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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

 

박병진(양정제일교회 담임목사)

 

현대교회사에서 칼 바르트만큼 다양한 평가를 받는 신학자도 드물 것이다. 칼빈 신학교의 교의학 교수였던 클로스터(Fredd H. Klooster)는 칼 바르트의 신학을 비평하는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성경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종교개혁 신학 및 칼빈 사상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집중시킴으로 자유주의 신학을 넘어뜨린그의 신학적 공헌을 인정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변증학 교수인 반틸(Conelius Van Til)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바르트의 신학적인 공헌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자유주의자들에게 바르트는 자기들이 노는 놀이터에 폭탄을 던진 이단아로 평가받는다. 한국교회라고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성경을 신앙과 삶의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고 철저하게 확신하는 보수주의 계열에서는 성경을 계시 자체로 보지 않고 계시에 대한 증거요, 지표(指標)에 불과하다는 바르트의 견해에 동의할 수 없기에 그의 신학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즉 칼 바르트는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양측에서 공격을 받고 있는 신학자이다. 한국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고 평가받는 박윤선 박사는 개혁파의 신학노선을 따르는 우리는 자유주의, 발트주의, 알미니안주의와 복음주의라고 부르는 중간주의 신학도 반대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래서 박형룡 박사와 박윤선 박사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보수주의 계열에서는 신학자를 평가할 때, ‘그가 바르트적인가?’라는 부분으로 그의 신학을 평가해 버리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바르트에 대한 평가는 이미 바르트를 배우기 전부터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번에 칼 바르트의 마지막 조교(1965-1968)였던 에버하르트 부쉬(Eberhard Busch)가 자신의 스승의 편지와 회고록을 기초로 재구성한 칼 바르트의 전기가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원래 이 책은 1975년에 처음으로 출판되었는데, 거의 40년 만에 한국어로 번역되었으니 너무 늦은 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처음 본서가 출판되었다는 광고를 접하고 분량과 가격이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구입하는 열정을 보였다. 그 이유는 칼 바르트의 신학에 대한 비판적인 책 몇 권으로 그를 평가하고 비평한다는 것이 개운치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서를 처음 대하면서 9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에 기가 살짝 죽었지만, 참 재미있게 읽었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책을 다 읽어간다는 시원함보다는, 페이지가 줄어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섭섭함이 있었다. 그 만큼 본서는 나름의 재미와 감동과 새로운 신학적인 연구에 대한 길잡이가 되었다.

 

이 책은 전 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 사람의 전기인만큼 시기별로 기록되어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책은 어쩌면 칼 바르트라는 한 위대한 신학자에 대한 단순한 자료들을 열거해 놓은 다소 건조한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객관적인 자료 없이 그를 바르게 알고 평가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의미 있는 평가라 할지라도 다소 정확성이 떨어지는 것도 부인할 수가 없다.

칼 바르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그에게 영향을 끼친 양 가문에 대한 상세한 전개와 그가 태어난 바젤이라는 지역에 대한 재미있는 묘사는 매우 인상적이다. 증조부와 증조모,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약간의 집중과 주의를 기울여 읽어야 하지만, 칼 바르트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결국 한 사람이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과정에는 그에게 영향을 주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열심히 기도하는 분이셨던 할머니의 모습, 그리고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대하여 작은 돌멩이 하나라도 함부로 빼지 말라는 외할머니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어머니의 신앙, 어떤 일을 하더라도 열심히, 사려 깊고, 견고하게 하면서도 자유롭게 소통했던 아버지의 삶의 자세는 칼 바르트에게 보이지 않게 영향을 끼쳤다. 또한 근본적으로 보수적이면서도 다른 사람의 극단적이고 과격한 모습에 대해서는 관심과 공감을 보이며, 토론을 좋아하며, 삶에 대하여 진지한 태도를 가졌던 바젤 사람들의 성향 또한 칼 바르트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베른 대학교의 조직신학 교수가 된 아버지를 따라 옮겨진 새로운 삶의 터전인 베른에서의 청소년 시절은 여느 청소년들과 다름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아주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섬세한 집중력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소년으로 묘사되는 부분과 전투적이면서 호전적인 면이 함께 공존한 칼 바르트의 성격에 대한 평가는 장차 그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복선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스위스의 베른과 독일의 베를린, 튀빙겐, 마르부르크를 거치면서 받은 신학교육은 치열했던 그의 학문 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집중력 있게 공부했던 베를린 대학에서의 공부는 나름 바르트의 초기 학문과 신학, 신앙을 형성한다. 하르낙과의 만남은 칸트와 슐라이어마허로 이어져 그의 초기 신학의 한 부분이 되었다. 마르부르크에서 빌헬름 헤르만 교수와의 만남, 그리고 평생의 친구인 투르나이젠과 평생의 학문의 경쟁자였던 루돌프 불트만과의 만남도 꽤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렇게 칼 바르트는 수많은 학문의 선배와 동료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자신의 신학과 신앙의 세계를 넓고 깊게 형성해 갔던 것이다.

