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쯔빙글리의 성찬관과 성만찬 논쟁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을 마감하면서 루터와의 성만찬과의 차이와 양자 간의 논쟁을 정리해 두고자 한다. 성만찬 문제는 루터와 쯔빙글리 사이에 심각한 견해차를 보였고 개혁운동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최대의 신학논쟁이었다. 1529년 마부르그 논쟁을 통해 성만찬 이해에 관한 양자의 교리적 입장을 중재하려는 노력이 좌정되므로 독일의 루터파와 스위스 개혁파간의 연합은 무산되고 교파적 차이는 영구화되어 갔다.

여기에서는 1529년 마부르그 논쟁이 있기까지의 배경과 두 개혁자간의 논쟁의 전개과정, 그리고 1529년 마부르그 논쟁에서 명백하게 제시된 성만찬 견해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1529년 당시는 개혁운동에 있어서 일대 위기였다. 프랑스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교황 클레멘트 Ⅶ세(Clement Ⅶ)와 화해한 황제는 1529년에 독일 내정에 간섭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해에 모였던 슈파이에르 제국의회는 루터파의 확산에 놀라 루터파의 확산을 금하고 로마의 감독권 회복을 명하였다. 이 위급한 상태에서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였던 헷세의 필립(Philip of Hesse) 공은 독일과 스위스 복음주의 세력의 공수동맹을 시도했다. 루터파와 쯔빙글리파는 거의 모든 교의에 견해를 같이 했으나 성찬에 관한 교리에서는 견해차가 분명했다. 이 양측의 신학적, 교리적 차이를 좁히고 조정할 수 있기를 원했던 필릭공은 1529년 10월 1일 루터파와 쯔빙글리를 자기의 성(Marburg)에 초청하여 2일과 3일 회담케 했는데, 이것이 바로 '마부르크 논쟁'이며, 이 회담을 통해 양자의 성찬관의 차이는 분명해졌다.

루터의 성찬론
루터의 성만찬교리는 대략 세 시기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첫 시기는 1519년 '성찬에 관하여'를 썼을 때까지이며, 둘째 시기는 1520년부터 1529년까지, 곧 교회개혁의 3대 작품 중의 하나이자 성만찬에 관한 견해를 보여주는 '교회의 바벨론 감금'을 썼을 때부터 마부르그 논쟁 때까지이며, 세 번째 시기는 마부르그 논쟁 이후 루터 자신의 신학형성과 더불어 구체화된 시기이다.
   루터는 1519년 한편의 시편강해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원형"이란 개념으로 성찬의 상징적 의미를 가르친 바 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의 몸된 성례전과 형제의 사귐에 관한 설교"(Ein Sermon von der hochw, Sacrament des Leichnams Christi und von den Bruderschaften, 1519)에서는 성찬을 화체설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즉 루터는 "그의 참된 자연적 살이 떡 속에 있다. 왜냐하면 떡이 그의 참된 자연적 몸으로 변하고, 포도주가 그의 참된 자연적 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또 "떡이 어떻게 남아 있으며 그것이 어느 때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에서 루터는 화체(化體)의 '불가사의함'을 말한바 있다.
