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농민전쟁 이후의 발전

이제 1526년 이후의 루터파의 발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농민전쟁이 끝난 후 교회문제는 정치화되었고 제국회의에서 종교문제와 교회개혁의 문제는 새롭게 토의되기에 이르렀다.    이미 1521년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루터를 정죄하는 칙령을 발표했으나 시행되지 못했고 1523년 뉘른베르크(Nürnberg)에서 다시 제국회의가 소집되었을 때도 보름스칙령의 수행 요구는 묵살되었다. 이때 교황과 황제가 보낸 대표들이 보름스칙령을 따라 루터의 개혁운동을 제제하려고 했으나 도리어 루터파에 대한 융화 정책을 결의하였다. 당시의 정치적 배경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유리하게 인도해 가고 있었다.

1526년에는 슈파이에르 제국회의(the Diet at Speyer)가 소집되었다. 다시 황제 찰스 5세는 프랑스의 프란소 1세(Francis I)와 대결하고 있었다. 사실 찰스 5세와 프란소 1세와의 대결은 전후 40년간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르는 숙명적 적수였다. 이와 같은 정치적 상황과 더불어 황제는 오토만 터어키의 습격으로 인한 위협 중에 있었기 때문에 이 회의에서도 루터파를 탄압할 여력을 지니지 못했다.
   당시 유럽의 제국은 종교적인 문제로 양분되어 있었다. 즉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는 제후들은 1524년 7월 ‘라티스본 동맹’(Ratisbon League)을 결성하여 루터파의 확산을 저지하려고 하였고, 이에 맞서 루터파를 지지하는 헷세의 필립, 삭소니의 선제후 요한 등은 1526년 6월 ‘토르가우 동맹’(League of Trogau)을 체결하여 루터파를 보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터어키의 위협 앞에서 양측은 타협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526년의 슈파이에르 국회는 타협적 회의가 되었고 루터파의 확장에 유리한 결정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비록  1555년 ‘아우구스브르크 평화협정’(the Peace of Augusburg)에서 확정됐지만 ‘그 땅이 속한 자에게 종교도 속한다' (cujus regio, ejus religio). 곧 ‘그 지역의 종교는 그 지역 통치자의 종교로’ 하는 지역별 종교선택의 자유의 원칙이 확립된 것이다.
   이제 이 원칙에 따라 독일의 여러 지역들은 그 지역을 통치하는 제후의 종교에 따라 가톨릭 혹은 루터교도가 되도록 한 것이다. 만일 어떤 지역 제후가 루터교도이면 그 지역민들은 루터교 신자가 되어야 하고, 반대로 제후가 가톨릭교도이면 그 지역 백성들은 가톨릭교도로 남아 있어야 했다. 이것은 루터파가 로마 가톨릭과 동등한 법적권한을 갖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 원칙에 따라 오스트리아와 독일남부 지방의 영주들은 로마 가톨릭을 선택하였고 다른 지방에서는 루터파의 교회개혁을 받아들였다. 이제 루터파는 공식적으로 그 지역을 확대해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원칙은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고 민주주의 발전에도 기여하였으나 ‘종교 복수주의’(pluralism), 곧 한 지역에서 신앙고백을 달리하는 다원(多元)적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재세례파 교회는 여전히 박해를 받았고 루터파 외의 개신교파들은 아직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렇게 볼 때 유럽에서 종교와 신앙의 완전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1648년의 베스트팔리아(Westphalia)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리해서 말하면 황제 찰스 5세가 프랑스의 프란소와 1세, 교황 클레멘트 7세와 대립하고 있을 때 황제는 루터파의 지지가 필요하였고, 이런 정치적 이유 때문에 슈파이에르국회는 보름스칙령을 철회하고 독일 영주들의 종교적 선택권을 인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어떻든 1526년 슈파이에르 국회의 결정은 루터파의 확산에 매우 유리한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3년 뒤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불화 관계에 있던 황제와 교황은 화해를 한 뒤였고 황제 찰스 5세와 프랑스와 프란소와 1세도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 때문에 제2차 슈파이에르 국회에서는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한 브롬스칙령을 재확인 하였고 1526년의 슈파이에르 국회의 결정사항을 번복하는 결의를 하였다. 이것은 루터파에 대한 황제와 로마 가톨릭측의 일대 반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제 상황은 달라졌고 루터파와 로마 가톨릭 지지 세력간의 일시적 휴전은 대결의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이렇게 되자 개혁을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은 1526년 제 1차 슈파이에르 제국회의에서 부여받은 자유를 위반하는 1529년의 제2차 슈파이에르 국회의 결정에 대해 항의, 곧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용어가 사용되게 되었고 또 항의 문서를 제출하였다. 루터의 개혁운동을 지지했던 복음주의자들은 작센의 요한, 헤세의 필립, 프란덴부르크와 안스바하(Ansbach)의 게오르크, 브른비스크와 루네부르크의 에른스트 그리고 안할트(Anhalt)의 볼프강 등 5명의 군주들과 독일 고지대의 14개 도시들(스트라스브르크, 뉘른베르크, 울름, 콘스탄츠, 린다우, 메밍겐 등)의 대표자들이었다. 이들이 연합하여 황제와 로마 가톨릭 지지자들에게 항거했으나 이들의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바로 여기서 항의자들, 곧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란 용어가 사용되게 되었다. 이날이 1529년 4월 19일이었다. 1529년 이후에는 개혁신앙을 소개할 수도 없고 영원히 로마 가톨릭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결정에 '항의한 자들'이라는 뜻의 프로테스탄트란 용어는 이때부터 신교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이 때는 보름스제국의회 이후 개혁운동의 가장 위험한 시기였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들의 연합과 협력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6. 성만찬 논쟁