칼 바르트의 생애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기라면 당연히 자펜빌의 목사로 활동하던 시기였다. 바르트는 191126살의 청년으로 농부와 노동자로 구성된 작은 마을의 목사로 부임한다. 칼 바르트는 자펜빌 교회에서 개혁교회의 목사와 설교자, 교사의 직무를 충실하게 감당하면서 그의 삶에서 결정적이고 실질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훗날 바르트는 나의 신학의 뿌리는 바로 이 시절의 목회 활동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자펜빌의 경험은 그의 신학과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아마 바르트와 한 시대를 같이 보낸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도 이런 현장이 있었다면 그들의 신학이 저렇게 변질되지 않았을 것이다. 신학이 현장과 함께 하지 않을 경우, 그 신학은 금방 메마르고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음을 볼 수 있다. 오늘 이 시대 역시, 연구실에 갇혀 있는 신학은 그저 신학자들의 전유물은 될 수 있어도 그것이 교회를 바로 세우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기에는 너무나 무력한 이론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한 교회의 목회자로서 말씀과 목회에 집중하면서 칼 바르트는 그가 신학교에서 배웠던 신학을 완전히 부정하기에 이른다. 즉 그가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적 이론이 현장 목회에 적용하기에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임을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의 설교 역시 농부와 노동자들이 청중이었던 교회에서 그리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젊은 목사 칼 바르트에게 자펜빌의 목회는 그렇게 만만치가 않았다. 그래서 훗날 칼 바르트는 자펜빌에서의 목회를 철저하게 실패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의 정황만으로 본다면, 자펜빌의 목회는 그렇게 성공적이거나 만족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펜빌 이후의 칼 바르트의 좀 더 긴 생애를 놓고 본다면 결코 실패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첫 목회지에서 나름대로의 가르침과 목회에 대한 기본 원칙들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는 견신례 수업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자신이 직접 만든 교재를 가지고 아주 진지하게 가르쳤다. 그는 견신례의 목표를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친숙하여 그들의 삶을 따라가는 것으로 정하여 이 일을 꾸준하게 진행했다. 또한 견신례수업을 하거나 성경을 가르칠 때 칼 바르트는 그 일을 단순히 가르치고 배우는 일종의 수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목사와 성도의 인격이 만난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과 원칙을 가지고 임했다. 특별히 일방적인 가르침 대신, 청중들이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열린 마음을 가지고 질문을 던지면서 진행했다. 칼 바르트는 목회 이외에도 보건이나 부기(簿記)’와 같은 과목을 그 지역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자펜빌 시절, 칼 바르트에게 가장 독특하면서도 중요한 사역이라고 한다면 사회주의 운동로마서 강해의 출판일 것이다. 당시 자펜빌에는 600명 가량이 산업 노동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극도로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 일하고 있었다. 열악한 노동 환경 가운데 있었지만 노동조합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그 누구도 공장주에게 저항할 수가 없었다. 칼 바르트가 보기에 이것은 불합리한 것이었기에, 그는 그들에게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도움을 주기로 결심하고 사회주의를 통하여 이 일들을 진행했다. 바르트는 진정한 사회주의가 진정한 그리스도교이며,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했던 일이었다고 라고 할 정도로 굳은 확신을 가졌다. 물론 노동자를 대변하는 이러한 활동 때문에 바르트는 공장주들로부터 원색적인 비난을 받았다. 그렇지만 물러서지 않고 분명한 이론적인 지식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대처했다. 이렇게 맺은 사회주의와의 관계는 그 후 독일에서의 교수 생활 중에도 계속 이어졌다. 이것은 칼 바르트가 단순히 불합리하거나 정의롭지 못한 어떤 상황 앞에서 그것을 처리할 때, 충동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사려깊게 참가하고 처리했음을 보여준다. 칼 바르트는 어떤 문제를 처리하거나 접근할 때, 항상 성경적인 관점과 신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확신했을 때는 어떠한 저항과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성격을 볼 수 있다. 이런 그의 태도는 나중 독일에서 자유주의 신학자들과의 토론과 독일의 민족주의자들과의 끊임없는 투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칼 바르트에게 있어서 목회는 신학과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고민하도록 만드는 놀라운 도구였다. 오늘 21세기를 사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는 하나님을 설교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칼 바르트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종교 사회주의가 판을 치는 그 시대의 상황 속에서 내가 도대체 하나님에 관해 말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함께 다시 성경을 깊이 있게 읽고 주석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새롭게 읽기 시작한 책이 바로 로마서였다. 물론 로마서는 그 전에도 그가 몇 차례 설교한 적도 있고, 견신례 때 가르친 적도 있었지만, 바로 그 순간만은 로마서를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마서를 독서하면서 새롭게 깨닫고 발견한 것을 조심스럽게 적어나간 것이 바로 로마서 주석1판이다. 칼 바르트는 성경을 편견 없이 읽으려고 애썼고, 그 성경에서 기독교의 참 모습을 직접 보고 들으려고 온 마음을 다했다. 특별히 칼 바르트는 로마서의 저자인 바울이 자기에게 들려주는 것을 듣기를 원했다. 결국 이러한 그의 노력은 사도 바울이 인도해 준 성경적 증언의 진리와 명확함으로 인도받게 되었다. 로마서를 주석하면서 바울을 통하여 만난 새로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면서 칼 바르트는 당시 유행하고 있는 낭만주의, 이상주의, 그리고 경건주의와 선을 그었다. 그리고 과거 그에게 많은 신학적 영향을 준 은사들과 자연스럽게 결별하게 된다. 슐라이어마허와 마르부르크의 스승이었던 빌헬름 헤르만에게 등을 돌리고, 라가츠와 종교사회주의와도 확실하게 이별을 고하게 된다. 로마서를 주석한 이후, 칼 바르트의 설교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까지 신학자와 신학 속에 갇혀있었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분의 살아있는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칼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1판은 191812월에 인쇄가 되어 1919년에 출판되었고,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로마서 주석을 통하여 명성을 얻은 칼 바르트는 마침내 독일의 괴팅겐의 교수로 초빙되어 192110월 자펜빌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칼 바르트의 기나긴 교수 생활이 시작되는데, 이것은 곧 자유주의 신학자들과의 기나긴 투쟁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르트는 괴팅겐 대학에서의 첫 강의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해설을 개설함으로 시작하였다. 바르트는 의식적으로 개혁신학의 독특성을 해명하는 것으로 교수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더 철저하게 집중해서 개혁신학과 씨름하면서 공부했는데, 이는 곧 그가 그 자신을 더 의식적인 개혁주의 신학자로 만들어갔음을 보여준다. 이후 칼 바르트는 에베소서 강의를 비롯한 성경 주석 강의를 개설하여 성경 속으로 학생들을 인도하는 한편, 칼빈에 대한 강의를 개설하여 개혁신학의 영역을 점점 넓혀가는 사역을 하게 된다. 이렇게 바르트가 개혁신학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강의를 하게 된 것은 바르트가 자신을 개혁 교회적이고 칼빈주의적인 신학자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만, 한 번쯤은 상고해야 할 주제라는 생각이 든다.