   그런데 다음 해(1520)에 쓴 '교회의 바벨론 감금'에서는 화체설적 견해를 포기하였다. 왜냐하면 화체설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영향 받은 토마스주의의 그릇된 개념으로 보았고, 화체설은 토마스주의로 복귀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루터는 떡의 실체가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몸이 동시에 전달된다는 사상, 곧 공재설(共在設, consubstantiation)을 주장하게 되었다. 즉 떡과 포도주는 물질이며 상대적 요소이지만 떡과 포도주 안에(in) 아래(under), 그리고 떡과 포도주와 더불어(with) 그리스도 예수의 참된 살과 피가 임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떡과 포도주와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신비스런 관계를 '가열한 철'(ferrumignitum)이란 비유로 설명했다. 철과 열은 별개의 것이지만 일치가 되면 특수한 조재가 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1522년에 이르러 루터는 네델란드 출신의 내과 의사였으며 인문주의자였던 코넬리우스 호니우스(Cornelius Honius)로부터 서신을 받았는데 그는 성만찬 제정의 말씀 곧 "이것은 내 몸이다"(Hoc est corpus meum)의 est는 significat라는 단어와 동등한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듣게 된다. 그러나 루터는 호니우스에게 답하기를 상징적 해석방법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 바는 아니나, 성경에 분명히 "이것은 나의 몸이라"하고 아무런 수사법도 없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고 답변하였다. 그래서 루터는 성경이 '이다'(est)라고 말씀할 때 그 문자적 의미를 감히 '상징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진실로 성찬 속에 함께 하시며, 이러한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는 그의 무소부재성에 근거한다. 그래서 1529년까지의 루터의 성찬교리는 공재설과 그의 기독론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설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쯔빙글리의 성찬론
루터가 수도원에서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찾고 있을 때인 1506년 말에 쯔빙글리는 글라우스(Glarus)에서 신부가 되었다. 루터가 자신의 종교적 갈망과 당시의 종교적 상황에서 개혁자로서의 길을 갔지만 쯔빙글리는 원전들로 돌아가고자 하는 에라스무스적 권고와 당대의 인본주의적 경향에서 출방하였다. 그래서 쯔빙글리는 에라스무스 외에도 왈프린(H. Walflin), 비텐바하 등과 같은 인본주의자들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성만찬에 관한 쯔빙글리의 견해를 찾을 수 있는 최초의 문헌은 1523년에 쓴 그의 서신이다. 그는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 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부정적이었다. 그는 화체설은 성경적 근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에도 없었고 가톨릭의 창작이라 하여 거부하였다. 쯔빙글리는 '이것은 나의 몸이다'의 est라는 말은 윤리적-비유적(typolgisch)인 것으로 이해하였고 성찬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 요한복음 6장 63절의 "육은 무익하니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어거스틴과 초기 스콜라주의자들처럼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의 존재를 지역적인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성만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배격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성만찬 제정의 말씀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였다. 즉 쯔빙글리는 성만찬은 이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이미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고 확인하는 증거로서 의미가 있을 분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나누신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성찬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주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데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
   쯔빙글리가 이처럼 성찬을 단순히 기념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코넬리우스 호니우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호니우스는 1523년 헤이그에서 쯔빙글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는 하나의 수사법 혹은 문학적 표현 양식이므로, 이 구절은 '이것은 나의 몸을 상징한다.'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호니우스는 '우리는 입으로 받아들이는 빵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그리스도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쯔빙글리는 호니우스의 해석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이 해석을 가리켜 어려운 난제를 명백하게 꿰뚫어 볼 수 있게 해준 '값진 진주'라고 극찬하였다.

성만찬 논쟁의 과정
그러면 루터와 쯔빙글리간의 성만찬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어떻게, 어떤 과정으로 발전되어 갔는가에 대하여 정리해 보면 두 사람 사이의 성만찬 교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루터와 쯔빙글리의 성찬관의 차이는 이미 1519년부터 나타난다. 루터는 호니우스가 말한 '이것은 내 몸이다.'의 'est'를 'Significat'로 보는 견해를 검토했으나 두 가지 점에서 인정할 수 없었다. 첫째는 주석적(exegetical) 입장에서였고, 둘째는 그의 기독론에서였다. 이런 루터의 사상은 1526, 1527, 1528년에 나타난 그의 신학논문에 분명히 나타난다. 쯔빙글리는 외콜람 파디우스의 지지를 받았지만 루터는 복음주의 선제후들과 뉘른베르그(Nürnberg)의 오시안더(A. Osiander, 1498~1552) 등의 지지를 받았다.
