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교회개혁을 위한 공개토론

쯔빙글리가 취리히에 도착함으로써 이곳에서의 개혁활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취리히는 6천여 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로서 무역과 제조업으로 번성하였으나 도덕적으로는 무질서한 도시였다. 쯔빙글리가 언제부터 교회의 개혁자로서 복음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토론의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 또 그가 루터의 개혁운동으로부터의 영향이나 영향의 정도에 대해서도 여전히 상이한 견해들이 있다. 쯔빙글리 자신은 “루터의 이름을 듣기도 전에 개혁운동을 시작하였다”고 자신의 독자성을 주장한 바 있으나 루터로부터의 직․간접 영향이 전무했다고는 볼 수 없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쯔빙글리에게 끼친 루터의 신학적 영향은 보잘것없었던 것으로 지적되었다.  
   일반적으로 1518년 쯔빙글리가 취리히에서 활동을 시작할 무렵 이미 루터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쯔빙글리가 복음적 신앙을 갖게 된 것은 루터와는 다른 측면이 있다. 루터는 오랜 개인적 번민과 복음적 진리에 대한 고뇌에 찬 여정을 거친 결과로 얻은 것이었지만, 쯔빙글리는 보다 실제적 현실적 교회상에 대한 반성의 결과였다. 즉 쯔빙글리는 인문주의자들의 방법론에 의한 성경연구와 함께, 당시 성행하던 종교적 미신에 대한 분노, 교회 성직자들의 부정과 부패 및 용병 제도에 대한 비판 정신의 결과였다.
   쯔빙글리는 1519년 1월부터 마태복음을 강해하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사도행전, 바울서신, 공동서신 순으로 설교하였다. 그는 강단에서 헬라어 성경을 본문으로 하여 직접 해설하는 강해설교를 실시하였다. 그의 이러한 설교는 기록된 원고를 낭독하는 당시 설교 관행과는 구별된 것이었다. 특히 그는 스위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독일어로 설교하였다. 그래서 쯔빙글리는 그의 뛰어난 설교로 존경을 받게 되었고 1519년부터 1526년 사이에는 신약성경 전권을 강해하였다. 그는 이런 목회활동을 통해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앙적 오류와 종교적  남용을 비판하였다.
   직접적으로 쯔빙글리는 교황청의 권력남용을 실감하였는데, 그것은 1521년 교황청의 용병파병 요청이었다. 당시 찰스 5세와 교전상태에 있었던 프랑스왕 프란소와 1세는 스위스에 파병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스위스의 모든 자치주들이 파병하였으나 취리히만은 이를 거부하였다. 프랑스와 동맹관계에 있던 교황은 취리히도 용병을 보내도록 거듭 강요하였다. 쯔빙글리는 이 사건을 통해 교황청의 권력남용의 문제를 실감하였고, 그의 설교를 통해 이를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용병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쯔빙글리의 지도력 하에서 취리히는 스위스 연방 안에서 점차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쯔빙글리에 의해 새로운 변화가 일고 있었다. 이 변화는 1522년을 경과해가면서 보다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즉 1522년 4월 아인시델른의 사제인 레오쥬드(Leo Jud)와 취리히교회 지도자들이 사순절(Lent)금식을 지키지 않고 소세지를 먹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에는 사순절 기간 동안 고기를 먹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취리히를 관장하던 콘스탄츠 주교는 이러한 부도덕(?)에 대해 항의하면서 이들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취리히시 의회는 이들을 투옥하였고 벌금형에 처하였다. 이때 쯔빙글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음식을 어느 때나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친다고 설교하고, 이를 금지하는 교황의 법령은 복음에 의해 선포된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또 그는 양심의 자유를 근거로 이들을 변호하는 글을 발표하였다(1522). 이 작품이 교회개혁을 위한 쯔빙글리의 첫 작품으로서 “음식의 선택과 자유에 관하여”(Concerning Freedom and Choice of Food)라는 글이다.
   쯔빙글리의 교회 비판은 그 범위를 넓혀 갔다. 성직자의 독신제도가 비성경적임을 비판하였고 1522년 7월에는 쯔빙글리와 10여명의 동료사제들이 취리히 의회와 콘스탄츠 주교에게 복음에 대한 자유로운 설교를 보장할 것과 성직자의 결혼허용을 정식으로 요청하였다. 청원은 거절되었지만 쯔빙글리는 안나 라인하르트(Anna Reinhart)와 비밀리 결혼하였고 1524년에는 그의 결혼이 공개되었다. 쯔빙글리와 안나 사이에는 8명의 자녀가 있었다.