1925년 여름이 지날 무렵, 칼 바르트는 뮌스터의 개신교 신학부의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그러면서 1927년 교의학 서설을 탈고하여 출판하게 된다. 이 책은 바르트 평생의 역작인 교회 교의학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바르트는 그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여러 권의 교회 교의학을 출간하게 된다. 이 후 바르트의 남은 시간과 사역은 어쩌면 교회 교의학의 저술을 위해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곳으로 여행을 가든, 강연을 가든 항상 그의 손에는 교회 교의학의 원고가 들려 있었다. 이후 바르트는 본 대학의 교수를 거쳐 조국 스위스의 바젤대학의 교수로 1962년까지 교수사역과 수많은 강연과 토론을 통하여 그의 신학과 사상을 전하면서 자유주의자들과 치열한 싸움을 하게 된다. 그리고 196810, 82세의 나이로 바젤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서두에서 밝혔듯이 본서는 상당한 분량의 책이지만, 참 재미있게 읽을 수가 있었다. 그것은 이 책이 가진 묘한 매력 때문이다. 비록 한 신학자의 생애를 기록한 전기지만, 이 책은 신학자 칼 바르트 외에 많은 것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첫째,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의 인간적인 면들을 상세하고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란 것 중에 하나는 한 사람의 생애를 너무나 자세하게 다루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각주가 2090개가 달린 것을 보면서, 저자가 그만큼 풍부한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청소년 시절, 청년 시절과 목회 시절, 사상과 신학의 전쟁터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대학교수 시절, 그리고 그의 가족들과의 휴가, 강연과 여행 등의 모든 것이 이 책에 실려 있다. ‘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 이토록 상세하게 기록될 수 있을까?’하는 부러움과 함께 왜 우리에게는 이런 전기를 만들 수 없을까?’하는 부끄러움도 생긴다. 이 책을 통하여 칼 바르트라는 인간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보게 되었다. 특별히 목회자로서 사역을 시작한 자펜빌 시절의 바르트는 자신의 길을 나름대로 확신 속에서 꾸준하게 달리는 다소 외고집적인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약자 편에서 저들을 돕기 위해 분명한 논리를 가지고 토론하며 설득하는 모습에서 투쟁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보게 된다. 또한 그의 아들 마티아스의 죽음을 통하여, 칼 바르트 역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성도였음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 그 외에 신학자 칼 바르트가 아닌, 인간 칼 바르트를 만나게 된다.