   루터는 쯔빙글리의 반론에 자극을 받아 1524년 그의 성찬론을 써서 스트라스부르크 신학자들에게 보냈다. 루터는 그의 설교 가운데서도 '이것은 내 몸이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명료한 것이므로 어린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편재성과 관련시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라는 말은 그의 편재성을 가르친 것인데, 어떤 장소에나 물건 가운데도 계신 점을 말한다고 하였다.

쯔빙글리는 1525년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에 대한 강해'에서 가톨릭의 화체설과 루터의 성찬론 양자를 비판하였다. 이때부터 양측의 토론과 문서교환이 시작된다. 외콜람파디우스는 동년 9월에 '이것은 나의 몸이다는 주의 말씀이 올바른 해석'(True and real explanation of the words of the Lord. 'This is my body')을 써서 쯔빙글리 견해를 후원하였다. 1526년에 쯔빙글리는 독일어로 '성찬에 관한 명확한 해설'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말은 '이것은 내 몸을 상징하는 것이니'로 해석하고 루터의 견해를 다시 비판하였다. 그는 또 루터의 글 '급진파들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례에 관한 설교'(Sermons on the sacrament of the body and blood of Christ against the radicals)를 비판하였다.
   1527년 루터는 격렬한 논쟁적인 글로 즉각 대응했다. 쯔빙글리가 1527년 '우정어린 주석'(Friendly Exposition)에서 임재설을 반박하고 나오자 동년 루터는 "'이것은 내 몸이다.'는 말씀은 여전히 급진파들에 대적하고 있다."(That these words 'This is my Body' still stand against the radicals)를 4월에 발표하였다. 쯔빙글리는 그해 6월 여기에 대항하여 "'이것은 나의 몸이다'는 말씀에는 본래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That these Words 'This is my body' retain their original meaning, 1527)는 논문으로 대응하였다.
   1528년 3월 다시 루터는 쯔빙글리에 대항하여 '주의 만찬에 대한 고백'(Confession concerning the Lord's Supper)을 써서 반박하고 바울이 썼던 '이단들'이란 용어까지 썼다. 이 글은 성찬에 대한 루터의 가장 중요한 논문이며 문서를 통한 논쟁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쯔빙글리는 이 글에 대하여 심히 분개하고 자기가 마치 바보처럼 취급받는 일은 견딜 수 없는 모욕이라고 선언하였다. 스트라스부르크 개혁자였던 부쩌(Martin Bucer)는 루터의 이 논문을 읽고 크게 감명 받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루터가 실제적 임재(real presence)란 말을 할 때 그것은 외부적인 것, 곧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Bodily presence)를 의미하지 않고 성례전적 연합(Sacramental union)을 의미한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쩌는 '성만찬에 관한 루터와 그의 대적자들의 견해 비교'(Comparison of the position of Luther and oppanents concerning the Lord's supper)를 써서 루터파와 쯔빙글리파의 입장을 중재해보려는 노력을 시도했다. 헤세의 필립도 동일한 생각이었다. 정리해보면 루터와 쯔빙글리의 논쟁의 요지는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성'(Omnipresence the body of Christ)과 '그리스도의 신․인성의 관계'(Relation of Christ's divine and human natures)의 문제였다.

마부르그 논쟁
성만찬 토론은 마부르그 논쟁을 통해 절정을 달했다. 1529년 3월 15일 제2회 스파이에르회의가 개최되어 보름스 제국의회의 칙령을 강화할 것과 루터파, 쯔빙글리파 및 재세례파의 타파 등을 결의함에 따라 복음주의 운동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로마 가톨릭의 정치적․군사적 공세에 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을 중심한 루터파와 스위스의 쯔빙글리파 간의 협력관계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복음에 대한 저의, 곧 신학입장의 일치가 우선시 되었으므로 필립공(Philip of Hesse)은 루터와 쯔빙글리에게 신학적인 토의를 제안하였다. 이렇게 되어 회담은 1529년 10월 1일부터 3일까지 계속되었다.