   루터의 지지자였던 헤세의 필립(Philip of Hesse)은 우선 비텐베르크와 독일 고지대 사이에 존재하는 교리적 차이를 해소하려고 힘썼고, 더 나아가서는 스위스의 개혁운동까지 포함하는 연합적인 동맹을 결성함으로써 이 난국을 타개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당시 루터와 쯔빙글리간에는 성찬론에 관한 견해차가 분명하였다. 이 차이만 해소될 수 있다면 독일과 스위스 지역의 개혁운동이 연합할 수 있고, 연합된 힘으로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독일과 스위스 지역의 프로테스탄트들의 연합은 긴박한 요구였다. 독일과 스위스에서의 종교개혁운동은 근본적인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었으나 실제에 있어서 몇 가지 차이점이 노정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첨예한 의견의 차이를 보인 것은 성찬에 관한 견해였고, 이 견해차는 루터와 쯔빙글리간의 현격한 이견(異見)을 나타내고 있었다.
   문제의 핵심은 마태복음 26장 26절의 성찬식사(Words of Institution, 聖餐式辭)인 “이것은 내 몸이다”(Hoc est corpus meum)는 말씀에 대한 해석 문제였다. 루터나 쯔빙글리 양자가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化體說, transubstatiation)에 대해서는 반대, 비판하였으나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상의 떡과 포도주에 임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루터는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할 때 이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성찬의 떡과 포도즙과 함께(with), 그 안에(in), 그 아래에(under) 그리스도께서 임재한다고 보았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편재설에 근거하여 실재론적 견지에서 자신의 실재임재(physical presence)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반면에 쯔윙글리는 화란인 호엔(Hoen)의 영향을 받아 “이것은 내 몸이다”라고 할 때 ‘이다’(est)는 실제로는 ‘의미한다’(significat)라는 뜻으로 보았다. 즉 그는 “이것은 내 몸이다”는 말씀은 “이것은 내 몸을 상징한다.”는 뜻으로 보았다. 따라서 쯔빙글리에 있어서 성찬의 떡은 갈보리에서 단번에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쯔빙글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포도주의 요소 속에 ‘육체로' 임재하신다는 루터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드디어 쯔빙글리는 성찬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상이한 두 사람의 견해를 해소하고 하나의 연합을 이루어 보기 위해 헤세의 필립공은 1529년 10월 양측의 인사들을 독일의 마부르크로 초청하였다.
   그래서 그해 10월 1일부터 3일까지 계속된 이 회담을 마부르크 회담(Marburg Colloguy)이라고 부른다. 이 회담에 루터측에서는 루터 자신과 멜란히톤(Philip Melanchthon), 요나스(Justus Jonas), 오시안데르(Andreas Osiander), 브렌티우스(Johannes Brentius), 아그리콜라(Stephanus Agricola)등이 참석하였고 스위스 신학자들로는 쯔윙글리, 외콜람파디우스(Johannes Oecolampadius, 1482-1531), 마틴 부쪄(Martin Bucer, 1491-1551), 헤디오(Caspar Hedio, 1494-1553) 등이 참석하였다.
   이들은 3일간 대화와 토론을 전개했으나 견해차를 해소할 수 없었다. 특히 부쪄의 계속된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견해를 양보하지 않았다. 쯔빙글리는 “이것은 내 몸이다”는 “이것은 내 몸을 상징한다”(This signifies my body)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성만찬은 ‘기념 식사’(a memorial meal)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들 간의 상이한 견해 때문에 결국 루터와 쯔윙글리 양측은 결별할 수밖에 없었고 해세의 필립이 의도했던 로마 가톨릭 세력에 대항한 개신교 동맹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성찬론에 대한 신학적 차이점 때문에 후일 루터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루터파(Lutheran)를 형성하게 되었고, 쯔빙글리와 칼빈 등 스위스에서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개혁파(Reformed)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만일 루터와 쯔빙글리가 성찬론에 관한 신학적 일치를 견지할 수 있었다면 루터파와 개혁파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복음적인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형성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앞서 살펴본 바처럼 루터의 견해에는 다소 신비적인 요소가 있다. 그는 비록 가톨릭의 주장인 화체설, 곧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그 살과 피로 변화된다는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그리스도께서 성찬에 실제로 임재하시고 성례적으로 신비스럽게 연합하신다는 주장은 다소 신비주의적이다. 이점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과거 루터가 신비주의 단체였던 공동생활 형제단에서 받은 교육의 영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성찬론에 대한 견해차 때문에 루터와 쯔빙글리가 연합하지 못하고 각기 입장을 달리하는 루터파와 개혁파로 나뉘어졌다고 할 때 오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성만찬관은 그 당시로는 심각한 문제였다. 성만찬을 중시해 왔던 로마 가톨릭의 오랜 전통과 성경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는데서 온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성찬론에 대한 루터의 융통성 없는 고집스러운 주장에 대해 “가톨릭의 오도된 성찬론을 개혁하려는 열정과 성찬론과 같은 중대한 교리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한 결과였다”는 변명은 어느 정도 진실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