 

둘째로, 칼 바르트의 신학과 사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바르트의 신학은 분명 우리가 동의하지 못할 부분들이 있다. 가령 계시와 성경관, 그리고 유아세례의 문제와 회중교회론 등이 그렇다. 사실 이 문제는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가장 위험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바르트를 처음부터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바르트가 살았던 그 시대를 알게 됨으로, 바르트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바르트가 살았던 그 시대, 특별히 독일의 신학적인 상황은 말 그대로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성경을 분해하고, 하나님을 왜곡시켰던 시대였다. 그들에게 성경은 그저 기독교라는 종교의 문헌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거기에 대해 항거하지 않았다. 물론 몇 몇 개혁교회가 존재했지만, 여전히 미미한 실정이었다. 그러던 곳에 칼 바르트는 그야말로 핵폭탄을 던졌다. 칼 바르트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의 문헌으로 보았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했다. 또한 칼 바르트는 칼빈을 자신의 스승으로 보았고, 자신이 개혁주의 신학자라고 거듭 천명했다. 물론 전자에서 언급한대로, 지금 우리(장로교 보수주의자)에게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요소이지만, 그 당시로서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리고 칼 바르트는 바로 자신이 발견한 이 확신을 가지고 길고 지루한 싸움을 고집스럽게 전개했다. 바르트의 이 모습을 보면서 오늘 우리는 칼 바르트처럼 그렇게 우리가 가진 진리를 위해 치열하게 싸울 수 있을까?’라는 반성을 해 본다. 오늘 우리는 너무 피상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비판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칼 바르트가 비록 현재 우리의 신학적인 부분과 많은 차이가 있을지라도, 그가 이루었던 업적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칼 바르트가 살았던 그 시대를 좀 더 이해하는 자세를 가질 때 가능하리라 본다. 비단 이 문제는 칼 바르트에게만 국한 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적대시하고 무시해 버린다. 물론 악한 이단의 사설과 비 복음적인 부분들은 분명하게 교회에서 그 뿌리까지 말끔히 제거해야 한다. 그렇지만 좀 더 깊이 있는 신학적이고 배경적인 연구를 통하여 보다 폭넓으면서도 바른 자세를 견지하는 것도 필요하리라 본다.

