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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론

 

조규통 목사(함안 예닮교회)

 

1. 서론

 

부흥론C. C. Goen이 편집하고 양낙흥이 번역했다. 이 책은 요나단 에드워즈의 세 가지 책, 놀라운 회심 이야기, 성령의 역사 분별법, 균형잡힌 부흥론그리고 부흥과 관련 있는 편지 모음의 합본으로서 예일대학교 출판부에서 1972년 편찬한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Vol 4, The Great Awakening을 번역한 것이다. 번역된 부흥론의 구성은 발간사와 역자후기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원문대로 번역됐는데, 우선 편집자 고언의 부흥론이해를 위한 길잡이 글’(15-133pp)을 실었다. 이 안내글의 분량만도 한편의 논문이며 에드워즈 부흥론을 잘 정리한 글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후, 놀라운 회심 이야기(137-274pp), 성령의 역사 분별법(275-374pp), 균형잡힌 부흥론(375-698pp), “부흥과 관련 있는 편지 모음”(699-744pp) 순으로 배열되었다.

에드워즈가 이 저작들을 남긴 중요한 이유는 대략 세 가지로 나타나는데, 1) 그가 사역했던 뉴잉글랜드 전역에 일어났던 각성과 부흥을 비판하는 자들에 대해, 부흥의 성경적, 하나님 주권적, 성령의 전적인 사역임에 대한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함이었다. 2) 부흥에서 나타난 열성적, 광적 분위기에 압도되어 성령의 역사와 신앙의 조화를 이탈한 이들을 개유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3) 당시 팽배했던 알미니안적 회심의 방법에 대한 반대 때문이다. 이는 알미니안적 회심이 그리스도에게 이르지 못한 사람들을 치명적으로 안주(安住)하게 만들만큼 중생(重生)과 성화(聖化)를 위해서는 전혀 효과적이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 각권 소개

 

⑴ 『놀라운 회심 이야기(1737)

 

집필 동기와 출판 배경 - 코네티컷 골짜기의 회심의 역사에 대한 관찰과 보고의 편지

1735530, 코네티컷의 부흥(1차 대각성, 1734-1735)을 묘사하기 위해 8페이지 분량으로 벤저민 콜먼(Benjamin Colman, 1673-1747)에게 쓰여진 에드워즈의 편지가 가장 먼저 기록된 놀라운 회심 이야기의 모체가 된다. 콜먼의 요구에 의해 기록했던 이 편지는 그 해에 에드워즈: 대표선집에 포함되어 출판되었는데, 콜먼은 에드워즈의 이 편지 내용의 대부분을 자신의 친구인 존 가이즈(John Guyse, 1680-1761)에게 포함시켜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접한 가이즈는 동료 목사인 아이작 와츠(Isaac Watts, 1674-1748)와 에드워즈의 편지 내용을 나누게 된다. 가이즈가 이 소식에 대해 교회회중과 함께 나누고 그 회중은 이 설교를 인쇄를 요청하여 가이즈는 콜먼에게, 다시 에드워즈의 삼촌 윌리엄 윌리엄스에게 소식이 전해진 후, 이를 알게 된 에드워즈가 원고를 작성하게 된 것이다.

 

