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지구와 종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 3:12~13)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의 날에 현재의 세상(지구)은 완전히 소멸되고, 또한 신자들은 이 썩어 망할 세상 저 바깥의 하늘로 데려감을 받는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재림의 날에 밭에 일하던 두 사람과 맷돌을 갈고 있던 두 여인 중에 각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다(마 24:36~41, 눅17:26~37). 이 사실과 관련하여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우리는 피조 세계 밖으로 “데려감”을 받는 자는 바로 구원받은 신자라고 생각하였으며, 세대주의자들은 그 “데려감”을 성도의 ‘휴거’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문의 전후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데려감”을 당하는 자는 신자가 아니라 심판을 받아 노아 홍수에 휩쓸려 가버린 불신자들 또는 최후 심판 후에 “주검이 있는 곳”(게헨나)으로 끌려 갈 불신자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24:39에 홍수가 나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을 때 불순종하던 불신자들을 다 멸하였다(휩쓸어 가버렸다. took them all away)고 하였다. 이 홍수 사건과 대비하여 재림의 날 인자가 임하였을 때도 “…이와 같으리라” 하고는 그 때까지도 불순종하는 불신자들을 말한다. 그래서 44절에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였다. 즉 인자가 임하였을 때 최후심판이 행하여지므로 불신자는 게헨나에 데려감을 당할 것이며, 신자는 “새 하늘과 새 땅땅”에 여전히 남아 왕 노릇할 것이다.

 

최후심판 때에 예수님이 성도들과 영광 중에 ‘공중’(헬:haera) 즉 “대기권”으로부터 “함께”오시는 그 사이에 지상에는 대화염 속에 정화(벧후 3:7,11,12)되고 그 후에 땅의 영화로운 갱신(벧후 3:13,계 21:1~5), 즉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이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라는 것은 급작스러운 갱신에 대한 시적 표현이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하늘로부터 “새 예루살렘”(계21:2)이 내려온다고 하였다. 최후 심판의 장소(계 20:9,11)는 지상이고 땅과 하늘은 흰 보좌 앞의 땅과 하늘을 말한다. 그리고 최후 심판의 시기는 재림과 죽은 자와 산 자의 부활 후(살후 1:7~10, 계20:9~14)에 예수님이 지상에 임하여 흰 보좌 앞에 몰려 온 모든 인간들을 심판하실 때이다. 바로 이 때에 악인은 심판을 받아 “게헨나”로 데려감을 당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심판 후의 상태를 묘사할 때 ‘떠나가다’(away from, 살후 1:9, 마 7:23, 25:41, 눅13:27)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보아도 그렇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악인은 하나님과 어린양이 계신 곳(새 하늘과 새 땅에)에서 영원히 게헨나로 데려감을 당하는 것이다. 물론 세대주의자는 휴거 때에 공중으로 데려감을 당함으로 7년의 지상환난을 피하여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들어간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성경적 지지를 받을 수 없다. 마태복음 24:26~41은 휴거를 가리키는 본문이 아니고 불신자(데려감을 당한 자)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있다(참고; 눅 17:37).

 

지상에 한순간 사람들이 모두 없어졌을 때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산자와 죽은 자가 부활하여 공중에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고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보좌 앞으로 쫓겨올 때 우주는 영광스러운(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우주의 구성요소들이 불길에 녹아 내리는) 변혁의 과정에 들어간다(벧후 3:7,11,12). 그래서 옛 하늘과 옛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전 변화된다(계 20:11). 그러나 불이 전 우주를 없애버리지 않고 불이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하늘과 땅”은 있으되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전히 변화할 것이다(벧후 3:13, 계21:1~5). 즉 완전 소멸이 아니고 새롭게 변화된다. 그리고 계시록 21:2의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새 땅으로 내려올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 이전의 몸과 그의 부활의 몸이 상호간의 불연속성뿐 아니라 연속성을 가지고 있듯이 현재의 것(하늘과 땅)과 “새 하늘과 새 땅” 사이에도 분명한 연속성이 있다. 예수님도 그 날에 내가 “다시 와서” 예비된 처소(영화롭게 변형된 새 땅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성)인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4)고 하셨다. 결코 우리를 지구 밖의 다른 어떤 곳으로 데려가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신자들을 피조세계 바깥으로 데려가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세상 도피적 의식을 반영한 것이며 성경적인 미래상은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미래관과 종말의 현실은 피조세계의 영광스러운 회복(골 1:19~20)을 강조하고 있으며, 완전히 변화된 세상인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하늘로부터 “새 예루살렘”성이 내려와 임할 것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새 하늘과 새 땅”(계 20:11)은 새로운 우주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재림의 때에 있을 현 우주(하늘과 땅)의 영광스러운 대변혁(벧후 3:7~13, 계 21:1~5)을 의미한다. 루터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피조물의 전체와 함께 부활의 날을 경축할 수 있는” 우주적 새 창조의 희망을 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과 관련하여 한국교회의 많은 성도들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영향으로 불원간에 완전히 불타 없어져버릴 이 세상(지구)에서 오직 데려감(휴거)을 당하기를 필사적으로 열망하면서 세상과 자연세계에 대한 문화적 사명을 외면해 왔다는 사실은 성경에 대한 심각한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인간의 타락과 욕망으로 오염되어 탄식 중에 있는 현재의 지구가 장차 불로 완전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정결케 되어 마치 새로운 지구의 출현으로 보일 만큼 완전히 영화롭게 갱생된다는 성경적인 종말과 자연관을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세계의 보호를 위한 진정한 관심과 책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온갖 공해에 시달리며 신음하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결코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바로보고만 있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아담 이후로 피조물도 허무한데 굴복하여 탄식과 고통 속에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때 현재의 썩어짐의 종노릇하는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을 바라고 있다고 하였다(롬 8:19~22). 이 구절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피조물의 탄식과 고통은 구체적으로 오늘날의 환경파괴에 적용시킬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고통 당하는 피조물을 해방시키는 것은 자연보호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의무를 가르치는 것으로 불 수 있다. 피조물들이 완전한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것이지만,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날에 장차 이룩하실 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소망 중에 이 세상(지구)을 주님 오실 그 날까지 잘 관리하고 보존하는 청지기적 직무와 사명을 다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