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루터와 독일에서의 개혁운동

비록 루터는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세계사적 변혁을 의도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이 개혁운동은 1517년 루터의 ‘95개조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루터는 이때로부터 거의 30여 년 간 이 개혁운동의 주도적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교회개혁사에 관한 산책을 독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1. 개혁자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아이스레벤(Eisleben)이란 곳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다음날, 곧 성 마르틴(St. Martin)일 피터교회(Peter's Church)에서 영세를 받게 되었으므로 그의 이름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루터의 가족은 1484년 봄 만스펠트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루터의 학교교육이 시작되었다. 루터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만스펠트(Mansfeld, 1488~), 마그데부르크(Magdeburg, 1497~), 그리고 아이제나흐(Eisenach, 1498~)등 세 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이 세 지역에서 루터에게 중세교회의 경건과 함께 라틴어 등 기본교육을 받았다. 루터가 14살 되던 해인 1497년 그의 사촌형과 함께 마그데부르크로 옮겨갔는데 비록 그는 이곳에서 1년간 체류하며 교육을 받았지만 이른바 ‘공동생활 형제단’(Brueder vom gemeinsamen Leben)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01년 5월에 루터는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에 입학하였다. 이 대학은 1392년에 설립된 명문대학으로 특히 문과와 법과, 그리고 신학부는 독일에서도 명성을 얻고 있었다. 당시 이 대학은 유명론 철학(Occamism, 곧 Via Moderna)으로 유명했는데 루터는 이 대학에서 옥캄의 후예인 비엘(G. Biel)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이 시기 루터의 지성은 유명론 철학에 의해 형성되었다. 1502년에는 이 대학으로부터 학사학위를 받았는데 당시 57명중 13등으로 졸업했다고 한다(그러나 루이스 스피츠는 42명중 30등이었다고 쓰고 있다). 3년 뒤인 1505년에는 문학석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때는 17명중 제2위의 성적이었다고 한다. 문학석사 과정을 마친 루터는 그해 5월 아버지의 소원을 따라 에르푸르트대학에서 법률공부를 시작했으나 그리 만족스러운 연구가 되지 못했다.
   1505년 7월 2일 에르푸르트 근방 스토턴하임(Stotternheim)이라는 곳에서 한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한 루터는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이때로부터 이 주일 후인 7월 17일 어거스틴파 수도원에 입단했다. 루터가 법률공부를 포기한 것은 죄의식 때문이었고,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것은 죄의식과 더불어 죽음의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수도원에서 루터는 짧은 견습의 과정을 마치고 1506년 수도(修道)의 맹세를 했고, 그 이듬해 곧 1507년 2월 27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때에 루터 자신이 읽었던 서약문은 가톨릭교회의 예배의식, 교리, 교회의 제 규정에 관한 것으로서 루터 자신도 “이 서약문에 너무도 감동된 나머지 가슴이 벅차올랐다.”고 술회했다. 가톨릭교회를 위해 전 생애를 바쳐 헌신하기로 서약하고 신부가 되었으나 후일 이 교회를 사악한 교회로 규정하고 교회개혁의 봉화를 들게 된 것은  그의 생의 커다란 전환이었다.