내용

스토다드의 죽음 이후 마을의 젊은이들은 이성끼리 수시로 함께 모여 떠들며 방종했다. 가정의 질서와 교육조차 무너져가고 있었는데, 에드워즈는 이 시기를 신앙적으로 심각한 침체시기라고 표현한다. 이 같은 마을의 분위기는 에드워즈의 진심어린 충고로 말미암아 개선되기 시작했으며 1733년 말 경부터는 가장(家長)들을 설득하여 가정에 충실할 것을, 이웃끼리 서로의 마음을 알아볼 것을 제안했는데 마을 전체가 이 의견을 따랐던 것이다. 약간의 질서를 잡아가던 즈음 영적 각성에 불씨를 일으킨 사건이 발생하는데 파스코막(Pascommack)이란 작은 마을에서 신앙에 대한 깊은 관심이 발생하고 이곳에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7344월 한 청년이 젊은 나이에 급성 늑막염으로 사망하게 된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어서 한 젊은 부인이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녀는 죽기 전 하나님이 자신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에 대한 만족스런 증거를 얻고 위로가 가득한 가운데운명한 것이다. 이 같은 일련의 사건들 이후 에드워즈는 신앙적인 활동들을 젊은이들에게 제안했는데 그 결과 젊은 층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이 모임들을 지속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대여섯 명이 구원에 이르는 회심을 체험했는데, 특히 이 가운데 한 여성의 고백 속에서 그는 그녀에게 하나님이 무한하신 능력과 주권적 은혜의 영광스러운 역사가 임하여 그 안에 새로운 마음, 참으로 깨어지고 거룩해진 새 마음이 생겼다는 것을 느낄 정도로 그 회심이 확실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리고 이 같은 회심과 각성의 일들이 마을 전체,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일어나기 시작하여 온통 영적이고 신앙적인 대화들로 변화되어 간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1735년 봄과 여름에는 동네에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해 보였고, 온 동네가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 그리고 고뇌로 가득 찼다. 그리고 부모들은 거듭난 자녀들로 인해 남편들은 아내들로 인해, 아내들은 남편들로 인해 기뻐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회심에 있어서의 다양함

에드워즈가 관찰한 회심으로의 여정은 그가 영향을 받았던 청교도적 구원관의 단계들을 따라 서술되고 있다. 에드워즈는 교구에 나타났던 영적 각성에 대해 하나님은 다방면으로, 일반적인 사역의 틀(인간들이 생각하는)을 벗어나 비상하고 전반적인 역사를 나타냈다.”고 기록했다. 그 결과 노샘프턴 교회에서는 16세 이상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얻게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만큼 강력했다. 연령층도 다양해서 4살 소녀로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변화 받았다. 그리고 이 같은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1) 죄의 비참함,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와 지옥에 대한 위험을 직감함으로 죄 된 행실을 버리고 즉각적으로 말씀과 기도, 그리고 예배에 집중하면서 속죄에 대한 확신과 은혜의 체험으로 변화되어져 가는 모습들이다. 2)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의지하면서 그 회개 뒤에 찾아오는 영혼의 안식, 평안, 복음에 대한 깨달음이 이어졌으며, 3) 구원을 완전히 충족시키시는 그리스도를 깨달아갔다. 4) 무엇보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사역을 진전시키는 수단으로 가장 많이 활용하신 것이 타인의 회심에 대한 소식이었다.

 

회심 이후의 변화들

회심 이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변화들을 동반했는데, 전반적인 모습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1) 신앙적인 일들 - 설교, 성경, 예배 등 - 을 새로운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 2) 언어의 한계 때문에 누리는 은혜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음, 3) 성경만큼 즐거워하는 책이 없어졌고, 4) 같은 목적을 향해 한 성령의 통제 아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5) 더욱 겸손해져서 회심의 체험 이후에도 자신들이 위선적이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는 습관이 생겼고, 6) 구령의 열망과 인류에 대한 사랑, 그리고 교리적 지식의 성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주목할 만한 회심 체험에 대한 기록

에드워즈는 특히 아비가일 허친슨(Abigail Hutchinson)이라는 젊은 여성과 페베 바틀릿(Phebe Bartlet)이라는 여아의 회심을 각별히 기술했다.

주목할 것은 코네티컷의 회심 사건들이 모든 사람에게서 환영을 받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회심을 체험한 모든 사람이 은혜의 생활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표현대로라면, 현저히 그 땅의 어두움과 나태함, 방종과 타락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줄어들었다.

