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예수께서 약속하신 것 (Part 1.)

 

 

 

   우리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멈추고, 조용히 예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셨던 것들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러한 약속들은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질문과 관계있기 때문에 - 우리가 실제로 그리고 진실로 다른 존재들이 될 수 있는지 최상의 방법은 복음서를 향해 곧바로 가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주셨던 모든 약속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펼칠 때,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첫 번째 사실은 우리가 기대했던 바와 같은 많이 “변화된”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물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복음서는 그분과 관계되어 있고, 단지 그분과만 그리고 인간에 대하여 이야기 되어지는 것은 우리에게 그분께서 누구시며, 그분께서 무엇을 하셨는지를 보여주려는 목적 구실을 한다.

 

   우리는 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긴장이 가득한 시대, 거대한 소요들의 시대를 회상케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때는 많은 관계들이 지금과는 달랐다.

 

   ( When many relations were differant from what they are now. )

 

   이성적으로 쉽게 사람들은 가정과 그들의 업무들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며, 그들이 여기저기서 예수님을 쫓을 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에 참여해버린다는 사실로 부터 이것은 명백해진다. 이 사실은 복음서에서 특별한 색채로 씌어 있는 사건들임을 모두에게 보여준다. 즉 이러한 사건들을 우리의 시대와 환경에 이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마태가 세리라는 것을 읽게 된다. 예수께서 그를 부르셨을 때 마태는 즉시 결정적인 발걸음을 옮긴다. 그는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된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만일 마태가 세리로 남아있었다든지, 그 직업을 가진 채 살아가면서 예수의 명령들을 따라 행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보다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그리스도인 세리가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복음서들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복음서들은 또 다른 세리인 삭게오(Zacchaeus)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삭게오는 그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줄 것과 그가 악하게 행했던 모든 사람에게 보상할 것을 약속했다. 복음서들은 잠잠하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알고 싶어하지 않을까! - 실제로 삭게오가 세리로 남아있었는지 아닌지 어떻게 판명되었으며, 그가 예수를 만난 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하여.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하여 복음서들은 우리에게 대답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삶(circle)을 잘 살펴보면 그들 가운데는 예수의 능력과 은혜로 말미암아 그렇게 행하도록 그리고 위대하고도 강한 행동들을 수행하도록 인도되어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마리아(Mary)를 안다. 그녀는 단순하고 평범한 방법으로 그분의 유월절 준비를 위해 예수께 기름을 바를 때 세계적으로 중요한 행동을 수행한 것이다. 우리가 제자들을 관찰해보면, 그들은 성실하고 꾸밈없는 헌신으로 그들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들에게 떠나며 그들과 관계를 끊어버린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자들은 또한 우리에게 많은 사건들에서 자신들의 마음이 여전히 묶여져 있고 속박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심지어 그들은 여전히 사리사욕과 자기본위(self-centeredness) 그리고 자기영화(self-plorification)의 실타래(web)에 얽혀있었다. 그러한 실들이 우리의 삶을 말려들게 한다. 이따금씩 그러한 실들이 더 이상 붙잡고 속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완전히 스스로를 풀어버리지 못한다. 심지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도 제자들의 삶속에 약간의 낡은 사고가(old spirit)남아있다.

 

