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신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황원하 목사 (산성교회 담임)
1. 책을 다 읽고서
알리스터 맥그래스(이하 ‘저자’)는 1993년에 이 책의 초판을 냈는데 이후 판을 상향하다가 2010년에 5판을 냈다(이 책의 한글번역본에는 영문판 5판의 서지정보가 2011년이라고 되어 있음). 그리고 이 책의 우리말 번역본(영문판 5판의 번역)은 2014년에 나왔으며 나는 그것을 읽었다. 따라서 이 책은 저자가 오랜 세월 매우 정성스럽게 쌓아온 학문적 성과물이다. 그런데 그는 이 책의 서문에다가 2016년에 6판이 나올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으니, 이 책은 앞으로 더욱 진척되어서 신학도들이나 일반 독자들에게 더욱 유익하게 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 책의 우리말 번역본은 무려 1,800페이지이다. 따라서 책 전부를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나는 이 책을 한 달 조금 넘게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 높은 산을 하나 넘은 기분이었다. 이 책에는 제목대로 ‘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변이 포괄적으로 담겨 있다. 원서의 제목 역시 ‘Christian Theology: An Introduction’이어서 신학 개론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책을 다 읽고 나니 신학교를 막 졸업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과거에 배운 것들을 정리하고 싶거나 혹은 일반인들 가운데 신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원래 과학을 공부했다가 나중에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기에 그의 글은 언제나 체계적이며 명료하다. 그래서 독자들이 읽기에 수월하다. 이 책 역시 모호하지 않으며 너저분하지도 않다. 내용에 군더더기가 별로 없어서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들을 쉽게 얻을 수 있다. 특히 책의 번역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말 문장이 좋아서 잘 읽혔으며 번역서 특유의 어색함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신학서적의 번역자는 상당한 신학적 통찰력을 겸비해야 하며, 저자의 사상과 문체적 특징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의 번역자가 그런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기존의 우리말 번역서들과 이 번역서가 신학자들의 이름이나 지역의 이름을 표기하는 방식에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어서 조금 어색하였다. 예를 들어, 기존의 우리말 번역서들은 ‘이레니우스’라고 표기한 반면에 이 책은 ‘이레나이우스’라고 표기한 경우이다. 사실은 이 책의 표기방식이 표준이지만 나를 포함하여 기존의 방식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은 아무래도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그러한 혼란도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없어진다. 그리고 앞으로 다른 번역서들도 번역의 표준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이것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이 책에 대하여 가진 큰 불만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책이 너무 두껍다는 점이다. 이 책의 영어원서 ‘Christian Theology: An Introduction’(5th edition)은 536페이지인데 반하여 이 책의 우리말 번역본은 무려 1,800페이지나 된다. 영어를 한글로 번역할 때 분량이 늘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을 편집할 때 글자의 크기가 크지 않으면서도 여백을 너무 넓게 잡은 데다 두꺼운 종이를 사용한 바람에 페이지가 많아졌다. 그러다보니 들고 다니기가 불가능했으며 독서받침대에 얹어 놓는 일도 쉽지 않았다. 책이 너무 두껍고 무겁다 보니 필자의 책은 이미 제본이 파손되어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렇게 두껍게 책을 만들 필요가 있었나 싶다. 다음 판을 출판할 때에는 분량을 줄였으면 좋겠다.
2. 책의 내용과 평가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분량 면에서 1부는 보통이고, 2부는 적고, 3부는 많다. 1부는 교회사를 다루는데, 3부에서 다룰 내용의 기초가 된다. 2부는 신학의 자료와 방법론을 다루는데, 3부에서 다룰 내용의 전제가 된다. 그리고 3부의 분량은 책 전체의 절반이 조금 넘는데, 교의학의 여러 주제들을 체계적으로 서술한다. 물론 1부와 2부와 3부는 그 자체로 신학의 독립된 분야들이어서 따로 읽어도 무방하다. 책의 내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1부와 2부를 순서대로 꼼꼼히 읽어야 한다. 그런 후에 3부을 읽되 관심 있는 부분부터 잃으면 된다.
이제 내용을 비평적으로 살펴보겠다.
