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은사 그리고 직분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정의한다. 이 몸의 지체들은 성도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불러 모으신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백성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의 전이다. 성경에서 알 수 있는 이와  같은 설명들을 오늘날 유행하는 신학 용어로 표현하자면 소위 ‘삼위일체적 교회’이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이며 그리스도의 몸일 뿐만 아니라, 성령의 전이다.


성령의 전이란 성령께서 거주하시는 장소를 의미한다. 이것은 구약의 성전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성전’, 즉 ‘하나님의 거처’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만 허락된 거룩하고 구별된 장소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구약의 성전을 허시고 삼일 만에 재건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재건하신 신약적 성전은 무엇인가?


주님 자신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주님께서는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성도들의 몸이 성령께서 거주하시는 성전이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들 안에 이들은 그리스도 안에 산다.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구성원들, 즉 성도들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하나님께서 그들 속에 거주하시기 때문에 성전이 되고 성도라 불리는 것이다. 성도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되 그 통치의 실제적인 메신저는 다름 아닌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령님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몸의 각 지체인 그리스도인들 사이뿐만 아니라 각 지체 사이를 서로 연결시키는 끈이시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각 지체들인 교인 각자는 끈이신 성령과 연결될 때, 즉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 비로소 자신의 역할 제대로 감당할 수 있다. 따라서 성령의 능력과 활동 없이 교회는 죽은 몸, 즉 시체이며 결코 살아 움직이는 역동적 실체일 수 없다. 그렇다면 교회가 참 교회인지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교회가 그리스도를 자신의 머리로 모시는가를 살펴보는 것이요, 그 교회가 살아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과 은혜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성령의 능력과 은혜에 사로잡혀 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쉽지는 않겠지만 우선 성령의 능력과 은혜에 사로잡힌 교회는 분명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검인 말씀을 사모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사로잡힌 교회일 것이다. 즉 말씀에 죽고 말씀에 사는 교회,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여기는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교회이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은 다른 어떤 것보다 말씀의 능력과 권위를 최상최고의 것으로 삼으시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은 말씀인 성경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시길 원하신다. 그러므로 말씀 없는 은사와 기적은 가짜다. 말씀에 근거된 것이 아니거나 말씀에 의해 확증될 수 없는 모든 신기한 능력들은 사실상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단언해야 한다.


물론 모든 능력의 출처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단지 교회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이유 때문에, 혹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난 일이라는 이유 때문에 모든 가시적인 능력과 기적들을 모두 성령 하나님의 은혜나 은사로 간주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은 단지 사람들을 놀라게 할 목적만으로 기적과 기사를 일으키시거나 자신의 은사를 남발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의 능력, 즉 기적이나 은사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나아가 그 구원에 근거한 하나님의 교회를 지상에 건설하기 위해 질서 있게 시혜된다. 따라서 능력과 은사의 성령님은 단순히 놀라움과 신비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 교회 건설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은사장이라 할 수 있는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사도 바울은 은사를 논하면서 ‘질서’를 강조하고 ‘교회 건설’을 강조했다. 그리고 동시에 직분도 함께 다루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과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의 은사에 대해 설명할 때 사도 바울은 방언이 “자기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면, 예언은 “교회의 덕”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구분하면서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한다. 물론 방언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는 말씀도 함께 하신다. 하지만 은사장을 마무리 하시는 마지막 명령은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는 말씀이다. 따라서 성령 하나님은 자신의 은사로 인해 교회의 혼란과 분쟁이 일어나기를 바라시지 않기 때문에 교회의 질서를 파괴하는 은사는 결코 용납될 수도 용납되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기(고전 14:33) 때문이다.


고린도전서의 은사장들에서 등장하는 “덕”이라는 단어는 성경 원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고린도전서 14장 4절 말씀을 헬라어 원문에 충실하게 직역한다면 다음과 같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신을 세운다. 하지만 예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운다.” 여기서 “교회를 세운다”는 말씀은 14장에서 4절 이후로 몇 번 더 언급된다. 또한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이 “교회를 세움” 즉 “교회 건설”이 은사 발휘의 중요한 목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교회 건설”은 에베소서에서는 바로 다양한 교회 직분의 최종 목적이기도 하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은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13)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 건설”이다.