 

⑵ 『성령의 역사 분별방법(1741)

 

집필 동기 - 영적각성에 동반되어진 특이한 현상들로 인한 반()부흥주의의 비판에 대하여 각성운동을 변론함

코네티컷 골짜기의 부흥은 지속되지 않았다. 가장 큰 사건 두 가지가 대각성 운동에 타격을 입혔다. 그것은 바로 토머스 스테빈스(Thomas Stebbins)라는 남자의 자살 사건과 에드워즈의 이모부였던 조셉 홀리(Joshep Hawley)가 자살한 사건이었다. 에드워즈는 이 일을 두고 사탄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광분한 것으로 묘사했다. 에드워즈의 부흥에 관한 첫 번째 책이 출판될 무렵, 대각성이란 이미 과거의 사실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노샘프턴의 영적 부흥을 회복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몸부림쳤다. 이에 대한 응답인지 1740,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 - 1771)가 미국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의 등장은 뉴잉글랜드 전역에 불을 놓았다. 다시 이전의 영적 황금기를 아주 강력하게 회복하는 시절이 온 것이다. 그리고 이 무렵, 제임스 데이번포트(James Davenport, 1716-1757)는 이 같은 부흥의 불길에 물을 끼얹는 자가 되었다. 1741년 방문하는 교구들마다 목사들을 소환하면서 그들이 체험했던 것을 진술하게 했으며 그들이 회심했는지 하지 않았는지의 여부를 본인이 판단했던 것이다. 이 같은 진술을 거부한 목사들에 대해서는 공중 앞에서 비난과 저주를 서슴지 않았다.

대각성의 열기가 한창 무르익어갈 때 나타난 일단의 현상들, 1) 가정에서 고뇌와 경탄과 기쁨으로 부르짖거나 기절, 경련하는 일, 2) 예배 도중에 울음, 탄식, 흐느끼는 소리들, 3) 고통과 절망의 부르짖음들, 4) 철야집회의 증가, 5) 환상과 황홀경의 체험 등은 광신적 현상으로 비춰졌기에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에드워즈는 이 같은 격렬한 현상들을 보면서 부흥의 참열매를 바라며, 통제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 무엇보다 부흥을 정당한 하나님의 사역으로 옹호하려는 방안을 그 특유의 통찰력과 논리로 준비했다. 이렇게 해서 준비한 설교가, 1741년 예일대학의 졸업식 연설자로 나섰을 때, 요한일서 4장의 본문을 근거로 작성한 원고가 바로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식별하는 표지들을 최근에 이 땅의 많은 사람 마음에 나타난 저 비상한 작용에 적용함 : 이 일에 동반된 비범한 상황들을 특별히 고려하면서였다. 편집자 고언의 각주에 의하면, 이 원고를 대폭 증보하고 윌리엄 쿠퍼의 서문을 첨부하여 1741년 보스턴에서 출판한 것이 바로 에드워즈의 부흥에 관한 두 번째 글 성령의 역사 분별법이다. 이 책은 윌리엄 쿠퍼의 서문, 부정적 표지, 긍정적 표지, 반론들, 그리고 적용이라는 순서를 따라 기록되었다. 그런데 이 적용부분에서 에드워즈는 상당량을 할애하여 3부로 나누어 그간의 부흥의 역사가 전체적으로 틀림없이 성령에서 말미암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에드워즈의 이 책은 휫필드로부터 시작되었던 두 번째 성령의 비상한 사역에 대한 변론과 옹호의 성격이 강했다.

 

내용

에드워즈는 본문을 통해 부흥에 대한 부정적(소극적) 표지들에 대하여 아홉 항목으로 소개한다. 그리고 이어서 에드워즈는 긍정적 표지들을 다섯 가지로 밝힌다.

이후 에드워즈는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세 가지 적용으로 끝을 맺는다. 1) 앞서 밝힌 부정적, 긍정적 표지들을 기준으로 하여 최근 일어난 각성과 회심의 사건들이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성령으로 된 것이다. 이것을 판단하기 위해 두 가지 근거 곧 사실들과 기준들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데 기준들은 이미 14가지로 제시했거니와 사실들에 대해서는 직간접적으로 관찰하거나 타인의 정보에 의존한다. 비록 사실들에 있어서 회심의 과정에 나타난 다양하고도다소 괴리감이 있는 모습들이 있었으나 이는 전적인 성령의 역사다. 그러므로 2) (두 번째 적용은 반 부흥주의자들을 향한 것이다 - 필자 주) 어떤 식으로든 이 땅에서 진행된 저 사역을 반대하거나 방해하려 하지 말고 반대로, 그것을 증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합당하다. 3) (세 번째 적용은 부흥에 동참하는 자들을 향한 권면이다 - 필자 주) 이 역사의 동참자들로 이것으로 촉진시키는데 열심인 자들이 갖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부지런히 주의하라고 권한다.