1) 1부. 길라잡이: 시대.주제.인물로 본 기독교 신학
1부는 교회사를 다룬다. 저자는 “기독교 신학의 거창한 문제들과 씨름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중 많은 것들이 이미 다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말로써 교회사를 다루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저자의 말대로, 신학을 공부하면서 마치 전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은 양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과거 기독교의 주요한 인물들의 목소리와 대화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들의 말과 대화는 오늘 이 시대의 논쟁들에 꼭 필요한 판단 기준을 제시해 주며, 뿐만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가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교부시대부터 시작하여 중세시대를 거쳐서 종교개혁시대와 근현대시대를 아우른다. 특히 저자는 교부시대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히 다루는데, 그는 이 시대를 ‘가장 흥미롭고 창조적인 시대’로 규정한다. 특히 교부시대의 기독론 논쟁에 대한 서술은 박진감이 넘친다. 중세시대에 대하여 말하면서 저자는 특히 수도회와 대학의 설립에 대하여 자세히 다룬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1부 전체에서 가장 흥미로웠다. 개혁주의 장로교 권에서 지금까지 자라고 공부한 나로서는 중세시대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몰랐었는데 이번에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저자는 종교개혁시대를 다루면서 주로 영국과 스위스와 독일에서 일어난 일들을 언급한다. 그는 칼뱅을 높이 평가하면서 칼뱅과 그의 동료들에 대하여 자세히 말한다. 하지만 루터는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많이 다루지도 않는다. 아쉬운 점은 저자가 화란이나 프랑스나 그 밖의 나라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을 거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아무런 연유를 밝히지 않은 채 그들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가톨릭 종교개혁’을 비교적 공정하게 다루려고 노력한 점은 칭찬할 만하다. ‘가톨릭 종교개혁’이란 대체로 트리엔트 공의회가 시작된 1545년 이후의 기간에 가톨릭교회 내에서 일어난 개신교 대응적인 부흥운동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근현대시대를 다룬다. 여기서 내가 가장 주목한 것은 저자가 칼 바르트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건전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한 사실이다. 그는 바르트의 초기 저술들이 대체로 건설적이기보다는 비판적인 성격이 강했으나(예. 1919년에 나온 유명한 로마서 강해), ‘교회 교의학’(완성하지 못하고 사망)에 와서는 훨씬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신학을 보여주었다고 본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 바르트에 대하여 활발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저자의 평가가 다양한 신학의 스펙트럼을 가진 한국의 신학도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자못 궁금하다.
전체적으로 교회사에 대한 저자의 진술은 흥미진진하다. 특히 친절하게도 저자는 사람들의 이름에다가 그들이 살았던 연대를 일일이 집어넣어서 고대인들의 연대기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혼란을 겪지 않도록 배려해 준다. 그리고 아쉽기는 하지만 개발도상국들의 신학, 예를 들어, 인도와 아프리카의 신학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언급한 것도 다행이다. 그렇지만 저자가 객관적인 시각으로 교회사를 다루려고 해서 그런지 인물들이나 사건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지는 않았는데, 이것은 일면 이해가 된다. 이 부분을 교회사의 개론서 정도로 보면 유용할 것이다.
2) 2부. 자료와 방법론
2부는 신학의 자료와 방법론을 다룬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신학’이란 용어의 정의에 대하여 면밀히 탐구한다. 그는 신학이 학문의 분과로서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를 살펴하고, 신학의 구조를 둘러보며, 그것이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을 파악한다. 2부의 내용을 아는 것은 3부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하여 중요하다. 나는 이 부분이 다른 부분에 비하여 난해하게 느껴졌지만 3부를 읽다 보니 2부의 내용을 반드시 알아야 하며 대충 넘어가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먼저, 저자는 신학의 출발점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칼 바르트가 기존의 인간중심의 이론들에 대해서 신학을 인간의 필요에 맞추거나 인간 실존의 철학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비판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그는 이 책에서 시종 바르트를 좋아한다). 그는 바르트가 신학에서 가장 먼저 말해야 하는 것들로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한 것을 귀하게 여긴다. 하지만 그는 바르트가 말하는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하여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사실상 바르트의 ‘말씀’ 개념이 오늘날 신학계의 화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정통과 이단, 그리고 기독교와 세속 문화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다음으로, 저자는 신학의 자료를 다룬다. 그는 신학의 자료로서 성서와 전통과 이성과 종교경험을 말하면서, 이 자료들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이 자료들이 구성신학(constructive theology)을 위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평가한다. 그 다음으로, 저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계시의 개념과 종류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자연적 지식(자연)과 계시된 지식(성경)에 대하여 다루는데, 신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요소들을 다루었으며, 새로운 발견이나 자신의 독특한 견해를 밝히지는 않는다. 다만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 사이에 벌어진 말씀신학과 자연신학의 논쟁을 소개한 것이 흥미롭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철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해서 말한다. 그는 이 단락 바로 앞에서 과학과 신학의 관계를 조금밖에 다루지 않았다. 나는 저자가 과학자 출신이기에 이 문제를 많이 다룰 것으로 기대했는데, 원론적인 차원에서 조금만 다루어서 아쉬웠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철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하여서 제법 많이 다룬다. 그는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는 주후 3세기의 테르툴리아누스가 했던 말이 기독교 역사 전반에 걸쳐 솟구치게 했던 논쟁을 소개한다. 그는 기독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 체계와 이론들로서, 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라미즘, 데카르트주의, 칸트주의, 헤겔주의, 실존주의를 든다.