   1522년 쯔빙글리는 ‘처음과 끝’이란 뜻의 “아르케델레스”(Archeteles)라는 제목의 또 한편의 글을 발표하였는데, 이 글은 교회개혁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책은 「하나님 말씀의 명확성과 확실성」(The Clarity and Certainty of God's Word)이란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쯔빙글리는 이 책을 통해 주교들로부터의 영적 해방을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직 성경만이 필요한 것이므로 교회나, 종교회의, 교황이 성경해석을 독점하는 것은 필요하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않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는 성경의 우위성, 곧 성경의 명료성과 확실성,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성경 중심사상은 모든 개혁자들의 공통된 사상이었다. 쯔빙글리는 루터의 라이프찌히 논쟁을 염두에 두고 이 문제를 공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토론하자고 요구하였고 시의회는 이 요청을 수락하였다. 이렇게 되어 교회개혁을 위한 공개적으로 토론하자고 요구하였고 시의회는 이 요청을 수락하였다. 이렇게 되어 교회개혁을 위한 공개토론이 개최된 것이다.

   취리히에서의 공개토론은 스위스 종교개혁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공개토론을 통하여 취리히 시민들은 무엇이 참된 종교이며 무엇이 그릇된 종교인가를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당시 교회적 관행의 문제점과 폐습, 신학적 오류들을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리해서 말하면 공개토론을 통하여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력남용과 사제주의의 병폐가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 시의회는 쯔빙글리의 복음주의의 지지하므로 교회개혁운동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제1차 토론(1523. 1. 29)
제1차 공개토론은 1523년1월 29일 개최되었다. 로마가톨릭교는 콘스탄츠주교를 대신하여 파베르 박사(Dr. Faber)와 사제들이 쯔빙글리의 논적으로 참가하였고, 쯔빙글리 쪽에서는 쯔빙글리와 그의 동료 바디안(Vadian), 세바스티안 메이어(Sebastian Meyer), 세바스티안 호프마이스터(Hofmeister)등이 참가하였다.
   이 토론회에서는 취리히시 인구의 약 10%인 600여명이 참가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쯔빙글리는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성경을 펴놓고 논쟁에 임하여 성경적 가르침을 천착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때 쯔빙글리는 교회개혁을 위한 자기 입장을 쉽게 요약, 정리한 「67개조」(Sixty-seven articles)룰 논쟁의 근거로 사용하였다. 「67개항」, 혹은 「67개조 신조」라고도 불리는 이 문서는 1522년 작성된 문서로서 루터의 95개항과 비교될 수 있다. 이 67개조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정리될 수 있는데, 첫 15개 조항에서는 성경적인 교리들(positive Christian doctrines)을 제시하는 부분으로서 ‘성경이 나의 기초다’는 쯔빙글리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고, 나머지 52개 조항에서는 로마가톨릭교 교리들을 비판했는데(objected to Roman catholic Doctrines) 이 부분에서는 개혁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다시 말해서 쯔빙글리는 이 문서에서 성경만이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칙이요, 그리스도는 유일한 중보자임을 주장하고 가톨릭교회의 미사제도, 교황제, 금식제도, 연옥설 등은 비성경적임을 지적하였다. 또 교황이 소유하고 있다는 대제사장적 직분, 기념이 아니라 희생(sacrifice)으로서의 미사, 성자들의 중보를 요청하는 기도, 의무적인 금식, 성지순례, 구도규칙, 성직자들의 독신제도, 파문의 오용, 면죄부 판매, 고행 및 연옥에 관한 교리, 사제(司祭)제도 등 교회 내에서 행해지던 각종 인위적 규칙들을 비판하였다.
   제 1차 토론에서 쯔빙글리는 자신이 작성한 67개조에서 주장한 내용들을 성경에 기초하여 변호하였다. 그러나 로마교회 대표들은 쯔빙글리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지 못함으로써 쯔빙글리는 승리하였고 취리히 의회는 쯔빙글리의 복음주의적인 설교를 인정하였다. 또 취리히의 모든 신부들에게 쯔빙글리의 가르침을 시행하며, 반드시 성경에 기초한 설교만 하도록 규제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취리히는 콘스탄츠교구와 결별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로마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제2차 토론(1523. 10. 26~29)
   1차 토론에서 승리한 쯔빙글리는 양측간에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음을 감지하고 미사 및 성상(聖像, images)문제를 취급하기 위한 2차 토론을 제안하였다. 그래서 제2차 공개토론은 1523년 10월 26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개최되었다. 이번에는 350명의 성직자와 10여명의 신학박사를 포함한 약 900명의 취리히 시민이 참가하였다.
   로마가톨릭 측에서는 마아틴 슈타인리(Martin Steinli of Schaffhausen)와 콘라드 슈미트(Conrad Schmid)가 대표로 파견되었다. 이 토론에서 쯔빙글리는 교회에서 사용되는 성상에 대하여(첫째날), 미사에 대하여(둘째날) 비판하였으나 가톨릭측 대표는 이를 옹호하였다.   이 토론의 결과 미사제도가 즉시로 폐지되지는 않았으나, 시의회는 성상을 더 이상 교회안에 가져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였다. 동시에 이미 있는 성상들은 철거하지 않도록 허용하였다.     2차 토론의 결과 쯔빙글리 편에서 볼 때 만족스런 결과는 아니었으나, 취리히 시의회가 개혁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단지 개혁이 보다 신중하게 진행되기를 원하고 있었을 뿐이다.