10월 1일의 첫 회담은 비공식 회의로서 두 반으로 나누어 회담하였다. 즉 쯔빙글리는 멜랑히톤과 회담하였고, 루터는 외콜람 파디우스와 회담하였다. 부쩌에 의하면 루터와 쯔빙글리는 다혈질적이었으므로(hot-tempered) 극단적인 대립을 피하기 위해 루터와 쯔빙글리를 직접 대결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이날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이나 루터와 외콜람파디우스 논쟁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쯔빙글리와 멜랑히톤 회담에서는 7시간 동안의 토론 끝에 삼위일체론, 기독론, 원죄 등에 관한 견해 등 성찬론을 제외한 대부분에 있어서 일치를 보게 되었다.
   그 다음날인 10월 2일(토요일) 오전 6시 공식회의가 열렸다. 쯔빙글리는 본 회담은 공개해야 된다는 의사를 표시하였으나 루터는 이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마부르그의 선제후는 저명한 신학자와 고관들만 참석할 것을 허락하였다. 이날은 헤세의 필립공의 연설에 이어서 다시 토론이 시작되었는데, 성만찬 말씀의 해석문제에 집중되었다. 먼저 루터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야만 됩니다. 그 말씀이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몸이 현존치 않는다고 하면, 거기에 대해 당신은 실제로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물리적인 증명이나 기하학적 논리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탑은 문구멍으로 통화할 수 없다는 이론과 같은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수학 위에 계시며, 그의 말씀은 두려움과 떨림으로만 우러러 볼 수 있고 또한 복종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루터는 두 물체는 한 장소에 동시에 공존할 수 없다는 수학의 원칙은 여기에 적용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수학자를 초원하기 때문이라고 반박하고 '받아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구절은 문자 그대로 우리에게 믿기를 요구하는 불변의 증거라고 주장하고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강조하였는데 쯔빙글리는 이에 동조할 수 없었다.
   한 회기가 끝난 후 루터는 성만찬에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임하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문서(a formula)를 작성하였는데, 그 골자는 '그리스도는 떡과 포도주 속에 질적으로, 양적으로, 혹은 국부적으로"(qualitatively, quantitatively, or locally)는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실체적으로"(essentially and substantively) 임재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성찬식이 순전히 영적, 상징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보았고, 만일 루터의 견해를 받아들일 경우 일반신도들이 이 입장을 로마 가톨릭적 해석으로 돌아가는 시발점으로 볼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쯔빙글리는 떡과 포도주는 우리를 위한 희생제사에 드려지는 몸과 피의 표징이며 이 표징들은 몸과 피가 이렇게 드려진다는 것을 상징하며 우리에게 구속사역을 회상시켜 준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내 몸이다.'의 '이다'는 바로 '상징한다'의 의미로 해석한 것이다. 오직 신앙만이 구원을 이해할 수 있으며 신앙은 영적인 실재들과만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신앙의 명상을 통해서만' 성만찬에 임재 하시지만 '본질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임재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쯔빙글리는 요한복음 6장 63절에 곧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본문을 변론의 근거로 삼았다. 장소에 대한 그리스도의 몸의 한계에 우리의 이해가 일치하지 않게 될 것으로 보았다. 더욱이 성만찬 제정을 말씀하실 그 순간에 그리스도의 피는 아직 흘려지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쯔빙글리의 기독론은 이 점에서 공헌을 하게 된다. 즉 루터가 전통적인 성만찬 교의를 인격적 연합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는 반면에, 쯔빙글리는 언제나 두 속성들의 관념상의(추상적인) 차이를 전제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만찬에 관한 두 사람의 견해는 결국 기독론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 쯔빙글리는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성을 취하신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지상생활에서의 그의 두 속성들이 세밀히 구별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의 신성은 하늘과 땅을 채우고 있지만 그의 이성은 하늘과 특별한 장소에 국한되어 있다고 보아 영화로워진 몸의 편재성을 부정했다.