 

셋째로, 칼 바르트가 활동했던 시대의 신학자들과 시대적인 상황들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참으로 유익했던 것은 칼 바르트가 만났던 수많은 신학자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그동안 비판적인 신학책에서 접했던 소위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과거 유명한 신학자들을 칼 바르트를 통해 새롭게 만나게 되었다. 위대한 교회사학자인 하르낙을 비롯한 빌헬름 헤르만, 루돌프 불트만, 에밀 브룬너, 파울 틸리히 그리고 반틸 등 수많은 신학자들이 직, 간접으로 바르트와 대화를 하기도 하고 격렬한 논쟁을 하기도 했다. 물론 칼 바르트의 입장에서 그들을 만났지만, 너무나 생생하고 재미있었고 유익했다.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문제로 토론하고 논쟁했는지를 알고 이해했기에, 그 시대의 상황을 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이 부분과 관련해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제 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한 독일 교회의 모습이었다. 독일 교회는 당시 나치 정권을 지지하고 나섰는데, 그 속에는 당시 신학계를 주름잡았던 유명한 신학교수들이 즐비했다. 물론 칼 바르트와 몇 명의 목사들만이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사실 바르트는 독일인이 아니었지만, 안타까운 심정으로 온갖 비난과 공격을 당하면서도 잘못된 부분에 대해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가지고 올 곧게 이 문제에 대처하고 분명하게 지적했다. 성급한 견해인지 모르겠으나, 독일 교회가 보여준 이런 행태는 자유주의 신학이 가진 약점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본다. 자유주의자들에게 사고와 판단의 기준은 성경이 아닌 자신의 생각이기 때문에게 얼마든지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독일 교회가 분명한 성경의 관점과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두 말없이 이 문제에 대해서 반대의 입장, 반대의 소리를 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성경이 단지 종교문헌에 불과 했기에 성경의 견해를 수용할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성경을 어떻게 대하는가의 문제가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여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하겠다.

 

마지막으로, 칼 바르트를 보면서 오늘 우리가 어떤 분야를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과제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칼 바르트에 대한 지식이 미천했을 때 가진 의문은 그가 일반 교회의 목회자로서 어떻게 로마서 주석를 집필할 수 있었는가?’였다. 그리고 더불어 생긴 의문은 어떻게 일반 목회자가 대학 강단에서 바로 강의할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였다. 이 의문은 이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우선 바르트는 목회하기 전에도 신학적인 소양과 능력을 가진 신학도로서 많은 연구 활동을 했었다. 그리고 목회하면서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대학 교수로서 바르트는 정말 쉬지 않고 연구하면서 강의했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학자였다. 특별히 개혁신학에 대한 그의 열정은 오늘 개혁주의자라고 자부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개혁주의 신학, ‘개혁주의 목회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실천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에 놓여있다. 바르트의 끊임없는 연구와 성실한 태도는, 지금 이 시점에서 나 자신이 무엇을 공부해야 하고,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신학은 성경을 뛰어넘을 수 없지만, 바른 신학 없이는 바른 성경의 해석과 적용도 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칼 바르트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보다 훨씬 더 다변화된 상황에 놓여 있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고 연구해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작은 이정표를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와 좀 더 가까워진 것 같다. 단지 신정통주의자 칼 바르트가 아닌, ‘신실한 신학자가장 인간미가 넘치는 교수로 다가왔다. 물론 담배 파이프를 들고, 포도주 잔을 기울이는 그의 모습은 아직은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더 이상 낯설지는 않다. 또한 식당에서 학생들과 함께 대화하면서 토론하고 함께 고민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학생들에게도 이런 좋은 교수가 있었으면하는 작은 바램도 가져본다. 또한 바르트를 읽으면서 모차르트를 사랑하게 되는 수확도 얻었다. 바르트가 너무 모차르트를 좋아하고 그를 즐겨 들었기에, 그 부분을 지날 때 자연스럽게 모차르트' CD를 오디오에 넣고 듣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그의 최대, 최고의 역작인 교회 교의학한 번은 읽어야 하겠다는 마음을 가져본다. 혹 사람들에게 아직도 칼 바르트인가!’라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을 통해 좀 더, 칼 바르트에게로라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었다.