 

⑶ 『균형잡힌 부흥론(1742)

 

집필 동기 - 옛빛파와 새빛파의 첨예한 대립의 구도 속에서 극단적인 반대자들과 광신적인 찬성자들 양자를 반박하고 뉴잉글랜드에서의 부흥을 지속하기 위해 협력할 것을 촉구함

한 가지 주의해야할 것은 앞서 언급한 데이번포트는 부흥의 반대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마치 바울에게 경쟁의식을 가진 전도자들이 바울의 수감을 은근히 좋아했던 것처럼, 그 자신도 그와 같은 역사를 일으키고 싶어 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무분별한 집회에서도 구분되지 않는 현상들이 일어났으며 추종세력들이 생기기도 했다. 문제는 그가 머무는 곳마다 같은 부흥찬성자들 간에 분열과 분쟁의 씨앗을 심었다는 것이다. 편집자 고언에 의하면, 데이번포트는 1742년 봄과 1743년 봄 부흥을 위한 광신적인 그의 설교 순회는 당국에 체포되어(1차는 스트랫퍼드이며 2차는 보스턴이다.) 두 번이나 각각 추방되므로 참 부흥을 갈망하는 분위기를 잠재운 것이다. 그는 이후, 1744고백과 철회를 통해 나는 만성적인 열병을 앓았으며 당장에 날뛰게 되는 병적 기질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잘못된 부흥 유도적인 설교와 자극적인 비판들에 대한 반성은 오히려 부흥반대주의자들에게 큰 빌미를 제공해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보스턴 제일교회의 부목사였던 찰스 촌시(Charles Chauncy, 1592 - 1672)는 반()부흥주의의(Old Light) 수장(首長)이었다. 그는 광신주의를 묘사하고 경계함이란 설교와, ‘뉴잉글랜드의 신앙상태에 대한 보스턴에 있는 한 신사가 에든버러의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인 조지 위샤트 씨에게 보낸 편지그리고 소위 프랑스 선지자들(위그노)에 대한 내용을 통해, 일어나고 있었던 모든 부흥의 역사를 광신적 열기의 결과로 치부해버렸다.

뉴잉글랜드에서 부흥을 찬성하는 자들과 반대하는 자들의 이 같은 대립은 1742년 말 첨예한 대립을 이루었다. 이것은 양진영의 지각 있고 경건한 목사들에게는 큰 근심이었다. 현대의 관점으로 볼 때, 각각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 분열하는 교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시점에서 에드워즈는 예일의 설교에서 천명했던 분별의 원리들을 증보해서 훨씬 분명하고 비타협적이 된 반대자들에게 그의 변증을 제시했다”. 1742년 말, 그는 뉴잉글랜드의 현재 신앙부흥에 대한 약간의 생각들이란 원고를 작성하여 출판하게 되었다.

 

구성

5부로 쓰여진 이 책은 1-3부는 반 부흥주의자들을 향한 반박, 4부는 극단적 부흥주의자들을 향한 반박, 그리고 마지막 5부는 참된 부흥을 유지하기 위한 제안으로 구성되었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부 현재 뉴잉글랜드에서 진행되고 있는 부흥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역사다

따라서, 1) 부흥은 사전에 판단해서는 안 된다. 2) 성경을 분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3) 분별의 필요성 - 회심 때에 일어나는 부정적인 면들을 기준으로 부흥 전체를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으로 매도하지 말 것, 그리고 부흥을 극단으로 몰고 간 광신주의자들의 잘못된 행동이 각성운동 전부를 오류가 있는 것으로 몰아가지 말 것에 대하여 기록했다.