에베소서의 말씀에 따르면 교회의 모든 직분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고 또한 성도를 “봉사의 일을 하게” 하게 해야 하되, 결국 이 모든 일을 통해 결국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야 한다. 따라서 교회 직분의 최종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 개인이 발휘하는 성령의 은사와 교회 안에 세워진 직분은 모두 “교회 건설”이라는 목적에 부합해야 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 가운데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한 지체는 하나도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모든 지체들은 하나님의 교회 건설을 위해 각기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각기 자신에게 알맞은 은사가 부여된다는 사실 또한 알아야 한다.


교회의 지체인 성도 각자에게 주어진 각각의 은사들이 서로 상충됨 없이 질서 있고 조화롭게 발휘될 때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은 가장 아름답게 세워져 갈 것이다. 교회의 모든 직분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거나 교회를 세우지 않고 파괴하는 은사와 직분은 하나님의 교회에 합당하지 않다. 그것이 아무리 대단한 은사요 직분이라 할지라도! 그렇다면 은사와 직분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다.


고린도전서의 은사장들에서 은사와 직분은 둘 다 성령 하나님 한 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결코 상충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상호 보완적이며 상호 교류적이다. 즉 은사는 직분으로 나타나고 직분은 은사를 동반한다. 어쩌면 은사 없는 직분, 직분 없는 은사는 위험천만한 것일 수 있다. 은사와 직분 모두 성령께서 교회 건설을 위해 사용하시는 유용한 도구들이지만 서로 상충되지도 분리되지도 않는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은사가 방종적이거나 무질서하게 발휘되지 않도록 교회에 공적인 직분을 세우신다면 교회의 공적 직분이 인간적이거나 권력화 되지 않도록 은사를 베푸신다고 볼 수 있다.


은사든 직분이든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질서 있게 발휘되어야 한다. 여기서 질서를 곧바로 권력으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 질서가 권력에 의해 세워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하지만 교회에서 질서를 세우는 권력은 성령 하나님의 권력이지 직분자인 인간의 권력이 아니다. 즉 교회 직분의 진정한 권력과 권위는 그 직분의 본질에 충실할 때 비로소 발생하는 영적인 것이지 직분 자체에서 나오는 세상적인 것이 아니다.


교회 은사와 직분의 다른 공통분모는 봉사 즉 섬김이다. 성령의 은사와 직분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것이다. 은사와 직분의 권위는 바로 이 섬김으로부터 나온다. 교회 건설을 위한 봉사와 섬김이 없는 은사나 직분은 이미 본래의 사명과 내용을 잃어버린 것이므로 단지 하나의 껍데기, 즉 현상이나 자리에 불과하다.


성령의 은사와 교회의 직분은 획일적이지도 않고 또한 가치의 높낮이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물론 더 좋은 은사, 순서상 앞서는 직분은 있다. 그런데 이것은 질서를 위한 것이지 그 자체가 세상적인 차원의 더 큰 권위나 권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은사와 직분은 결코 인간적인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오히려 더 좋은 은사와 앞선 직분은 감당해야 할 더 큰 사명과 의무가 부여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한 몸의 지체들이 다양한 재능들을 가지고 있고, 그들 모두가 서로 다른 것처럼, 그러나 동시에 모든 재능들을 지닌 지체도 없고 또한 다른 지체의 직분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 지체도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와 같이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구별을 통해 그분이 세우시려고 한 것은 우리 가운데 질서를 보존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인데, 이것은 각자가 자신의 재능에 따라 적당히 행하고 다른 사람들의 일에 간섭하지 않도록, 그리고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동시에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지 않도록, 그러나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고 다른 사람에게 허락된 자리를 빼앗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인용구는 은사에 대한 제네바의 종교개혁가 칼빈의 가르침이다. 칼빈에 따르면 은사의 다양성과 통일성은 전혀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다양성과 통일성은 둘 다 교회 건설을 위해 필수적이다. 또한 칼빈에 따르면 교회 지체 가운데 교회에 유익하지 않은 지체는 단 하나도 없으며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할 만큼 하찮은 사람 역시 아무도 없다. 성경 역시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으로 입혀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고(고전 12:22-23) 가르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령의 은사나 교회의 직분은 아무리 좋은 것이고 아무리 앞선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다. 그 둘은 다른 지체들 앞에서 마치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것인 양 뽐내고 자랑할 때가 아니라 교회를 세우기 위해 겸손하게 다른 지체를 섬기고 높일 때 가장 아름다운 보배로 빛나게 될 것이다.

 

2011년 02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