   2차 토론이 끝난 후 쯔빙글리는 「요약기독교개론」(A Brief Christian Introduction)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1523년). 이 책은 특히 성상 사용에 대한 비판서로서 취리히의 성직자들을 깨우치기 위한 의도로 쓴 작품이다. 혹자는 이 책이 급진적인 교회개혁안을 담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1523년 12월에 쯔빙글리는 미사 대신에 루터파가 시행하는 성찬식을 도입하려고 하였는데, 시의회는 주저하며 중지를 명한 일이 있었다. 아직도 교회개혁의 길은 더 많은 인내를 요구하고 있었다.

제3차 토론
제3차 토론은 1524년 1월 19일과 20일 양일간 개최되었다. 이 논쟁에는 모두 14명이 참가하였는데 시의회를 대표하여 6명, 5명의 성당 참사회 의원, 그리고 엥겔하트(Engelhard), 레오쥬드(Leo Jud), 쯔빙글리 등 개혁을 주장하는 복음주의 대표들이었다. 이 토론에서 로마가톨릭 대표인 루돌프 호프만(Rudolf Hoffmann)은 성상과 성상제도에 대해 장시간동안 옹호하는 주장을 폈으나 그가 제시한 23개 항목은 거의 모두가 교회의 전통, 교부들, 중세 스콜라 학자들의 문서, 교회회의의 훈령, 교회법 등 성경 밖의 자료들에서 취한 것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성상제도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는데 실패하였다. 따라서 시의회는 이전보다 더 쉽게 쯔빙글리의 성상폐지론을 따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토론의 결과 미사제도는 여전히 인정되었으나, 성상은 폐지되었다. 미사에 대한 토론은 가장 격렬한 토론의 주제였는데 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다.
   제 3차 토론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개혁이 통치자들(취리히시 의회)에 의해 미진하게 진행되자 쯔빙글리와 함께 개혁을 주장하던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만족스럽게 이해되었다. 즉 콘라드 그레벨(Conrad Girebel, 1418~1526), 펠릭스 만츠(Felix Manz, 1498~1527) 등은 보다 철저하고 과격한 개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교회개혁에 있어 통치자의 역할을 인정하여 통치자를 통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견해차 때문에 콘라드 그레벨, 펠릭스 만츠 등은 쯔빙글리와 결별하였고 보다 과격한 개혁운동을 전개해 갔는데, 이것이 바로 재세례파(Anabaptist)운동이다. 이들은 특히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성인이 된 후 신자의 세례(belivers' baptism)를 통한 자유교회 설립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보통 재세례파라고 불린다.
   제 3차 토론이 있은 후 5개월이 지난 1524년 6월 15일 시의회는 최후의 결단을 내려서 교회당에서의 모든 성상을 제거하도록 명하였다. 이듬해인 1525년 1월에는 시의회의 과반수의 인사들이 쯔빙글리를 지지함으로써 스위스에서의 개혁운동이 크게 진전되었다. 그해 4월 16일 취리히에서는 개혁교회 역사상 최초로 복음적인 성찬예식이 거행되었다. 즉 성찬식이 최후의 만찬에 대한 기념으로서, 그리고 영적 교제의 의미로 거행되었고, 또 오랫동안 평신도에게 분배되지 않던 포도주를 떡과 함께 분배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최초로 개혁교회 성찬예식이 거행되었다.

   이 해에 쯔빙글리는 많은 책들을 저술하였다. 「세례에 관하여」(On Baptism), 「재세례와 유아세례에 관하여"(On Rebaptism and Infant Baptism, 1525, 4월) 「세례에 관한 휴프마이어의 소책자에 답하여」(Answer to Hubmaier's Booklet on Baptism, 11월) 등이 그것이다.
   특히 1525년 3월에 출판된 「참된 종교와 거짓된 종교에 관한 주석」(Commentary on the True and False Religion)은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책은 프랑스 국왕 프란소와 1세에게 헌정된 책으로서 특히 기념(記念)과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성찬식을 통해 신자들은 오직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에게 나아간다는 자기의 성찬관을 명료하게 서술하였다. 쯔빙글리는 위의 책에서 참된 성경의 종교와 미신 또는 전통과 이성에 근거한 거짓 종교를 구분하였다. 앞서 지적하였지만 쯔빙글리는 에라스무스적 인문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것은 그의 생애와 저술 속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 신학의 모든 기본원리는 ‘원천’(the very fountains) 그 자체인 성경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상은 근원으로부터(ad fontes)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인문주의적 형식과 맥을 함께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