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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 『신앙감정론』, 정성욱역 (서울: 부흥과개혁사, 2005), 720pp.

- 이상웅 목사(총신대학교 Ph.D., 산격제일교회 담임목사)

 

나는 개인적으로 성경책 이외에는 이 책 만큼 많이 읽어 본 책이 없다. 나는 2005년 벽두에 발간된『신앙감정론』(A Treatise concerning the Religious Affections) 초판본을 구입한 이래 지난 4년 동안 여덟 번을 정독했다. 700쪽이 넘는 이 책을 읽고 백 수십쪽에 달하는 요약문을 손수 타이핑 했을 뿐 아니라, 두 어 차례 강독회를 인도했고, 몸담고 있는 신학교에서 매년 가을 학기 마다 강의를 진행해 오기도 했다. 금번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론”을 주제로 총신대학교에서 학위논문을 쓰면서도 이 책을 수도 없이 참조해야만 했다. 18세기 미식민지 시대에 살았던 에드워즈라는 사람의 중요성이 어떠하기에, 그리고 본서가 가지는 가치가 도대체 어떠하기에 그토록 간절한 심정으로 읽고, 소개하고, 자랑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렇게 읽고도 아직도 더 읽고 싶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고백을 하게 만드는 매력이 무엇일까? 본서를 애독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다음의 에피소드들을 읽어보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동사목사를 지낸 바 있는 이안 머리가 쓴 조나단 에드워즈 전기에 보면 19세기 미국에 있는 한 시골교회의 상황을 소개해 주는 대목이 있다. 새로운 목사가 그 교회에 부임했는데, 시골의 평신도 한 사람이 신학의 대가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목사가 그 이유를 알아 보았더니, 그 사람은 단지 에드워즈가 쓴 본서를 6번 읽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간결 명료한 입문서를 쓴 스티븐 니콜스는 에드워즈의 신앙 감정론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다음으로 씨름해 볼 만한 중요한 독보적인 책자라고 하는 말을 했다 그리고 현재 활동중인 에드워즈 매니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존 파이퍼 목사는 "이 책은 에드워즈의 다른 어떤 책 보다도 더욱 나의 개인적 역사와 개인적 성장의 결합에 도움을 주었습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처럼 중요성이 강조되는 책자인 만큼 한 번 읽고 말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읽다 보니 여덟 번 까지 읽게 된 것이다.

21세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왜 18세기 사람 에드워즈의 저작들을 읽는가? 사람들 마다 이유가 틀릴 것이다. 본인은 1990년에 읽기 시작한 로이드 존스를 통해서 에드워즈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로이드존스는 The Puritans에 실린 한 강연에서 목회자들이 이런 저런 집회에 참석하러 돌아다니지 말고 제발 집에 들어앉아서 힉맨 편집의 에드워즈 전집을 거듭 거듭 읽으라고 권면했다. 로이드 존스가 최고의 강해설교자라고 믿고 있었던 나로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추천을 받은 셈이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의 추천에 따라서 이런 저런 번역서들이나 영어글들을 구입하기는 했지만, 집중적으로 읽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21세기에 들어서서 참된 부흥에 대한 관심이 절실해 지면서 부흥, 성령의 사역과 관련된 에드워즈의 글들을 읽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랬겠지만 최근 우리 한국교계는 온갖 비성경적인 성령운동이나 부흥운동이 난무하고 있다. 최근에는 청교도 영성을 운운하는 모목사가 교회 지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하지만 정말 저분이 청교도 영성을 제대로 아는가? 정말 에드워즈를 읽은 사람인가 우려의 눈으로 나는 쳐다보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목회 현장과 한국 교회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우리가 올바른 가치 기준을 확립하기 위해서 다시 붙잡아야 할 것이 바로 성경과 그리고 에드워즈의 저작들이라고 생각한다. 비단 이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그릇된 부흥운동에 대한 교정제(corrective)로서 에드워즈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정성욱 교수가 번역한 『신앙 감정론』은 참된 부흥이 무엇인가, 특히 참된 신앙의 감정적/정서적 체험을 가릴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명석하고도 풍부하게 천착하고 밝혀낸 명작이다. 에드워즈는 신학적으로 칼빈주의 정통주의 신학자요 미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지성인이면서도, 1730년대, 40년대 뉴잉글랜드를 휩쓸었던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로서 성령의 역사의 중심에 있어서 성령을 체험했던 영성가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야말로 무엇이 참된 성령의 역사이며, 어떤 것이 아닌가? 무엇이 참 신앙의 본질인가? 무엇이 참과 거짓된 신앙 체험을 가릴 수 있는 기준인가에 대해서 표준적인 책을 쓸 역량과 은사를 하나님께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에드워즈의 개인적 기록들이나 결심문을 보면 그는 신앙의 각성 초기 부터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기조를 가지고 『신앙의 감정론』,『사랑과 그 열매』,『성령의 사역 분별 방법』,『놀라운 회심 이야기』, 『균형잡힌 부흥론』등을 통해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논구를 하였다.

에드워즈의『신앙감정론』은 크게 봐서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제1부에서 에드워즈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True religion, in great part, consists in holy affections)"는 교리적 명제로 압축된다(147). 우리 나라말로 정서 혹은 애정이라고도 번역되는 affection을 정성욱 교수는 감정이라고 옮겼다. 에드워즈는 affection의 정의를 "한 인간의 영혼을 구성하고 있는 의지와 성향이 지닌 더 활기차고 감지할 수 있는 활동"이라고 하였다(148).