2부 부흥을 반대하거나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지 말고 찬성하고 추구하라

1) 성경의 모범들과 경고들 -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할 때 중립적인 자세, 즉 관망하고 관찰하고 머뭇거리는 자세를 취하지 말 것을 권함. 2) 미국에서 동트게 될 천년왕국 -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의 역사가 시작될 장소로 미국이 될 것에 대해 예측하고 기대했다. 그래서 심지어, 이 부분의 서술에 있어서 확실히 섬들이 나를 앙망할 것이며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내 아들들을 먼 곳으로부터 데려올 것이라는 이사야 609절의 말씀 중 먼 곳을 아메리카로 해석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흥에 대해 반대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3) 부흥을 반대하는 자들의 위험 - 성경 곳곳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에 대해 방해하거나 반대했던 자들과 민족들의 결과를 알린다. 4) 부흥을 증진시키기 위해 힘써야할 사람들 - 공직자, 목사, 성도 각각에 대한 의무와 행동방침들에 대한 성경의 진술들을 인용하여 가르친다.

3부 부흥 참여자들에게 부당한 비난을 한 것에 대한 답변

부흥주의자들의 설교방식에 대하여 반 부흥주의자들이 가진 열 가지 비판들을 일일이 열거한 후 그에 대한 적절한 답변으로 일관하는데, 그 비판의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1) 목사들이 청중의 지성보다는 감정(affections)에 호소하여 그들의 감정을 최고도로 끌어올리기 위해 애쓴다. 2) 이미 큰 공포를 느끼고 있는 자들에게 위로가 아닌 두려움을 설교한다. 3) 설교자들이 가련하고 순진한 어린이들을 지옥불 이야기와 영원한 저주에 대한 말로 놀라게 만든다. 4) 신앙 집회를 너무 자주 가지면서 신앙문제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5) 최근에 있었던 잦은 설교가 무익하고 해로운 내용들이다. 6) 고함이나 기절과 같은 육체적 현상을 너무 많이 일으킨다. 7) 아주 특별한 외적 현상 때문에 감동을 체험한 사람들을 함께 모은다. 8)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을 때 말을 많이 하고 열렬하게 격렬하게 한다. 9) 집회 시에 노래를 너무 많이 한다. 10) 어린이들이 집회를 가지면서 자기들끼리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종교적 행위를 한다.

4부 이 부흥을 진흥시키기 위해 혹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처신에 있어 고치거나 피해야 할 일들

신앙부흥에서 생기는 오류 - 1) 영적 교만, 2) 잘못된 신학관점, 3) 마귀가 특별히 사용하는 것들에 대하여 무지한 것인데 첫째, 기독교인들 자신의 내적 체험에 대한 것과 둘째, 체험의 외적 결과들에 대한 것이다. 이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체험 속에 종종 불순물이 섞여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수한 오류

1)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로서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서 문제없이 신앙생활하고 있는 자들을 회심되지 않는 자들이라 비난하는 일, 2) 평신도에 대한 권면, 3) 새롭고 평범하지 않으면서 본질도 아니고 특별히 명령된 것도 아닌 것을 공적 예배에 도임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속해있는 지도자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5부 부흥을 촉진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들

이 부분에서 에드워즈는, 1) 부흥의 걸림돌들을 제거할 것, 2) 부흥반대주의자들이 해야 할 일, 3) 나이든 사람들이 해야 할 일, 4) 목사들이 해야 할 일, 5) 대학 교수들이 해야 할 일 6) 부자나 사회 지도층이 해야 할 일 7) 모든 성도가 해야 할 일 등을 설명한다.

