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교회개혁과 농민전쟁

교회개혁운동은 단순히 교회내적 개혁운동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계층의 사회적 요구가 분출되고 있었다. 당시 독일사회에서 불만 계층으로는 기사계급(Knights)과 노동자들(the working people) 그리고 농민들(the peasants)이었다. 이들은 사회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제후들과 중산층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따라서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집단이 농민들이었고 이들의 생존투쟁이 농민전쟁(1524-1525)이다.
   농민전쟁이 있기 이전에 ‘기사들의 항거’가 있었다. 즉 인문주의자였던 훗텐(Ulrich von Hutten)과 지킹겐(Sickingen)을 지도자로 하여 트리에르(Trier) 대주교의 영지를 공격했으나 이들은 실패하였고 지킹겐은 1523년 4월 살해되었다. 훗텐은 스위스로 도피했으나 그도 그해에 세상을 떠났다. ‘기사들의 항거’보다 더욱 거센 사회적 요구가 농민들의 전쟁을 통해 분출되었다.
   독일에 있어서 농민전쟁은 이때 갑자기 일어난 운동은 아니다. 이미 100여년전부터 계속되어 왔던 농민들의 불만이 농축된 대규모 민중봉기였고, “독일 역사상 최대의 정치적, 사회적 집단운동”(W. J. Fuchs)으로 발전하였다. 농민전쟁 배후에는 중세기 봉건제도 밑에서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신음하던 일반농민들의 원한과 불만이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더욱이 독일 남부의 농민들에게는 더욱 심각했다. 농민들은 노동하는 짐승과 같았고 중과세에 짓눌려 있었으며 혁명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524년 6월 지방영주들에 대한 작은 반란을 계기로 일어난 농민전쟁은 1525년 2월에는 독일의 서부, 남부지역으로 확대되었고 역사상 보기 드문 대규모의 농민전쟁(Bauernkrieg)으로 발전되었다. 그해 2월 27일부터 3월 1일 사이에는 쉬바비아(Swabia) 농민들에 의해 12개조(Zwlf Artickel)의 요구조건이 제시되었는데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주고 있다. 이 12개 조항은 재세례파 인물인 휴프마이에르(Balthasar Hubmaier)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었는데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조 개 교회의 목사 청빙권은 개 교회 교구민에게 주어져야 한다.
   2조 곡물의 10분의 1세는 바쳐야 될 것이지만 각종의 세금제도(십일조)는 폐지되어야 한다.
   3조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자유를 전제하고 있으므로 농노는 폐지되어야 한다.
   4조 사냥과 고기잡이는 허용되어야 한다.
   5조 산림(山林)은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6조 강제 노동은 제한되어야 한다.
   7조 농민들에 대한 과중한 부역은 피해야 하며 농민들을 부역에 동원할 시는 농민들의
        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한다.
   8조 집세 혹은 토지세는 공정해야 하고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9조 재판은 성문법에 의거해야 하며 사형(死刑)은 폐지되어야 한다.
   10조 불의하게 점유한 토지는 반환되어야 한다.
   11조 유산을 물려받을 과부나 고아가 사망했을 경우 저들의 유산을 사망세(death due)란
          이름으로 빼앗아 가서는 안 된다.
   12조 이상의 조항중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내용이 있으면 즉시 철회될 것이다.
  
농민전쟁의 배후에는 루터의 만인 사제직론(Priesthood of believers)과 기독자의 자유가 곡해된 것이 사실이고 이들 농부들은 루터의 복음주의적 설교와 교황청에 대한 비판이 자기들의 혁명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루터를 환영하는 편이었다.
   물론 이들이 루터의 복음주의 신학을 정당하게 깨달았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루터의 개혁운동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고 보았으며 저들의 12개에 서명해 주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루터는 서명을 거부하고 「평화에로의 권면: 슈바비아의 농민들이 채택한 12조항에 대한 대답」(An Admonition to Peace; A Reply to the Twelve Articles of the Peasants in Swabia, 1525. 4)이라는 권고문을 발했다. 이 글은 루터가 1520년에 쓴 「독일귀족에게 보내는 편지」 및 기사들의 반란에 자극을 받고 쓴 작품인 「국가권력에 관하여」(On the Temporal Authority)와 더불어 루터의 국가관을 반영하고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루터는 이 권고문에서 교회 영주들의 학정을 비난하고 동시에 농민들의 정당한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강력히 촉구하였다.
   이 글의 전반부는 농민혁명의 책임이 우선 국가에게 있는 점을 들어 제후들을 비판한다. 루터는 제후들이 복음을 모독하였고 농민들을 착취했다고 비판했다. 나아가서 그는 농민들의 봉기와 뮌쩌같은 혁명적 개혁자의 등장은 제후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보았다. 루터는 결코 자기의 신학이 농민전쟁의 원인이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했고 제후들에게 폭군노릇을 버리고 농민들을 잘 다스릴 것을 권고하고 있다.