내가 이 단원에서 가장 많이 관심을 두었던 부분은 ‘하나님의 존재는 증명이 가능한가?’에 대한 저자의 논의였다. 그는 켄터베리의 안셀무스의 이론으로부터 출발하여 이후에 벌어진 논의들을 상세히 소개한다. 저자는 임마누엘 칸트에 대해서 말하며,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서 말한다. 저자는 책에서 이 논의에 대한 어떤 새로운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기존의 논의의 역사적인 발전을 소개할 따름이다. 하지만 나는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이 부분을 특별히 숙독함으로써 신학공부의 방법론을 정립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3) 3부. 기독교 신학
마지막 단원인 3부는 기독교 신학의 제 분야들을 다룬다. 이 단원이 책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며 사실상 본론에 해당한다. 저자는 지금까지 다루어 온 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발전과 신학의 자료 및 방법론에 기초하여 신학의 각 분야들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소상히 소개한다. 그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조들의 구조와 순서를 그대로 사용하여 기독교 신학의 주요 주제들을 설명한다. 그는 교의를 서술함에 있어서 개신교의 입장과 천주교의 입장과 정교회의 입장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한다. 심지어 극단적인 입장들로 간주되는 부분들도 차분히 소개한다.
저자가 이 단원에서 다루는 분야는 신론, 삼위일체론,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교리, 신앙과 역사(근대의 그리스도론 논의), 그리스도 안의 구원, 인간의 본성과 죄와 은총, 교회론, 성례전, 기독교와 세계 종교들, 마지막 일들(기독교의 희망)이다. 저자가 특정한 입장을 지지하지 않고 중립적으로 기술하기 때문에 교의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아직 신학적 관점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은 독자들이 어느 정도의 혼란을 겪을 수 있는 단점이 있다. 이제 나는 책의 내용 전반을 말하지 않고 몇 가지 인상적인 부분만을 말하겠다.
‘신론’에서 저자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남성성에 대한 주제를 제기한다. 전통적인 신론에서는 이 주제를 다루지 않는데, 저자가 이 주제를 제기한 것은 저자의 신학적인 관심도와 연관되어 있다. 사실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서 페미니즘을 비중 있게 취급한다. 저자는 이미 서두에서 자신이 중립적인 입장에서 모든 이론들을 공정하게 소개하려 한다고 밝혔지만 나는 그가 페미니즘을 이렇게 많이 취급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못했다. 그는 페미니즘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페미니즘이 그리 얇고 허술한 이론이 아니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정도를 넘어선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저자의 그러한 노력은 하나님의 남성성에 대한 문제와 연결되며, 이후에 예수님의 남성성 문제로도 이어진다.
‘삼위일체론’에서 저자는 특히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바르트가 『교회 교의학』(1936-1969)의 시작 부분에서 삼위일체론을 다룬 것이 큰 의미를 가진다고 보는데, 이는 바르트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은 죄인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현실적인 것이 되도록 보장해 주고 든든히 받쳐 주기 때문이다. 저자는 바르트가 삼위일체를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아니라, 신학을 적절한 관점에 따라 세우고 그렇게 해서 신학의 문제와 수수께끼에 답을 제공해 주는 해석의 틀이라고 보았던 점을 지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렇게 하여 바르트는 근래에 삼위일체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되었다.
