때문이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95개조를 발표하고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비판하고 취소를 요구했을 때, 제일 처음으로 논문을 써서 루터를 공격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헨리였다. 그래서 그는 당시 교황 레오 10세로 부터 ‘신앙의 수호자’(Defensor Fidei, Defender of the faith)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래서 교황 클레멘트 7세는 사실상 헨리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도, 거절할 수도 없어 의도적으로 결정을 유보하고 있었다.
   헨리와 케더린과의 결혼관계와 이혼에 관한 토론은 그 이후 7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헨리에게 유리한 결정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교황은 이미 1530년에 헨리의 요구를 거절했다고 볼 수 있다. 교황으로부터 기대했던 해답을 얻지 못한 헨리는 혼인문제에 대한 다른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그는 켐브릿지 대학 교수였던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를 이용했다. 헨리는 그를 통해 혼인무효화 관철을 위한 자문을 구했고, 왕의 총애를 받은 크랜머는 1533년 3월 켄터버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1530년 경부터 헨리는 로마와의 결별을 위한 정책을 수행하기 시작하였고 각종 반(反) 가톨릭적 법안이 제정되었다. 그리고 헨리 8세는 1533년 앤볼렌과 은밀히 결혼하였다. 켄터버리 대주교로 임명된 크랜머는 헨리의 케더린과의 결혼이 무효임을 선언하고(1533년 5월 23일) 앤과의 결혼이 합법적임을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메리는 왕위 계승자로서의 위치를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사생아로 전락하였다.
   왕은 영국의 교회를 가톨릭회와 분리하여 로마와의 행정적 단절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영국의 왕일뿐만 아니라 영국 교회의 유일한 대표임을 선언하는 ‘수장령’(首長令)을 발표하였다. 이때가 1534년이었다. 영국의회는 국왕이 영국교회의 수장(Supreme head of the Church of England)임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왕을 가리켜 분파주의자, 혹은 이단이라고 칭하는 행위 자체를 모반죄에 해당한다고 못박음으로써 영국교회의 분리에 대한 비판의 여지를 법률적으로 봉쇄하였다. 이렇게 해서 영국교회는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이것은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