   만일 한 본성이 다른 본성에 속하는 것으로 보거나, 혹은 한 본성의 속성들이 전체 인격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면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가 된다. 그리스도이 신성과 인성 그리고 그의 인격적 연합체에 관한 쯔빙글리의 사상들은 여기서는 정통적이다. 따라서 성만찬은 쯔빙글리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 완성된 구속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기 위하여 계획된 기념식사(a memorial meal)이며, 다른 한편으로 성만찬은 회중의 면전에서 행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의무를 떠맡는 것을 나타낸다.
   반면에 루터는 스콜라주의적으로 훈련받은 신학자로서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두 본성들이 연합되었으므로 모든 그의 말씀들과 행위들은 인간 예수의 신성의 표현과 기관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간 예수 속에 계시된 분을 제외한 어떠한 하나님도 알지 못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들 속에 임재하시며, 실제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유형적으로 '거하시므로' 한 인격이 인간과 신이 된다고 했다. 이 견해가 양성교리에서 볼 때 두 본성은 분리될 수 없게 연합된 '동일한 하나의 인격'(one single person)이므로 한 본성이 존재하는 곳에는 다른 본성도 반드시 존재해야 된다. 이와 같은 기독론적 이해가 성만찬 교리에서도 동일하게 반영된 것이다. 즉 루터의 성찬관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성 이론은 그의 기독론에서 연역된 논리적 추론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신학적 견해 차이 때문에 어떤 타협이나 합의가 없이 상대편의 주장에 대해 의혹을 가진 채 10월 3일 오후 필립공의 간곡한 건면에도 불구하고 결렬되고 말았다.
   루터와 쯔빙글리측은 그날 저녁 다시 한번 교리적 일치에 도달하려고 노력하였으나 허사였다. 결국 양측은 연합의 실패로 말미암아 상당한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함스부르가의 가톨릭 전선에 루터의 본거지 삭소니(Saxony)지방이 점령당했고, 헤세의 필립은 옥에 갇히게 되는 쓰라림을 맛보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처럼 루터파와 쯔빙글리파의 공수 동맹을 위한 신학적 토론은 결렬되었으나 필립은 공수동맹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양측을 설득시켜서 15개조의 신앙조항을 초안케 했다. 양측은 성만찬에 관한 제15항은 견해를 달리했으나 나머지 14개항, 곧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믿음, 세례 등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미사제도의 부인 그리고 수찬자에게 빵과 포도주를 함께 주야 한다는 견해에도 일치하였다.
   이 회담 후 양파 간의 의견을 교환하고 그 결과를 기반으로 기초된 것이 마부르그 협정신조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우리 쌍방은 유일하시고 참되시며 영원부터 계신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가 하늘과 땅과 그 밖에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신 것을 믿는다. 그는 본질과 본성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위(位)에 있어서 세 분(三位)이시다. 즉 니케아 회의와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가 고백하여 온 것 같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하여 가르친다.
   2. 성부나 성령이 아니라 성부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본래부터 하나님이신 성자께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의 생식 과정에 의하지 않고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인간으로 나신 것을 우리는 믿는다. 그의 몸과 영은 다른 사람들과 동일하나 죄가 없으시다.
   3. 전술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성모 마리아의 아들이시며 인격에 있어서 분열함이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죽음으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자 성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어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는 중이시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장차 오실 것이다.
   4. 원죄(原罪)는 아담으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지고 유전되었는데 이 원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멸망을 받게 된 것을 우리는 믿는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명과 죽음을 가지시고 돕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는 반드시 영원한 멸망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하나님의 축복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5.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원죄와 그 밖에 여러 죄의 권세에서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받게 된 것을 믿는다. 신앙 이외의 어떤 선행이나 행동이나 직위가 죄의 권세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데 아무 효력을 나타내지 못한다.
   6. 이와 같은 신앙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의 어떤 선행이나 선한 봉사나 혹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그런 믿음을 얻을 수 없다. 다만 성령만이 우리 마음 가운데 믿음을 주시며 창조하시는 데, 그리스도의 말씀과 복음을 들음으로 이같이 되는 것이다.