에드워즈는 제2부에서 신앙 감정이 진정으로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는 표지들, 즉 성령의 역사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소극적인 표지 12가지를 들고 있다. 특히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이런 소극적인 표지들을 가지고서 자신이 성령을 체험했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예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주의해서 읽어볼 만한 것이다. 1. 신앙 감정이 매우 크게 발휘되거나 아주 높이 고양되는 것 자체는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2. 감정이 몸에 큰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은 그 감정에 참된 믿음의 본질이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 주는 표지가 아니다. 3. 신앙 감정이 있는 사람들이 신앙적인 일들을 매우 유창하고 열정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말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는 아니다. 4. 신앙 감정이 있는 사람들이 신앙적인 일들을 매우 유창하고 열정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말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는 아니다. 5. 신앙 감정들이 성경 본문을 마음 속에 기억나게 한다는 것 자체는 그 감정들이 거룩하고 영적인 것인지 또는 아닌지를 판단할 근거가 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6. 사람들이 체험하는 감정에서 사랑이 (현상적으로) 나타난다는 것 자체는 그 감정들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감정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는 표지가 아니다. 7. 사람들이 여러 신앙 감정들을 동시에 체험했다는 사실은 그 감정들이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데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다. 8. 양심의 각성과 죄에 대한 깨달음이 있은 후에 어떤 일정한 순서를 따라 위로의 기쁨이 뒤따른다는 사실로는 그 감정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판단할 수 없다. 9.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 감정이 그들로 하여금 신앙적인 일에 시간을 많이 사용하게 하고, 예배의 외부적인 의무들에 열심히 헌신하게 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 감정에 참된 신앙의 본질이 있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는 확실한 표지는 아니다. 10. 사람들이 가진 신앙 감정이 그들로 하여금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게 한다는 사실로는 그 감정의 본질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다. 11. 어떤 감정이 생긴 사람들 스스로 자신들의 체험이 신령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영적으로 건전한 상태에 있다고 크게 확신한다는 사실은 그 감정이 바른 것인지 또는 잘못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표지가 될 수 없다. 12. 사람들이 밖으로 표현한 감정이 참된 성도들의 마음에 들고 호응을 얻을 만큼 크게 감화력이 있고 기쁨은 준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신앙 감정의 본질이 어떠한지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제3부 진정으로 은혜로운 거룩한 감정을 뚜렷이 구별해 주는 표지들.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참된 감정을 알아볼 수 있는 표지로서 다음의 12가지를 들고 있다. <신앙 감정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분량상으로 중요하지만, 내용상으로 중요한 부분이다. 1. 참으로 영적이고 은혜로운 감정은 영적인, 초자연적인, 신적인 영향과 작용들이 그들 마음에 역사할 때 생겨나게 된다. 2. 은혜로운 감정이 생기는 가장 객관적인 근거가 신적인 일들이 가장 탁월하며 그 자체로 사랑스럽다는 데 있어야지, 그 일들이 자기 이익과 관련되었다는 데 있어서는 안된다. 3. 참으로 거룩한 감정들은 주로 신적인 일들에서 드러나는 도덕적 탁월성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다. 달리 표현하면, 신적인 일들에서 드러나는 도덕적 탁월성이 아름답고 향기롭기 때문에, 신적인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거룩한 감정들의 시작이며 원천이다. 4. 은혜로운 감정은 지성이 밝아져서 하나님의 일들을 바르게 이해할 때 생긴다. 5. 은혜로운 감정은 신적인 일들에 대한 실재성과 확실성을 합리적이고도 영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해 준다. 6. 은혜로운 감정은 복음적인 겸손을 동반한다. 7. 은혜스러운 감정을 다른 감정들과 구별하게 해 주는 또 하나의 표지는 은혜로운 감정은 본성의 변화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8. 참으로 은혜로운 감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 같고, 비둘기 같은 심령과 기질을 가지도록 돕고, 그것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거짓되고 기만적인 감정들과 다르다. 다시 말하면, 참으로 은혜로운 감정들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 온유, 평온함, 용서, 자비의 심령을 자연스럽게 닮아가게 하고 또 그렇게 되도록 도와준다. 9. 은혜로운 감정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며, 기독교적인 온유한 마음을 동반하고 산출한다. 10. 참으로 은혜로운 거룩한 감정들이 거짓된 감정들과 다른 점 또 한 가지는 그것들이 아름다운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11. 은혜로운 감정들과 다른 감정들 사이에 차이점을 크고 뚜렷하게 구분해 주는 또 하나의 다른 표지는 은혜로운 감정들이 더 높이 고양되면 고양될 수록, 영적인 만족을 위한 영혼의 영적인 욕구와 갈망이 더욱 커진다는 것이다. 반면에 거짓된 감정들은 그 자체로도 만족해 한다. 12. 은혜로운 거룩한 감정들은 그리스도인의 행위로 드러나고 열매를 맺는다. 거룩한 감정들은 그 감정들을 경험하는 주체인 성도에게 영향력과 효력을 미치게 되며, 그 결과로 기독교의 원리와 전체적으로 일치하고, 그 원리에 따라 규정되는 행위는 성도가 일생 동안 실천하고 마땅히 행해야 한다.

나는 본서가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참된 부흥의 특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이 읽혀지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로이드 존스의 권면처럼 정말 부흥을 원한다면, 때가 늦기 전에 이런 책자들을 붙잡고 한 번 씨름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 혼자서 힘이 든다면 동료들과 더불어서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서라도 꼭 한 번 씨름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여러 앞선 독자들의 평이 그러하였고, 본인의 독서체험상 그러하였지만, 이러한 시도는 후회하지 않을 독서체험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 번 맛을 들이면 다시금 찾을 수 밖에 없는 영적 진수성찬을 만끽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