   후반부에서 그는 농민들을 향하여 주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로마서 13장에 기초하여 국가 혹은 세속권력은 하나님이 그의 섭리를 위해서 제정하신 신적 기관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국가권력에 대한 항거는 곧 하나님의 권위에 항거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루터는 통치자가 아무리 악해도 이것이 혁명을 일으킬 원인이 될 수 없다는 보수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이것은 결국 국가자체가 하나님의 칼을 들었으니 지배자 계급의 악행은 이 국가의 칼에 의해서 처단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따라서 루터는 하나님이 주신 이 세속통치권을 박탈하려는 농민들도 강도요, 농민들을 수탈하고 착취하는 국가의 관료들도 강도라고 하였다. 끝으로 루터는 개혁이란 혁명이 아니라 설교된 말씀의 능력에 힘입은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농민전쟁은 복음의 진수와 너무 거리가 멀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렇게 되자 결국 농민들은 뮌쩌(Thomas Müntzer)와 같은 과격주의 개혁자를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뮌쩌는 농민전쟁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는 종말론적 희망 속에서 인간의 평등과 재산의 공유와 균등한 분배를 역설하였고 이 목적을 위해서는 폭력의 사용을 정당한 것으로 보았다. 결국 그의 신학적인 개혁의 의지는 사회혁명적 의지로 전환되고 있었다. 그는 슈바벤(Schwaben) 튀링겐(Thueringen) 뭘하우젠(Mühlhausen)등 여러 도시를 왕래하며 농민들의 단합과 결속을 호소하였다. 그리고 옛 선동지역인 튀링겐과 만스펠트(Mansfeld)로 돌아와서 혁명군을 조직하고 그 선두에 서기도 했다.
   루터의 평화에의 권고가 있었으나 농민들의 분노의 행동은 그치지 않고 삭소니지방까지 파급되어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지 루터의 태도는 돌변하였다. 그는 농민들을 신랄히 비판하고 1525년 5월에 「강도와 살인을 일삼는 농민에 반대하여」(Against the Robbing and Murdering Hordes of Peasants)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루터는 제후들의 학정을 비판하면서도 악을 제거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정치질서를 파괴하는 폭동은 용납할 수 없다며 칼로서 폭도(농민)들을 진압할 것을 촉구하였다. 어떤 조직이나 기초적 훈련 없이 싸웠던 농민들의 봉기는 도처에서 영주군에 의해 숙명적으로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1525년 5월 15일 프랑켄하우젠(Frankenhausen)에서는 1만 명에 달하는 농민들의 무리들이 헷세(Hesse), 작센(Saxony) 및 부룬스빅(Brunswick)의 연합군(국가측)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이때에 5천명 정도가 들판과 거리에서 죽었고, 300명은 법정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반란의 도시 뮐하우젠은 1525년 5월 19일에 함락되었다. 이렇게 농민전쟁에 희생된 사람은 10만명에 달했다.
   전투가 막바지에 달했을 때 농민운동의 지도자였던 뮌쩌는 어떤 집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숨어 있다가 체포되었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사기가 빠진 뮌쩌는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는 문서에 서명하고 1525년 5월 27일 처형되었다.
   농민전쟁은 루터에게 많은 손실과 오해를 안겨 주었다. 농민전쟁에 대한 루터의 소극적인 태도와 농민들에 대한 탄압에의 권고는 많은 지지 세력을 상실했다. 상당수의 지지자들이 제세례파로 떨어져 나갔고 급진주의자들로부터는 소극적이며 세속적 국가권위 의존하는 개혁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루터의 국가관, 혹은 ‘두 왕국설’이 세상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약화시켰고, 그의 복음주의 신학이 세계와 역사에 대한 정당한 관심을 소홀히 했다는 점에서 농민들이 흘린 피에 대해 루터는 무관할 수 없다.
   농민반란이 거의 종결되던 1525년 6월 13일 루터는 케더린 본 보라(Katharine von Bora)라는 여자와 결혼하였다. 가톨릭의 수녀였던 그녀는 25세의 나이로 루터보다 16년 연하였다. 루터의 결혼은 당시 많은 사람의 비난거리가 되기도 했다. 에라스므스는 “비극으로 시작된 개혁운동이 희극으로 끝났다.”고 까지 했고 가톨릭의 비난은 이보다 더욱 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이제 미혼으로 남아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신부들의 결혼은 이미 1521년부터 감행(?)되었고 수녀들은 수도원을 떠나 여성으로서의 길을 갔던 것이다.
   루터는 1526년 6월 7일 첫 아들을 얻은 후 5남매를 두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농민전쟁은 루터의 개혁운동사에 있어서 일대의 전환점이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농민이 중심이 된 하층민의 민중운동으로서의 개혁의 요구는 크게 압박되었고 루터 개인으로는 대중적 지지 기반의 많은 부분을 상실하였다. 루터에게 실망한 다수의 농민들은 재세례파로 넘어갔고 일부는 다시 천주교로 복귀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농민전쟁의 영향으로 루터의 교회관은 1526년을 전후하여 국가교회(Volkskirche)에로 변화되었다는 점이다. 농민들의 투쟁을 종식시키기 휘한 루터와 지방 영주들과의 동맹은 결국 프로테스탄트적 영방교회(領邦敎會 Landes Kirchen, territorial churches)를 형성하게 했는데, 이것은 영적 교회(ecclesia spiritualis)의 약화와 함께 제도적인 국가 교회에로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비록 국가의 제후들이나 관료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할지라도 국가와 교회는 법적으로 상호 유기적인 관계성과 통일성을 갖는다는 국가교회관은 이미 1515년에서 1546년 사이의 루터의 「로마서 강의」에서 암시된 ‘두 왕국설’에 기초하고 있고, 또 세상나라를 낙관적으로 보았던 그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이와 같은 루터의 견해는 교회와 국가는 법적으로 독립 내지는 병립하는 것이라고 보는 개혁파 교회들과 다른 개신교 교회들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하였다. 이렇게 볼 때 농민전쟁 이전의 루터의 교회관이 보다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