   단지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행했던 것만 생각해보라. 경외하는 사랑이 얼마나 그를 완전히 제압하는 가를! (how the love of honor got the best of him)(갈 2:11-13) 또 바울을 반대하는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교회회의 자세를 생각해보라. 그는 완전히 공평하지 못하고 이성적이지 않았다(행 21:17-25). 아니, 이러한 사람들은 아직 말씀의 충분한 의미에 있어서 아직 구원 받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를 속박하고 옥죄는 것과 동일한 관습들을 가지고 있었다. 참으로 그들 중 한 사람 즉 바울의 고백은 아주 명백하다. 그는 항상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의 삶속에 들어온 그 구원에 대하여 진지한 용어들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서 7장의 전통적인 장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가 항상 인식하고 있는 바의 내적인 불일치(불화, discord)에 대하여 대단히 감동적인 단어들로 이야기한다 :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로마서 7:22,23) 그리고 그때 그는 구원에 관한 비통한 부르짖음(heart-rending cry)으로 끝맺는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깊은 저음을 가진 그와 같은 어두운 음조(somber melody)는 하나님을 향한 이 용감한 승자(champion)의 모든 편지에 두루 나타난다. 한 곳에서 그는 죽은 자들로 부터의 부활과 모든 면에서의 새 사람됨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으나,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게 결론 맺는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 3:12)

 

   결코 바울은 하나의 도구(tug)를 건지고 죄의 옛 속박들로 부터 자신을 풀어 떼어놓는 기쁨에 찬 완전주의자(joyful perfectionist)로서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전적으로 너무 정직하며, 너무 실제적이고, 너무 겸손하다. 바울은 오직 우리가 “주 안에서와, 그리고 그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할” 때 마귀의 시험에 대항할 수 있다는 것을 매우 잘한다.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1,12)

 

   그리스도 이후의 첫 세기동안에 쓰여진, 이러한 말씀들은, 그것들이 이야기 되어진 이후 거의 2천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에게 삶(living)을 제시해 주는 하나의 그림이지 않는가! 이것보다 더 생생하게 오늘날 우리의 딜레마(dilema)를 기술할 수 없을 것이다. 중세시대의 한 독일의 신비주의자는 한 때 “작을 보폭으로 속보하는 절름발이에 의해서는”(by little jog trots) 획득되어질 수 없는, 그러나 “매일 씨름하는” 문제인 구원에 대한 전투에 관하여 말했다. (하인리히 폰 주조, Heinrich von Suso) 그리고 바울은 그 전투의 불확실성(precariousness, 그 전투가 남의 뜻에 달렸음)을 필히 깨닫고는 어린아이처럼 낙천스럽게 말 할 수 있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바울은 그가 은혜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즉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서서히 그리고 점진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 그분의 형상으로의 변화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야기되어지는 것들은 많이 있다. 이와 같이 더욱 우리는 실제적이며 최종적인 선(lasting good)으로서의 구원의 문제가 자신의 손짓(with a turn of one's hand)으로 풀려질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해 왔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인이 수많은 갈등들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보아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속에는 성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하나의 변화가 오게 되는데 그것은 느리며, 항상 눈에 보이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아주 멀리 달아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못된 전제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작은 실제적인 관점으로 부터였다. 우리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제들로 부터 출발했다. 즉 말하자면 밑바닥에서 부터 위로(from the bottom up) 시작했다. 우리는 다른 출발점, 즉 그리스도 그분 자신의 말씀과 그분의 약속들로부터 시작했어야만 했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위에서 부터 밑으로(from the top down) 시작했어야만 했다. 예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그것이 지금부터 우리와 관계되어야 할 그 문제이다.

 

   그러면 우리는 당장 하나의 매우 중요한 사건을 살펴보자. 즉 그것은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자기증거의 중요한 것으로써 급격한 변화와 변형에 대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는 명백하게 하늘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격심하게 달라지게될 것을 선포하신다. 이웃을 향한 증오의 감정을 음란한 정욕, 복수심이 가득찬 감정들, 거룩한 체험과 위선이 자리할 곳은 없다. 거기에는 새로운 삶이 자라나며 자명한 사실처럼 무성해진다. 하늘나라는 그것의 바로 그러한 본질에 있어서 전적으로 일상적인 삶의 과정과 대립된다. 거기에는 슬퍼하는 자들이 복 있는 자들이라고 불리워진다. 하늘나라는 영적으로 가난할 자들을 위하여있으며 “너희에게 있는 그 슬픔”은 부자들을 위하여 있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