 

부흥과 관계된 편지들

여기에는 에드워즈가 기록한 7개의 편지 - 1) 코네티컷 고센의 라이먼 집사에게, 2) 스코틀랜드 킬사이스의 제임스 로브 목사에게, 3) 스코틀랜드 캠버스랑의 윌리엄 매컬럭 목사에게, 4) 복음적 목사들의 회집에, 5) 보스턴의 토머스 프린스 목사에게, 6) 윌리엄 매컬럭에게, 7) 스코틀랜드 카아녹의 토마서 길레스피 목사에게 - 와 조셉 벨러미의 참된 신앙의 개요서문이 포함되어 있다.

 

3. 에드워즈의 부흥론의 기초

 

제임스 패커(J. I Packer)은 다음과 같이 에드워즈라는 인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사람들은 에드워즈는 하나님 중심적이고 하나님께 집중하며 하나님에 심취해 있고, 하나님께 사로잡힌 사람으로 묘사한다. 또 그는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었다. 이는 전혀 과장된 말이 아니다. 에드워즈는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걷든지 말을 타든지 혼자 공부하든지 행복한 가족의 품속에서 편히 쉬든지, 늘 하나님과 의식적으로 교제하며 살려고 노력했다...... 모든 일에 대한 합리적으로 성경적이고 성경적으로 합리적인 이해는 그의 지속적인 목표였다.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

에드워즈의 신앙은 - 그가 비록 칼빈의 신학을 접한 일이 없었다 할지라도 - 칼빈주의의 전통인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절대적 믿음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리고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개혁주의의 전통을 충실히 이어가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의 부친이 비록 회중교회의 목사이긴 했어도 에드워즈는, 청교도적 유산을 충실하게 이었으며 당대 뉴잉글랜드에 왕성했던 이신론과 알미니안적 유산들에 대해서도 강한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성경 언약에 기초한 구원사적 이해

그는 또한 성경에 기초한 언약과 구원사적 안목을 견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의 목양지에 나타난 일련의 갱신과 부흥에 대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에 대한 절대 신뢰를 바탕으로 관조하고 이해하려 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전적 신뢰

동시에, ‘성령의 역사에 대한 그의 자세는 놀라울 만큼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 그간의 영적 각성이 성령의 역사였음에 대하여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성령의 역사 분별법균형잡힌 부흥론을 통해 그가 제시한 기준들은, 부흥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주도적인 은혜의 역사이기에 다소 흠과 모순된 듯한 현상들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거나 전체를 거짓된 영의 일로 치부하지 않았다. 그가 목격한 회심의 다양한 형태, 그리고 그 회심의 역사 속에서도 자주 출연했던 사탄의 역사, 인간적인 몸부림들과 모순, 잘못된 인식들조차도 철저하게 성경을 기준으로 해석하려 했고 논리와 합리를 통해 서술했으며 성령의 역사의 부분으로 이해했다.

  

 

4. 결론

 

모든 교회는 부흥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에 비례할 만큼 부흥주의의 유혹과 미혹이 역동하고 있다. 현대 교인들에게 각인된 부흥은 가히 정통적 교회의 가치를 근본부터 잠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긍정, 치유, 회복, 성공, 부의 메시지 곧 인류가 에덴에서 범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게 할 만큼 미혹되어버린 이 현대판 선악과는 어쩌면 부흥의 또 다른 면일 수 있다. 수많은 이들이 육신적 영광과 웃음과 해학으로 변질시켜버린 십자가일 수 있다. 고난, 좁은 문, 좁은 길, 자기부인(自己否認)의 메시지가 희석(稀釋)되고 있다. 반대로 상승욕을 정당화해주고 그것을 창조주의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뜻이라고 가르침으로, 죄의 길을 열어주고 악에 대하여 성문을 열어버린 강단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신학자들과 목사들의 진단이 부흥주의와 부흥을 구분하는 선에서 만족한다면 그야말로 글놀이, 말장난에 불과한 일이 될 것이다.

부흥, 소생, 회생으로 번역되어야할 성경의 용어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열매로서의 생육, 번성, 충만, 정복, 다스림으로만 가르쳐지는 현대 교회의 현실에서 에드워즈의 부흥론은 분명히 들여다봐야할 거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