   7. 이러한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義)가 될 수 있으며, 이 신앙의 연고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경건하다 하시며 거룩하다 하시는 것을 믿는다. 신앙은 우리를 죄와 죽음과 지옥에서부터 지키고 은총 가운데 인도하며 축복의 자리로 이끌어 준다. 이 신앙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생명과 축복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하여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던 금욕 생활이나 거룩한 시약(試藥) 등은 가증한 것뿐이다.
   8.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 혹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않거나 듣기 싫어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성령께서 신앙을 창조하시지 않으며 또는 신앙을 통하여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복음 즉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복음 즉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가 원하시는 사람 안에 또는 원하시는 곳에 신앙을 창조하신다.
   9. 세례는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성례이며 신앙을 돕는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고('It, baptisate', 마 28:19). 약속하신 것(Qui Crediderit', 막 16:16)이 세례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세례는 크리스천의 내용 없는 어떤 상징이나 표어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를 거듭날 수 있게 하며 또는 믿음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표지이며 역사이시다.
   10. 성령으로 창조를 받고 또한 우리를 의롭게 하는 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하시도록 만든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기도드리며 또한 모든 핍박을 감수할 수 있게 한다.
   11.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혹은 목사나 이웃ㅇ게 고백이나 의논한다는 것은 강제적이어서는 안되며 자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이와 같은 고백은 죄로 인하여 놀라움과 고통과 고민을 받으며 또한 과오를 저지른 심정을 위하여 도움이 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죄의 유일한 복음으로 받는 사죄의 위안이다.
   12. 우리는 정부나 국법이나 재판소나 규칙 제도 등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보며 일부의 로마 가톨릭 교도들이나 재세례파들이 가르치고 주장하는 것처럼 비난을 받아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크리스천들 가운데 생래로부터 혹은 부모 전래의 직업에 의하여 정부 기관의 공직에 있는 사람도 평범한 위치를 가진 일반 사람과 똑같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13.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에 반대되지 않는 한, 유전 또는 사람이 제정해 놓은 어떤 제도나 법칙을-영적이건 교회 법칙이건-그대로 지켜도 좋으며 지키지 아니하여도 가하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러한 중립적 성질의 인간 제도에 있어서는 형제들의 원하는 바에 맡겨 둘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불필요한 과오를 범하지 않아야 하며 질서를 유지해야 하 ㄹ것이다. 우리는 똔 성직자들의 결혼을 금하는 교리는 마귀의 교리라고 믿는다(딤전4:1~2).
   14. 성찬에 있어서는 맨 처음에 주님께서 제정하신데 따라 두 가진가 다(즉 떡과 찬) 사용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모두 믿는다. 미사는 죽은 자나 산자를 위하여 사죄를 받는 행사는 결코 아니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 몸과 참 피의 성례이다. 이 몸과 피의 영적 참여(參與, manducation)는 모든 크리스천에게 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성례의 용도에 관해서도 우리는 동의한다. 즉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과 같이 성찬도 전능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제정되었고, 약한 양심을 가진 자들을 성령이 신앙과 사랑 가운데로 옮긴다. 그리스도의 참 살과 피가 떡과 잔 가운데 실제로 현존하는지 안하는지의 문제에 관해서는 현재 우리들이 아직 의견을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양심이 허락하는 한, 크리스천의 사랑으로 상대편을 대하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참된 교리 가운데 우리들을 굳게 세워 주시기를 우리들 양편은 다 같이 진정으로 구하는 바이다. 아멘

이상의 14개조의 합의문에서는 양측을 대표하여 10명이 서명하였다. 1529년 회담은 결렬되어 루터와 쯔빙글리가 각각 입장을 달리하는 교파로 나누어진 것은 비록 이것이 로마 가톨릭이 오랜 세월동안 성만찬을 중요시해 왔던 전통화, 성경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아 진지하게 해석하려는 두 신학자들의 확고한 신념에서 빚어진 결과이기는 하나, 역사의 아픔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