   수도원에서 루터의 생활은 신학수업의 시작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교리사, 교회사, 그리고 조직신학 공부에 몰두하였고, 이때에 주로 탐독했던 책은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 1100~1160)의 센텐치아(Sentencia)와 아퀴나스의 제자로 유명한 학자였던 에기디우스 로마누스(Aegidius Romanus)의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에 관한 연구서 그리고 비엘(G.Biel)의 신학서적들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이지만 루터는 비엘을 통해 옥캄의 유명론 철학을 배웠는데, 비엘과 옥캄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주권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구원을 위한 인간의 능력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들은 신비로운 하나님의 영역을 탐구할 때 인간이성의 제한성을 강조하면서 교리문제에 있어서는 교회의 권위를 중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최선을 다하는 인간에게는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은 조건적인 공로를 얻게 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예비적 은혜(prevenient grace)에 힘입어 거룩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하였다. 정리해서 말하면 성화된 생활과 선한 행위, 즉 온전한 공로에 기초하여 인간은 구원을 얻기에 합당한 존재가 된다는 이론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이 이론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수도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고해성사를 드려도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번민할 때 그에게 영적 안내자의 역할을 감당한 사람이 수도원 원장이자 비텐베르크대학 교수였던 스타우피츠(J. Staupitz)였다. 후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스타우피츠는 루터의 이런 번민의 날들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었다. 스타우피츠는 루터를 뛰어난 지력과 종교적 열심을 갖춘 유능한 청년으로 인정하고 비텐베르크대학에 교수가 되도록 선제후 프레데릭에게 천거하였다. 비텐베르크대학은 1502년 설립된 신설 대학으로 당시는 소규모의 대학이었다. 루터는 1508년부터 이 대학 강단에 서게 된 것이다. 1508년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강의를 시작으로 하여 1509년 3월 신학사(Baccalaureus Biblicus)학위를 수여받은 후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센텐치아」 등을 강의하였고 1509년에서 1511년 사이 에르푸르트에 잠시 거주한 일 외에 루터는 그의 대부분의 생애를 비텐베르크에서 보냈다.
   1512년 10월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신학박사(Dokter der Theologie)학위를 받았다.  또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Licentia Magistralis)을 얻은 후 정식으로 비텐베르크대학 교수가 되었다. 이제 루터는 성경을 교수할 수 있는 자유와 의무를 지니게 되었고 이때로부터 루터의 대부분의 강의는 성경신학 분야였다.
   루터는 대학 동쪽에 위치한 어거스틴파 수도원의 작은 연구실에서 연구와 숙식을 하였는데, 이 작은 공간은 루터의 생애를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시대의 역사를 이끌어간 개혁의 선구자로 인도해 갔던 교회개혁의 진원지가 되었다. 루터는 이곳에서 구원에 관한 심각한 고민과 갈등을 경험하였고, 이 고민을 성경연구를 통해 복음적 진리, 곧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진리를 깨닫는 소위 ‘탑 속의 경험’(Turmerlebnis)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루터가 언제 오랜 이 번민과 갈등의 터널을 통과하고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인 복음적 구원관을 터득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이견(異見)이 상존하고 있다. 그렇지만 1515년에서 1516년 사이에 저술한 「로마서 강의」에 보면 1519년에 쓴 「갈라디아서 강의」와 완전히 일치하는 복음주의 신학을 펼치고 있는데 이것을 보면 루터의 ‘탑 속의 경험’은 1515년까지 소급할 수 있을 것이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로서 처음에는 시편을 강의하였고(1513~1515), 1515년에서 1516년에는 로마서를 강의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강의를 위한 연구를 통해 복음에 대한 근본적인 자각과 통찰력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상식적인 이야기가 되었지만 루터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전환점은 로마서 1장 17절을 주해하면서 일어났다. 이제까지 루터는 ‘하나님의 의(義)’를 능동적이고 보복적이며, 인간들에게 모든 율법을 다 지키도록 하는 본질적인 의(essential righteousness)로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의’가 수동적인 의로움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값없이 주시는 ‘덧입는 의’(imputed grace)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깨달음은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고 루터의 사상적 우산 아래 있었던 사람들에게 있어서 혁명적 진실이었다. 루터는 후일 이 새로운 발견의 때를 회상하면서 "…나는 이러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을 때 마치 새롭게 태어난 것과 같은 감격을 체험하였으며 천국으로 향하는 문이 활짝 열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라고 하였다. 루터는 1516~1517년에는 갈라디아서를, 1517~1518년에는 히브리서를, 1519년에는 다시 시편을 강의하였다. 이제 루터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명확한 논리로 그의 신학을 전개하였는데 이 새로운 진리의 발견은 수많은 학생들과 동료들을 매료시키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1516년 루터는 시편 강해와 로마서 주석을 끝냈는데 이때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들의 성경연구와 어거스틴 연구는 대학 전체의 관심사였으며 하나님 곧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계속 전개되어 갔다. 이제 스콜라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러서야 할 때가 되었다"고 했는데 정말 이때는 가까이 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