‘인간의 본성과 죄와 은총’에서 저자는 5세기 초에 일어난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의 논쟁을 소개한다. 그는 펠라기우스주의가 펠라기우스와 켈레스티우스와 시리아의 루피누스의 이론이 혼합된 것이라고 본다. 그는 이 논쟁에서 의지의 자유에 대한 견해, 죄에 대한 견해, 은총에 대한 견해, 그리고 구원의 근거에 대한 견해가 다루어졌다고 소개한다. 저자는 이 논쟁으로 인하여 중세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 사상이 중요하게 취급되었으며 나아가서 새롭게 평가되었고 발전되었음을 밝힌다. 특히 아퀴나스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을 존중하면서도 비판적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은총론을 발전시킨 점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이 종교개혁자루터와 칼뱅에게 미친 영향을 언급한다. 사실 저자는 은총론에 대하여 이미 1부에서 제법 많이 다루었는데 여기서 다시금 비중있게 다룸으로써 이 이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성례전’에서 저자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성례전 신학의 발전에 남긴 공헌을 소개하면서, 특히 성례전이 군인의 맹세와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라틴어 sacramentum이 로마 병사들에게 요구되는 충성과 헌신의 맹세, 곧 ‘신성한 맹세’를 뜻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유사성을 근거로 성례전이 교회 안에서 신자들의 헌신과 충성을 불러일으키는 데 중요한 도구가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저자에 따르면, 이러한 관점은 나중에 츠빙글리의 성례전 신학에서도 발견되었는데, 그는 성례전에서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이 신앙 공동체의 굳건한 연대, 그리고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신성한 책임이라고 보았다. 저자의 이러한 발견은 오늘날 성례전이 교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교육의 재료가 된다. 즉 성례전을 하나님과 신자의 교제, 신자와 신자의 교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신자들의 충성과 헌신 다짐의 차원으로 볼 수 있다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 일들(기독교의 희망)’이란 종말론이다. 저자는 종말론에 대한 신약성경의 근거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이어서 최근의 신학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해석을 살펴본다. 먼저, 그는 신약성경의 근거를 살피면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자료로 예수님의 설교와 바울의 저작들을 든다. 그는 예수님과 바울의 설교에서 드러나는바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성과 미래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 부분에서는 새로운 것이 없다. 그러나 그는 죽은 후의 재결합의 문제에 있어서 로마 철학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믿음을 다루면서 흥미로운 통찰들을 많이 내 놓는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시’ 사상을 소개하면서, 신자들이 지금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어떻게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제시한다. 19세기 말 이후에 종말론은 신약학자들에게 상당한 관심거리였다. 많은 신약학자들이 종말론의 현재성과 미래성 중 한 측면 혹은 양 측면에 관심을 가졌다. 그런 가운데, 저자는 루돌프 불트만의 종말론의 비신화화, 위르겐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 그리고 헬무트 틸리케의 윤리와 종말론을 소개하면서 이러한 사상이 나오게 된 배경을 분석하고 이 사상들이 주는 실존적 의미를 언급한다.
3. 전체적인 느낌
나는 이 책이 ‘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한 권의 책으로 된 최선의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신학’이란 학문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이 학문에 대한 일차적인 답변이 이 책 한 권에 잘 제시되어 있다고 믿는다. 저자는 이 책에서 교회사와 교의학을 주로 다루었으나 그의 진술이 신학의 다른 분야들, 즉 구약학, 신약학, 상담학, 선교학, 설교학, 윤리학 등으로 확대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책을 우선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은 저자가 책의 머리에서 밝힌 대로 특정한 신학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비록 그는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자처하였고 그의 여타 글에서 그의 입장이 드러났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는 그의 색깔이 최대한 감추어져 있다. 따라서 나는 신학도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반 독자들(기독교인이건 아니건 간에)이 이 책을 ‘비평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당부하고자 한다. 특히 저자가 현대 신학자들을 다루는 부분을 읽을 때 분별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혼란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신학적인 분별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의 글이 오히려 객관적이고 신선한 시각을 제공하여서 읽는 재미가 상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