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구원을 위한 부름 (The call for Deliverance)

 

 

 

   오늘날 세계에서는, 재난과 재앙과 같은 그러한 외적인 것들로 부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재의 한계들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긴급하고 계속적인 외침이 있다. 그것이야 말로 구원을 위한 보다 길고 훨씬 더 인간적인 필요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언제든 평화와 화목의 시대라는 것이 있다면 그들의 삶에 변화가 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 이러한 피해 의식(distressed feeling)은 새롭고 도덕적인 회복(rehabilitation)을 위한 커다란 열망으로 세계 도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득 채운다.

 

   오늘날 우리는 악마 같은 힘이 우리 모두 속에 잠자고 있으며,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가 온전하고 풍부한 지성의 선물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안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가 그토록 열망하고 있는 평화와 안전을 우리에게 제공해줄 충분한 세력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 속에는 또 다른 힘이 있다. 인간 속에는 도덕적인 감각, 선과 악의 개념이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불가향력적으로, 우리가 이러한 도덕적인 충동을 함양하고 강하게 할 수 있는지 어떤지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훈련과 교육을 통해 우리의 모든 방랑성과 탈선에도 불구하고 조직이 파괴되고 부서진 세상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도덕적 규범에 대한 확고한 이해를 취할 필요성(당위성)과 우리가 여전히 우리 존재의 심연에 있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우월성을 확신시켜 줄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구세대가 했던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이것을 할 수 있는가? 기독교 교회를 위해서 바로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한 기회이다.

 

   우리 주위의 세상은 더 이상 그 자체를 확신하지 않으며, 그것이 실패했다는 것을 전보다 더 기꺼이 인정할 수 있다. 모든 면에서 그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행동 속에서 보다 나은 안정성을 그리고 우리의 노력 속에서 보다 나은 감각과 의미를 획득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로 제기된다. 복음은 교회에 위임되고 맡겨지는데, 그것은 고통당하는 인간이 안식을 발견할 수 있는 가벼운 짐과 쉬운 멍에에 관하여 말한다. 교회는 혼란스러운 세상에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고, 퍼트릴 수 있다. 교회는 죄의 모든 세력보다 훨씬 강하신 한 분, 그리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고 우리를 높은 곳에 올려 놓을 능력을 가지신 한 분을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오늘날 자신의 이기주의를 깨달으며, 자신의 근절할 수 없는 자아가 하나의 저주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인간은 더욱더 자신으로부터 분이되고 싶어한다. 그는 그의 자기 충족적인 강제적 충동이 삶의 모든 실제적인 즐거움을 질실시킨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는 정욕과 성욕들이 - 그것들이 아무리 유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할찌라도 - 본질적으로 하나의 저주라는 것을 안다. 인간은 인간내면의 그 세력이 무시무시한 위험과 모험들로 가득차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인간의 삶을 흐리게 하고, 어둡게 한다는 것을 피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돈을 사랑하는 것과 명예를 열망하는 것이 인간을 위대한 행동(great action)과 모험에로 이끌어 갈 수 있지만, 결국에는 삶을 공허하게 하고 폐허로 만들어 버리는, 길들지 않은 괴물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들은 더 이상 감추어질 수 없고 간과될 수도 없다.

 

   그것들을 의식하고 그것들을 기꺼이 인정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실로, 그들의 이웃이 마음과 정신의 변화를 가지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많이 있다. 반대로, 그들은 우리가 우리자신들부터 먼저 시작해야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스스로, 개인적으로, 새로운 토대(foundations)를 놓으려고 해야 한다. 저절로 실망하게 되는 세상에서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깊이 뿌리박힌 이기주의로 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분께서 이것을 하기 원하시며(will do) 그것을 하고 계신다(is doing)는 것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의 원천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우리에게 고통과 근심의 엄청난 짐을 지우는 이 모든 감각적이고 성적인 욕망과 욕정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능력을 갖고 계시며, 그리고 그분께서 그렇게 하기를 원하며, 그것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서슴치 않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기독교인의 삶을 가장 높은 강렬함에로 올려놓을 중요한 것이다.

 

   도덕적 회복은 단순한 공중누각(air castle)이나 이상향(Utopia)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적이고 살아 있는 유형의 사실(reality)이다. 그분께서는 20세기의 낙심하고 억압된 희생자들에게 구원을 기꺼이 베풀어 주신다. 그것이 일찌기 사실이었다면, 그것은 지금 여기서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무한하고 변함없는 사랑의 위대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에, 이 멧세지가 우리의 시대에 전해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즉 그것은 우리 스스로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슴깊이 이것들이 사실이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날마다 변화시킬 수 있으며 변화시키실 것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경건하고 진실한 한 그리스도인이 한 번은 나에게 그가 항상 동일한 존재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그를 근심시키는 것은 일찌기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가장 감동적인 설교는, 그에게 큰 교훈을 준 것이긴 하지만, 그가 집에 돌아갔을 때, 동일한 죄와 동일한 허물들을 가진 동일한 인간으로 남아있다는 그 놀라운 사실을 변경시키지는 못했다. 우리의 삶이 만들어지는 물질계(material)는 마치 너무 다루기 어렵고 완고해서 아무리 강한 바람이라 할찌라도 그것을 요동시킬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구원, 그것은 낱말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실제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재로 나의 삶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신가? 아니면 나는 지금 나의 모습처럼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으로 죽음까지 걸어야할 운명인가?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슬프고 쓰라린 문제들이 놓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